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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이종필 감독 - ‘어쩌다’가 일으킨 ‘마땅한’ 결과를 그렸다
이주현 사진 백종헌 2020-10-29

이종필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 <전국노래자랑>(2013)은 <전국노래자랑> 무대에 서는 게 꿈인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두 번째 영화 <도리화가>(2015)는 여성은 소리를 할 수 없던 시대에 판소리에 도전했던 여성과 그 스승이 주인공인 이야기였다. 현실의 벽에 부딪히거나 무언가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이야기와도 상통한다. 이종필 감독은 “직업인으로서의 영화 연출자”라는 말을 반복하며, 맡은 일에 최고로 숙련된 솜씨를 보여주는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최선을 다해 이번 영화를 잘 만들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글로벌이 화두였던 1995년, 삼진그룹의 상고 출신 직원 자영(고아성), 유나(이솜), 보람(박혜수)이 어쩌다 회사의 페놀 유출을 목격하고 내부고발하는 이야기를 만화적 톤으로 발랄하게 그린 영화다. ‘파이팅’하는 삶과는 거리가 멀었던 이종필 감독을 저절로 파이팅하게 만든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대해 시시콜콜 이야기를 나눴다.

-전작 <도리화가> 이후 5년이 흘렀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도리화가>가 결과적으로 잘 안됐는데, ‘이 영화는 왜 안됐을까’ 생각해보니 다 내 잘못이었다. 관습적으로 영화를 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영화광에다, 영화학교(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이다. 졸업 후 상업영화 연출을 맡게 됐을 때 그 누구도 내게 ‘상업영화는 이래야 돼’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상업영화는 이래야 돼’라는 관념으로 영화를 대했던 것 같다. 애초에 관습은 없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반성의 시간을 가지니 3년이 훌쩍 흘렀더라. 그러다 2018년 6월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제작사 더램프의 박은경 대표에게 연락이 왔다. 처음엔 의아했다. 첫 영화 <전국노래자랑> 이후엔 시나리오가 꽤 들어왔지만 <도리화가> 이후엔 아무도 나를 찾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왜죠? 왜 나를? 무슨 이야기예요?” 물었더니 “1990년대가 배경이고 상고 나온 대기업 말단 여자 직원들이 파이팅하는 이야기”라고 하더라.

-그 한줄 로그라인이 마음에 들었나.

=‘파이팅’이란 말이. 양지를 지향하는 인간이 아니어서인지 파이팅이라는 말이 참 낯설면서도 내가 생각하는 파이팅은 뭘까 싶었다. 시나리오를 읽으니 생각한 방향과는 좀 달랐다. 홍수영 작가의 초고는 사회 고발물이었다. 미투 플롯과 페놀 유출 사건, 두 가지 축이 있는 이야기. 이걸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다가 밥이나 먹어야겠다 싶어 냉장고 위 쌀 포대에서 쌀을 푸는데 쌀 포대가 떨어져 사방에 쌀알이 흩어졌다. 내가 아는 나란 인간은 그런 상황에서 ‘나는 왜 항상 이 모양일까’ 하며 자괴감에 빠져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쭈그리고 앉아 ‘주우면 되지’ 하고 쌀알을 줍고 있더라. 시나리오 속 캐릭터들에게 영향을 받은 건가? 이 이야기 속 캐릭터들은 뭔가 해결하는 인물이니까. 연출을 맡기로 하고 작업에 착수했을 땐 생각보다 힘들었다. 자연스레 연상되는 기획들이 있지 않나. <히든피겨스>나 <에린 브로코비치>. 두 영화는 실존 인물에 실화가 바탕인 영화인 반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배경으로서의 실화는 있지만 스토리로서의 실화는 없다. 실존 인물이나 사건이 있으면 그걸 잘 따라가면 될 텐데 이건 하나의 큰 배경(대기업에서 고졸 사원을 대상으로 토익반을 개설한 일)과 하나의 큰 사건(페놀 유출 사건) 사이에서 따라갈 점이 없었다.

-어떻게 실마리가 풀렸나.

