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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릿> LA 시사기 [1]
김혜리 2002-05-14

2D `액팅`, 3D `액션` 을 만나다

야생의 자유의지에 새 생명을 불어넣다

박스오피스의 수호신이 제정한 할리우드력(曆)의 입하(立夏)에 해당되는 5월 첫 주말의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마케팅 엔진이 뿜어내는 열기는 도시 곳곳에서 스멀거렸다. 몇몇 호텔은 정킷 손님으로 북적였고 아침이면 TV토크쇼 진행자의 머리 위에서 스파이더 맨 인형이 그네를 탔으며 밤이면 <폭스TV>에서 <스타워즈> 4, 5, 6편의 루크 스카이워커가 <에피소드2: 클론의 습격>의 카운트다운을 맞아 광선검을 휘둘러댔다.말 한 마리의 실루엣이 빛바랜 성조기를 닮은 바탕 위에 덩그러니 새겨진 <스피릿>(Spirit: A Stallion of the Cimarron)의 티저 포스터는, “날 좀 봐달라!”고 목청을 높이는 여름 블록버스터들의 총천연색 아우성 속에서 상대적으로 소박하고 과묵해보였다. 하지만 5월3일 저녁 24개국 기자 70여명을 상대로 <스피릿> 시사회가 열린 LA 윌셔 대로의 AMC AVCO극장에 초대받은 일반 가족 관객의 반응은 과묵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불이 꺼지기 전 소아과 대기실처럼 시끄럽던 객석은 머스탱종 야생마 스피릿의 운명이 모퉁이를 돌 때마다 탄성과 한숨과 환호로 추임새를 넣었다.

서사극에 어울리는 리얼리티

<슈렉>으로 지난해 초여름을 집어삼킨 드림웍스가 내놓은 2002년 여름 장편 애니메이션 <스피릿>은 옛날 옛적 서부를 무대로 질주하는 영웅담이다. 단, 여기서 영웅은 카우보이가 아니라 길들여지지 않는 피가 흐르는 야생마다. 무리를 이끌던 젊은 말 스피릿(내레이션: 맷 데이먼)은 왕성한 호기심으로 인간의 캠프를 엿보다 백인 기병대의 포로가 된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기병대장(목소리 연기: 제임스 크롬웰)은 스피릿에 고삐를 매 다른 말처럼 노예로 길들이려 하나 불굴의 스피릿은 포로로 잡혀온 라코타 인디언 청년 리틀 크릭(목소리 연기: 대니얼 스투디)과 의기투합해 요새를 탈출하고 리틀 크릭의 애마 레인과 사랑에 빠진다.물론 영웅의 시련이 그리 간단히 끝날 수는 없다. 기병대의 인디언 마을 습격으로 레인, 리틀 크릭과 가슴 찢기는 이별을 한 스피릿은 다시 철도 공사장의 사슬에 묶인다. 그러나 화염도 급류도 채찍도, 무리의 품으로 돌아가려는 스피릿의 자유의지에 재갈을 물리진 못한다. 멸종동물인 공룡들의 엑소더스에 행복한 마침표를 찍어주었던 <다이너소어>처럼 <스피릿> 역시 먹구름이 몰려오기 전에 천막을 걷는다.

할리우드에서 한동안 숨죽였던 동물 히어로 주연 만화영화를 부활시킨 <스피릿>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 동물 캐릭터들이 인간의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린 조카들에게 차근히 들려주는 후일담의 말투로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스피릿의 내면 독백을 제외하면 <스피릿>의 말들은 오직 음향팀이 채집한 그르릉대고 낑낑거리는 말의 소리로만 속삭이고 호소하고 분노한다. 개그보다 액션과 캐릭터로 관객을 동화시키는 드라마로 방향을 잡은 <스피릿>의 제작진은 말에게 인간의 언어를 말하게 하는 안을 기획 초기단계부터 배제했다.

의인화된 말은 불가피하게 웃음부터 자아낼 터였기 때문이다. 캐릭터들이 직접 노래하고 춤출 수 없으므로 뮤지컬의 요소도 직설적이고 친절한 노래말을 가진 브라이언 애덤스의 화면 밖 노래들로 통합됐다. 덕분에 죽도록 고생하는 ‘탈것’이거나 수다스런 코미디언이었던 대부분의 영화 속 말들과 달리 <스피릿>의 말은 서사극의 공기에 어울리는 리얼리티와 영화 속 시선의 주인으로 품위를 유지한다.

선택받은 비범한 자의 모험을 따라 환희와 절망을 오르내리는 굴곡진 드라마와 나란히 가족용 여름 오락영화로서 <스피릿>이 내세우는 무기는 단연 중량급의 액션 스펙터클이다. 강인하고 용감하고 낙천적인 영웅 스피릿은 말 그대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두루 겪는다. 2D 캐릭터와 3D 배경의 상호작용을 지금까지 어떤 애니메이션보다 혼연일체로 뽑아냈다는 <스피릿>의 기술적인 성취가 과시되는 지점도 주로 숲이 불타고 기차가 언덕을 굴러내리고 급류가 곤두박질치는 액션의 현장들이다.

<늑대와 춤을>의 케빈 코스트너처럼 <다이 하드>의 브루스 윌리스처럼 홀몸으로 적진을 돌파하고 <스피드>의 버스처럼 골짜기를 뛰어넘는 스피릿은 정통파 액션 히어로들이 SF와 판타지의 초인들에게 자리를 내준 올 여름의 맨주먹 영웅 자리를 노려봄직하다. 또한 <아나스타샤>(1997) 이후 애니메이션으로서는 최초로 시네마스코프 화폭에 펼쳐진 모뉴먼트 밸리, 옐로스턴, 브라이스 캐년, 요세미티 등 국립공원의 파노라마는 그림으로 보는 관광을 방불케 한다.

