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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프렌들리한 미디어 제작 환경을 위한 ‘스탠바이 큐’ - 홍석천, 이혁상, 슬릭, 손희정 참여한 토크쇼 지상중계
남선우 사진 백종헌 2020-10-13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현장을 꿈꾸며

이혁상 감독

퀴어가 안전한, 퀴어가 당당한 미디어 제작 환경을 위해 출범한 프로젝트 ‘스탠바이 큐’가 오프라인에서 첫선을 보였다. 추석 연휴를 앞둔 9월 25일 금요일 오후 7시, 이태원 세계음식거리에 위치한 홍석천 배우의 식당에서 ‘퀴어프렌들리한 미디어 제작 환경을 만들기 위한 특별한 토크쇼’라는 이름의 행사가 열렸다. 페미니즘적 실천을 바탕으로 다양한 퀴어의 삶을 영상에 녹여온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 미디어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힘쓰고 있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의 공동 기획인 스탠바이 큐는 지난 9월 18일까지 텀블벅에서 펀딩을 실시하며 그 출발을 알렸고, 225명의 후원으로 목표 금액을 초과 달성하며 펀딩에 성공한 바 있다.

손희정 평론가

토크의 시작에 앞서 스탠바이 큐를 소개한 손희정 평론가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위로를 나누고 응원하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 토크쇼를 준비했다”고 행사의 취지를 설명했다. 패널로는 “미디어의 현실을 찢고 나온, 중요한 계기와 사건을 만든” 세 사람이 함께했다. 20년 전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연예인으로서 게이 커밍아웃을 한” 배우 홍석천, 10년 전 “또 하나의 기적 같은 커밍아웃 스토리인 다큐멘터리 <종로의 기적>”을 연출한 이혁상 감독, 올해 Mnet <GOOD GIRL: 누가 방송국을 털었나>(이하 <굿 걸>)에서 레인보우 플래그가 날리는 무대를 꾸민 페미니스트 래퍼 슬릭이 그들이다. 방역 지침을 준수하기 위해 10여명의 인원으로 한정해 입장한 현장 방청객들이 박수로, 수어 통역 영상과 더불어 온라인으로 참여한 관객이 댓글로 이들을 환영했다.

현장에서 겪은 고민, 제보하고 문의할 창구되길

배우 홍석천

행사는 사전에 모집한 사연을 낭독하고, 이에 대한 패널들의 생각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30대 초반의 게이이자 10대부터 영화감독을 꿈꿔온 촬영 스탭의 사연을 필두로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제작 현장에서 소수자에 대한 편견 어린 말을 들을 때마다 난감하다는 그는 자신이 반박하면 화내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안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성적 지향이 알려지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전했다. 일터에서 혐오 표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고 싶다는 그에게 패널들은 우선 그가 처한 상황에 공감을 표했다. 제작지원 심사 자리에서, 게이가 주인공인 시나리오를 쓴 참가자에게 “왜 동성애 영화를 찍느냐”고 묻는 심사위원을 향해 “내가 게이인데, 왜 하면 안되느냐”고 되물은 이혁상 감독, 커밍아웃 이후 SBS 드라마 <완전한 사랑>에서 게이 캐릭터를 연기했을 때 각종 블랙 메일과 반대 집회를 맞닥뜨린 홍석천 배우, <굿 걸>에서 페미니즘과 소수자 인권을 이야기하고 후폭풍을 겪은 슬릭 모두 사연자와 비슷한 이유로 혼란스러웠던 경험을 꺼내놓았다. 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 누군가와 교감하기를 권했다. 일찍이 대학에서 연기 수업을 받으며 교수와 학우들 앞에서 “홍석천 안의 또 다른 홍석천”을 보일 수 있었고, 연예계 동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행동할 수 있었기에 공식적인 커밍아웃을 하는 게 크게 무섭지 않았다는 홍석천 배우는 예상보다 견디기 힘든 고통이 찾아왔을 때 주변 방송인들이 “개의치 말아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우리는 너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해준 것이 큰 힘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커밍아웃이 나를 힘들게 할 수도 있지만 남들에게 당당히 내가 누군지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짚었다. 동시에 경제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커밍아웃을 하면 위험할 수 있다고도 강조했다. “커밍아웃을 했을 때 불이익이 올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조금 더 실력을 키우며 자리를 굳건히 할 수 있는 때를 기다리는 것 또한 중요하다.”