=확실한 기조는, 내부 고발이라는 주제는 무거울 수 있지만 이 친구들이 신나게 활약하는 이야기였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판타지일지 언정 한번이라도 승리하는 이야기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함께 시나리오를 쓰던 손미 작가가 “그러면 코지 미스터리는 어때?”라고 장르적 방향성을 던져줬다. 형사나 탐정이 아닌 보통의 인물이 사건을 해결해가는 소프트한 탐정물 장르인데, 탐정물로서의 장르적 재미와 성장영화의 재미를 더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남자감독으로서 여성의 성장 및 성공 서사를 만드는 것이 조심스럽거나 부담스럽진 않았나.

=생각해봤다. 이건 페미니즘 영화인가? 내가 아는 페미니즘 영화는 뭐지? <돌로레스 클레이븐>이나 <비포 선라이즈>도 내겐 페미니즘 영화다. 그때까지 봤던 다른 영화들과 달리 <비포 선라이즈>에선 줄리엣 비노쉬가 계속해서 자기 이야기를 한다. 영화를 보는 사람에 따라 페미니즘 영화의 기준이 다를 거고, 각자의 판단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페미니즘 영화를 원하는 분도, 좀더 보편적인 이야기를 원하는 분도 모두 만족시키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박완서 작가의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처럼, 사회를 구성하는 다수의 사람들,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접근했다. 자영, 유나, 보람이라는 캐릭터 그 자체가 중요했다. 이 영화를 정말 잘 만들고 싶었고, 그래서 배우들에게도 끊임없이 물어봤다. 유나와 보람이 국수를 먹는 장면의 경우, 유나가 보람에게 “이자영한테는 이야기하지 마”라고 말하는데, 그런 대사는 남자인 나는 절대 생각해낼 수 없다. 인물들의 관계에 대해선 배우들의 의견을 많이 들었다.

-영화를 보면 자영, 유나, 보람은 퇴근 후 도넛, 떡볶이, 국수 등 늘 무언가를 먹으며 계획을 세운다

=주인공들의 집이 영화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왠지 90년대 한국의 직장인들은 밤낮으로 일했을 것 같은 느낌이 있었고, 그러면 영화에 직장만 나오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캐릭터에 정이 들면서, 이들을 집에서 재우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 먹이기라도 잘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고아성, 이솜, 박혜수 세 배우가 한 화면에 등장하는 장면이 많다. 세 배우의 이미지나 기운이 서로 다른데, 이들이 조화롭게 잘 어울릴 거란 느낌이 있었는지.

=겉모습의 개성은 생각하지 않았다. 걸 그룹을 결성하는 것도 아니고. 한명은 키가 커야 되고 한명은 귀여워야 하고 등등 그런 외적인 모습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저 누가 자영에 어울릴까, 누가 유나와 보람에 어울릴까만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세 배우가 영화를 찾아서 와준 것 같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세 배우가 한 영화에서 만나기 위해 이 영화가 존재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글로벌 캐피털이라는 나쁜 자본주의에 맞서 ‘우리’ 회사를 살려야 한다는 결말부에는 은근한 애국주의와 애사심도 깔려 있는데.

=계몽적이고 도식적인 결론일 수 있다. 내부 고발 이야기들을 보면 회사 밖에서 싸우는 이야기가 많은데, 나는 안에서 싸우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요즘 세대의 가치로는 ‘회사를 떠나고 말지, 망해버려라’라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일을 우리가 안에서 싸우면서 해결한다는 개념이 중요했다. 보람 캐릭터만 봐도 애사심이 없는 친구다. 친구가 얽힌 일이고, 숫자와 관련된 일이고, 그러다 보니 엉겁결에 회사를 지키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 애사심이나 정의감이 아니라 ‘엉겁결에’, ‘어쩌다’가 동기가 된다. 자영 입장에서도 그냥 넘어가기엔 괴로우니까, 이것마저 참고 넘어가면 너무 쪽팔릴 것 같으니까 행동했던 게 아닐까. 과정은 ‘어쩌다’였지만 마땅히 그래야 했던 결과에 도착해 있는 거랄까. 이들이 승리하는 걸 보고 싶다는 강박 때문에 이야기에 비약이 생긴 것 같은데, 인물들은 잘못이 없다.

-과거엔 간간이 연기를 했다. 요즘은 연기 안 하나.

=잊을 만하면 연기 제안이 온다. 지금은 연출이 우선이란 생각이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더 집중하고 싶다. 영화에서 보람이 “숫자한테 미안해”라고 하는데, 나 역시 ‘영화한테 미안해’ 하는 마음이 있어서, 연기엔 크게 뜻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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