<신바드>의 성공까지 미리 점친다

드림웍스가 야생마 스피릿의 건각에 걸어놓은 것은 2002년 여름 한철 박스오피스 농사 이상이다. 제작자 제프리 카첸버그와 <스피릿>의 창작자들은 시사회에 이어진 프리젠테이션과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전통적 2D 애니메이션과 컴퓨터 3D 애니메이션의 완벽한 결혼이며 그 결합의 정도가 워낙 혁신적인 나머지 ‘트래디지털’(tradition+digital)이라는 새로운 종명을 붙이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거듭 주장했다. 1986년 <올리비아의 대모험>의 빅벤 시계탑에서부터 핸드드로잉 애니메이션과 CG의 결합은 장편 만화영화의 기본 사양이 된 지 이미 오래.

그러나 3년 전에 전통 애니메이션은 그것만으로 미래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카첸버그는 <스피릿>이 2D와 3D를 한 프레임 안에서 심지어 한 캐릭터 안에서 분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통합시킴으로써, “생명을 불어넣다”라는 애니메이션 본래의 의미를 가장 아름답게 실현시키는 핸드드로잉 애니메이션의 생명력과 오늘날 관객이 요구하는 품질의 풍요로운 시각적 체험을 제공하는 3D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스펙터클을 양손에 쥐는 이상형에 근접했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캐릭터가 원경에서 근경으로 이동할 때 3D에서 2D로의 변화는 판별 못할 정도라는 자찬은 관객의 눈으로 볼 때 조금 과장이지만 <스피릿>이 보여주는 이질적 테크닉의 통합은 CG로 그려진 무도장에 들어가는 순간 영판 다른 영화로 진입하는 느낌을 주는 <미녀와 야수>의 시대와 확실히 비할 바가 아니다. 어쨌거나 2003년 작품으로 <스피릿>의 스타일을 업그레이드한 <신바드>를 제작중인 드림웍스한테 <스피릿>은 단일 작품의 성공 규모를 떠나 중대한 바로미터임에 틀림없다.

동화의 유서 깊은 스테레오 타입을 거꾸러뜨리는 전복의 파괴력으로 아카데미 애니메이션상까지 차지한 <슈렉>의 후속작으로서 <스피릿>의 내용은 다소 미온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카첸버그가 천명한 대로, 어린이들과 성인들 내면에 존재하는 어린이를 위한 영화를 만드는 디즈니의 맞은편에서 먼저 성인이 즐길 영화를 만들고 그 다음에 아이들도 그것을 싫어하지 않도록 살피자는 사시를 가진 드림웍스 영화의 특유의 면모는 <스피릿>에서도 선명하다. 악당으로 보였던 대령은 변화하고 인디언 소년은 작은 배신을 저지른다.

그리하여 스피릿은 그의 여행을 통해 인간이라고 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단순한 사실을 터득한다. 각각의 시퀀스는 통쾌한 액션을 통해 권선징악의 쾌감을 안겨주는 데에 주저하지 않지만 그 모험의 끝에 떠오르는 메시지는 애니메이터 제임스 박스터가 말하는 대로 “변화라고 해서 다 진보는 아니고 그냥 변화일 뿐이다”라는 소박하고 신중한 것이다.<스피릿>의 빠른 액션과 하이브리드 기법을 동원한 입체적 스펙터클 뒤에는, 상업용 장편 애니메이션이라는 아동 시장에 깊이 뿌리내린 형식과 성인용 드라마를 결합하려는 모험적 노력을 경주해온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을 관통하는 절충의 정신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트래디지털, 2D 애니메이션의 숨통 틔울까?

픽사의 <토이 스토리> 시리즈에 이어 PDI의 <슈렉>, 픽사의 <몬스터 주식회사>, 블루 스카이의 <아이스 에이지> 등 컴퓨터 애니메이션들이 날린 연타석 흥행 홈런은 드림웍스의 2D 애니메이션 <이집트 왕자>와 <엘 도라도>, 그리고 디즈니의 근작 <쿠스코? 쿠스코!> <아틀란티스>의 실망스런 성적과 맞물려 전통 애니메이션의 쇠락을 성급히 예고하게 만들었다.

<타잔>이 <벅스 라이프>를 능가하고 <아틀란티스>와 <쿠스코 쿠스코>가 <파이널 환타지>의 수입을 앞질렀다는 수치적 반박도 가능하지만 260명의 2D 애니메이터를 감원하기로 한 디즈니의 구조조정이나 2D 아티스트들이 3D 애니메이션 재교육을 받고 있다는 드림웍스의 한국계 애니메이터 리처드 김의 전언은 핸드드로잉 애니메이터로 입문한 할리우드 인력들의 위기감과 업계의 트렌드를 실감하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 2D 애니메이션을 메인 기법으로 삼는 드림웍스의 <스피릿>, 디즈니의 <릴로와 스티치>와 <보물섬>(Treasure Planet), <오일드 손베리스 무비>가 연달아 시장을 노크하는 2002년은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역사에 ‘백 투 더 퓨처’의 해로 기록될 만하다.

이 작품들은 정도와 스타일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2D와 CG를 결합하고 있다. 예컨대 <릴로와 스티치>는 깊이감을 위해 사진적 리얼리즘의 CG 대신 컴퓨터로 수채화풍의 배경을 그려 넣었다. 드림웍스의 제프리 카첸버그나 디즈니의 톰 슈마허처럼 전통 애니메이션이 지닌 감정적인 파워를 높이 평가하고 2D의 ‘액팅’과 3D의 ‘액션’을 결합하려는 스튜디오 간부들은 리트머스지와 같은 올해 장편 애니메이션들에 대한 관객의 평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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