가수 슬릭

다음으로는 슬릭이 FTM 트랜스젠더 남성 스탭의 곤혹스러운 여름나기 사연을 낭독했다. 비수술 트랜스젠더로서 압박붕대와 마스크의 이중고를 겪으며 살얼음판 같은 현장을 경험했다는 그는 빨리 수술을 받고 싶지만 그 과정에서 경력이 단절될까 조바심이 난다고 토로했다. 이혁상 감독은 넷플릭스의 가이드라인을 예로 들며 한국에서도 이런 고민이 조금은 옅어질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넷플릭스는 ‘존중을 위한 약속’이라는 제목으로 ‘희롱 반대와 고용 기회의 평등을 위한 정책’을 한국어를 포함한 26개 국어로 번역해 배포하고 있다. 가이드라인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도 포함된다. “모두가 함께하는 근무 환경에는 트랜스젠더 및 일반적인 젠더 규범을 벗어나는 직원 또한 포함됩니다. 프로덕션에 참여하는 직원이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성적 정체성 또는 특성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전환기를 겪는 중이라면 프로덕션 HR리더 또는 라인 프로듀서/UPM/EP와 협의하여 구체적인 요구 사항이나 우려되는 점이 있는지 알리시기 바랍니다.” 이 내용은 한국에서 제작되는 넷플릭스 작품의 대본 앞장에도 인쇄된다고 한다. 이혁상 감독은 이로부터 영감을 얻어 스탠바이 큐에서도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며, 가이드라인의 열 가지 표제를 낭독했다. 그는 LGBTQ 영화가 투자나 캐스팅 단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처럼, 현장의 LGBTQ들도 창작 과정에서 당혹스러운 순간들을 겪기 마련이니 앞으로도 관련된 고민을 스탠바이큐에 제보하고 문의해달라고 부탁했다.

<밀크>

<포즈>

손희정 평론가는 선진적인 형식 안에서 선진적인 서사와 이미지가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며 패널들에게 스스로 위로하고 싶을 때 꺼내보는 콘텐츠가 있는지 물었다. 이혁상 감독과 홍석천 배우는 퀴어 서사로부터 위안을 얻은 경험을 들어 각각 드라마 <포즈>와 영화 <밀크>를 추천했다. 에이즈로 인한 공포가 확산되던 1980년대 말 뉴욕, 무도회장을 중심으로 커뮤니티를 꾸린 성 소수자들을 조명한 <포즈>는 이혁상 감독에게 “마치 나와 내 친구들의 이야기처럼” 다가왔다고. 2018년부터 미국 <FX>에서 방영된 이 드라마는 현재 시즌2까지 넷플릭스에서 시청할 수 있다. 홍석천 배우는 2009년 덴마크에서 열린 ‘월드 아웃게임스’(World Outgames)에 참가했던 때를 회상했다. LGBTQ 올림픽으로도 불리는 이 행사에서 한국에서의 커밍아웃 경험을 강연한 후 청중과 야외에서 <밀크>를 본 시간을 잊을 수 없다고. 그는 1970년대 미국의 게이 인권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던 하비 밀크의 여정을 좇으며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문제”에서 차별의 아픔이 왔음을 재확인하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두 패널의 선택이 40~50여년 전 미국을 배경으로 한 스토리에 모인 데 반해 슬릭은 “음악과 영화의 언어가 내가 있는 현실과 다른 곳을 가리킬 때 환상이 깨질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가사 없는 일렉트로닉 음악을 만드는 DJ이자 프로듀서, 퍼포먼스 아티스트인 키라라의 음악을 추천했다. “나를 괴롭히는 것들로부터 해방되어 음악에만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

키라라(출처: 키라라 공식 홈페이지.photo by 미향)

