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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엽 편집장] 이 시절
장영엽 2020-10-23

‘그 옛날 내게 소중했던 그 이야기를 들려줘. 그 옛날 내가 즐겨 들었던 그 노래를 불러줘.’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칠중주: 홍콩 이야기>는 영국 작곡가 토머스 헤인즈 베일리가 작곡한 <그 옛날에>(Long, Long Ago)로 영화의 시작과 끝을 열고 닫는다. 애틋했던 과거의 순간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노래하는 이 곡은 홍콩과 홍콩영화의 역사를 반추하는 옴니버스영화의 사운드트랙으로 최적의 선택이다.

두기봉 감독이 제작하고 홍금보, 허안화, 담가명, 원화평, 두기봉, 임영동, 서극 감독이 연출한 <칠중주: 홍콩 이야기>는 1950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70여년의 세월을 경유하며 홍콩의 역사와 공간, 문화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홍콩영화의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함께했던 감독들은,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이 사랑하는 공간을 매력적으로 담아내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곳에는 물구나무서기로 하루를 시작하는 희극학원에서의 고된 훈련에 지쳐 잔꾀를 부리는 소년 홍금보가 있고(홍금보, <수련>), 실수로 교실에 소변을 본 제자의 마음이 다칠세라 일부러 제자의 바지에 물을 쏟는 사려 깊은 선생님이 있다(허안화, <교장선생님). 쿵후와 영어를 교환하며 우정을 쌓는 할아버지와 손녀딸이 웃음을 주는 한편(원화평, <귀향>), 서로가 서로에게 두번 다시 없을 사랑임을 알지 못한 채 마지막 밤을 보내는 연인의 멜로드라마(담가명, <사랑스러운 그 밤>)가 심금을 울린다. 장르와 연출 스타일은 작품마다 다르지만, <칠중주: 홍콩 이야기>의 일곱 단편은 공통적으로 ‘좋았던 그 시절’에 대한 애상적인 정서를 품고 있다. 활력이 넘치거나 다정다감하게 연출된 장면에서조차 서글픈 기분이 드는 건 이 영화가 홍콩의 황금기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명확하게 자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교적 가까운 과거를 조명한 임영동 감독의 유작 <길을 잃다>에서 막연하게 느껴지던 상실감은 보다 뚜렷해지는데, 과거에 알던 지명으로 더이상 목적지를 찾을 수 없음을 알게 된 주인공 임달화의 공허한 표정이 이를 대변한다. 대미를 장식하는 서극 감독의 <속 깊은 대화>에 이르면 본인이 허안화인지, 장만옥인지, 임영동인지, 아니면 그 누구인지 가늠하지 못하는 복합망상증 환자까지 등장하는데, 급변하는 시대를 정면으로 마주하고있는 20세기 거장들은 어떤 마음으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일종의 주문처럼 관객에게 안녕을 고하는 영화음악 <그 옛날에>를 듣고 극장을 나왔더니 CGV가 상영관 30%를 감축한다는 소식이 휴대폰에 도착해 있다. 며칠 뒤에는 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가 영업을 중단한다는 소식이, 또 며칠 뒤에는 홍대 KT&G상상마당 시네마가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그 시절이 그립구나”라는 <수련>의 마지막 대사는 아주 먼 훗날에나 생각하게 될 줄 알았다. 익숙했던 현재가 순식간에 그리운 과거로 돌변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마주했을 때의 기분은 이런 거냐고, 누군가에게 묻고 싶은 한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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