차별금지법에 대한 소망

나와 닮은 이들을 발견하게 해주는 콘텐츠, 그대로의 나를 맞아주는 동료들은 홍석천, 이혁상, 슬릭에게 용기이자 동력이었다. 미리 사연을 보내준 미디어계 종사자들에게 이와 같은 이야기를 전한 이들은 현장 방청객이 적은 질문들에도 답변을 이어갔다. 당사자는 아니지만 성 소수자들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엘라이(ally)들이 가져야 할 태도를 물은 방청객에게 이혁상 감독은 “LGBTQ뿐만 아니라 엘라이도 커밍아웃을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성 소수자를 지지한다’라고 밝히면 현장에 숨어 있던 퀴어들에게 직간접적인 힘이 될 것”이라 귀띔했다. 손희정 평론가는 “퀴어 관련 용어도 많다보니 말 한마디 잘못해서 상처를 줄까봐 걱정하는 분들이 많다”며 퀴어 엘라이들에게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지식의 양보다 중요한 건 태도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마음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함께할 수 있다.” 홍석천 배우도 거들었다. “이성애자들끼리도 서로 상처 주는 말을 하고 사과하며 친해지는 과정을 겪지 않나. 우리라고 더 금세 상처받고 공격하는 존재는 아니다. 서로 다른 종족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다가와주면 좋을 것 같다.”

다음 질문을 던진 방청객은 퀴어 커뮤니티 내부의 문제를 가리켰다. 퀴어 문화내에서 일어나는 혐오와 차별이 더 슬플 때가 있다고 쓴 그는 내부에서의 배제없이 다 함께 나아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지 물었다. 홍석천 배우와 이혁상 감독은 커밍아웃 이후 게이 커뮤니티 내에서 “왜 하필 쟤야?”라는 시선이 있었다며 그 안에서도 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혐오는 물론 연령과 외모로 인한 차별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공감했다. 홍석천 배우는 “(퀴어들이) 차별에 차별을 겪으면서 박탈감이 커지다보니 자기 앞의 기득권에 대한 소유욕이 더 큰 것일 수도 있”음을, 이혁상 감독은 “(퀴어로서) 중년 이후의 삶이 잘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두려움”도 크다는 점을 들어 이러한 현상을 진단했다. 슬릭 또한 여성이면서 여성 혐오를 할 수 있고, 퀴어이면서 퀴어포빅한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짚으며 “페미니즘을 공부할 때는 내가 권력관계 안에서 피권력자임을, 비거니즘을 공부할 때는 내가 권력자의 위치에 있음을 배웠다”며 나의 위치를 다면적으로 파악하는 공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혁상 감독은 “차별의 조건들이 명시화되고 법제화되면 변화에 가속이 붙을 것”이라며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소망을 내비쳤다.

마지막으로는 패널들의 빈칸 채우기가 이어졌다. 세 사람은 각자의 바람을 담아 ‘퀴어프렌들리한 미디어 제작 환경을 위해서 OOO이 필요합니다’라는 문장을 완성했다. 먼저 이혁상 감독은 “더 많은 커밍아웃이 필요합니다”라고 답했다. “한국에서 커밍아웃이 어렵지만, 자신의 조건을 고려하고 커밍아웃을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다른 누군가에게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홍석천 배우는 쿼터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외국에서는 이미 쿼터제가 진행되고 있다고 입을 뗀 그는 “차별받고 있는 소수자들에게, 소수자 몇명과는 꼭 같이 일을 해야 한다는 쿼터제가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정 안된다면 우리끼리라도, 전체가 우리인 팀으로 기가 막힌 콘텐츠를 만들겠다”며 미소지었다. 마지막으로 슬릭은 필요하지 않은 것을 언급했다. 그는 사라져야 할 대상으로 위계질서를 지목했다. “차별하고 혐오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지만 그걸 말로 할 수 있는 이유는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말해도 되는 상황이니까 말한다고 생각한다. 혐오와 차별을 뒷받침하는 위계질서가 없어진다면 좋지 않을까.” 그의 대답에 홍석천 배우는 “슬릭의 <굿 걸> 무대를 보면서 내가 밥을 사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이제 보니 슬릭에게 밥을 사주고 싶다”며 박수를 이끌어냈다.

한 시간으로 예정된 토크쇼는 한 시간하고도 30분이 훌쩍 넘도록 진행되었다. 행사를 마치며 손희정 평론가와 세 패널이 각자의 소감을 전했다. 이혁상 감독은 “반신반의하며 시작한 스탠바이 큐인데, 패널 분들이 흔쾌히 토크쇼에도 참여해주시고 많은 분이 후원도 해주셔서 감사하다”며 앞으로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을 밝혔다. 슬릭은 퀴어 혐오로 힘들어하는 친구를 위해 무얼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굿 걸> 첫 무대를 꾸린 것이라는 뒷이야기를 전하고, 오늘 토크에도 참여하길 잘했다며 누군가에게 용기가 되는 행보를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을 고백했다. 커밍아웃 20주년 기념 생일상이라는 생각으로 토크쇼에 참여했다는 홍석천 배우는 최근 한 청년으로부터 감동받은 사연을 말하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21살인 친구가 우리 가게에 와서 내게 커밍아웃을 했다. 엄마에게도 커밍아웃을 했다기에 순간 걱정이 되어 엄마의 반응을 물어봤는데 엄마가 아들의 결정을 존중한다며, 이왕 커밍아웃한 거면 홍석천씨처럼 살아보라고 했다는 거다. 그 말이 그동안 끊임없이 참아야 했던 내게 너무나 큰 위로가 되었다. 앞으로도 열심히, 잘 버텨보겠다.”

토크쇼가 마무리되고 깜짝 이벤트가 있었다. 축하 음악이 흐르고, 현장의 스탭들이 케이크를 들고 무대로 들어왔다. 홍석천 배우의 커밍아웃 20주년, 이혁상 감독의 커밍아웃 10주년을 축하하는 깜짝 파티였던 것. 두 사람은 현장의 모든 이들과 기쁨을 나누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20년 더!”라고 외치며 축하를 전한 한 방청객에게 “은퇴할 거야!”라고 장난치며 응수한 홍석천 배우는 이 자리를 지켜본 모든 이들에게 이 한마디를 건네며 스탠바이 큐 토크쇼의 매듭을 지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다보면 진짜 행복해지실 겁니다. 사랑합니다!”

참가자들이 말하는 ‘나를 위로한 콘텐츠’

배우 홍석천

<밀크> <더 폴리티션> <오, 할리우드> 성 소수자 캐릭터들의 꿈과 사랑을 그린 작품들. <밀크>와 <더 폴리티션>은 이들의 정치 도전을, <오, 할리우드>는 영화계 진출을 좇는다. <밀크>는 웨이브, <더 폴리티션>과 <오, 할리우드>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이혁상 감독

<포즈> 1980년대에서 1990년대를 가로지르는 소수자들의 희망과 연대 이야기. 다양한 인종, 성 정체성, 성 지향성을 지닌 인물들이 음악과 공간을 공유하며 함께 살아간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래퍼 슬릭

키라라의 음악 “키라라는 이쁘고 강합니다. 여러분은 춤을 춥니다”라는 멘트로 매 공연을 시작하는 아티스트. 2017년 두 번째 정규 앨범 《moves》로 제14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댄스&일렉트로닉 음반상을 수상했다. 유튜브 채널 <kirarararararararara>에서 공연 영상도 볼 수 있다.

‘성 소수자 친화적인 미디어 제작 환경을 위한 가이드라인’

➊ 모두가 나와 같지 않습니다. ➋ 성 중립적 환경을 만들어보아요. ➌ 프라이버시를 존중하세요. ➍ 동료의 커밍아웃을 지지해주세요. ➎ 아우팅을 방지합니다. ➏ 정체성으로 전문성을 판단하지 마세요. ➐ 동료 여러분, 모범이 되어주세요. ➑ 동료 여러분, 현장의 차별과 혐오에 함께 맞서주세요. ➒ 모르는 게 당연해요. 그러니 언제든 물어보세요. ➓ 제보하세요! 스탠바이 큐가 함께합니다. * 자세한 내용은 스탠바이 큐 홈페이지(https://hanbit.center/hanpink)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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