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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 '콜' 그리고 '디바' 좋은 여성 캐릭터를 향한 욕망은 장르와 어떻게 소통하는가

[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우리의 연민을 자아내던 불쌍한 캐릭터들의 자리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몇편의 스릴러영화를 복기하며 이에 관해 생각하려 했다.

한 사람의 싱크로나이즈

<콜>

최근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영화 두편이 나란히 관객을 만났다. 아니시 차간티 감독의 <>(2002)과 이충현 감독의 <>(2020)은 두 여성 캐릭터의 폐쇄적인 관계가 중심이 된다는 점, 서사적으로 관계의 전환 과정이 촘촘히 짜여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두 영화는 비교적 일찍 기억에서 희미해진 다른 영화를 상기시킨다. 조슬예 감독의 <디바>(2020)는 두드러지는 성과를 보인 영화는 아니나 적어도 비평적으로 아무런 언급도 나오지 않는 것은 가혹하다. 세 영화는 공통적으로 배우의 연기로 호평받았다. 특히 영화에서 ‘악역’을 담당한 신민아전종서, 사라 폴슨의 연기가 주목받았다. 이들이 연기한 캐릭터는 장르영화가 캐릭터를 구축하는 방식이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악 대신에 말 그대로 홀로 폭주하는 것에 가까운 캐릭터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이들의 등장이 ‘좋은’ 여성 캐릭터라는 요구에 대한 강박적 리액션은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싱크로나이즈의 조건

두 캐릭터의 관계에서 시작해보자. <디바>에서 이영(신민아)과 수진(이유영)은 라이벌 관계가 아니다. 이것은 스릴러 장르의 세팅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부분이다. 이영은 수진보다 실력이 월등히 뛰어난 선수이며 수진은 다이빙계를 은퇴해야 할 기로에 놓였다. 이영은 개인전 이외에 수진과 함께 싱크로나이즈드 다이빙 경기에 출전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수진을 어떻게든 팀에 남기려 한다. 이영이 수진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어린 시절 자신보다 뛰어났던 수진을 슬럼프에 빠지게 한 죄책감 때문이다. 처음 호흡을 맞추던 날 수진은 입수 직전 동작을 멈추고는 홀로 다이빙 동작을 마치고 수면 위로 떠오른 이영을 다이빙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이후 마음을 다잡은 수진이 다이빙에 성공하자, 이영은 오히려 불안해한다. 이영은 수진이 재기하는 것을 바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끌어줄 존재로 그 자리에 남아 있기를 바란다.

<런>

<>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진다. 다이앤(사라 폴슨)은 지체 장애를 앓는 클로이(키에라 앨런)를 위해 헌신한 어머니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는 클로이의 장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다이앤은 대학 입학을 앞둔 클로이가 자신을 떠나 생활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워한다. 클로이에게 다이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이앤에게 클로이가 필요했으며, 이를 은폐하기 위해 클로이가 자신을 필요로 하도록 그에게 장애를 부추겼음이 드러난다.

다이앤과 클로이의 싱크로나이즈는 거동이 불편한 클로이의 내부 활동과 다이앤의 외부 활동으로 분배된 더블플레이라기보다는 클로이를 집 안에 가두고자 하는 다이앤의 일방적인 통제를 통해 오직 내부에서 작동한다. 다이앤이 준 약의 정체를 의심하던 클로이가 컴퓨터에 접속하려고 애쓸 때 후경에 어둠 속에 잠긴 다이앤의 모습이 살짝 드러나는데, 이 시퀀스는 다이앤이 엄마라는 적절한 보호색으로 자신을 감추고 집 안에 언제나 잠복해 있었음을 섬뜩하게 드러낸다. 두 사람의 싱크로나이즈는 다이앤의 약병 위에 덧붙은 클로이의 이름 스티커처럼 끈덕지고 교묘한 것이다.

<>의 서연(박신혜)과 영숙(전종서) 역시 만만치 않은 불균형 상태에 놓여 있다. 둘을 가로막는 것은 시간이다. 두 사람은 20년을 사이에 두고 각각 1999년과 2019년에 존재한다. 초반 이들에게 시간의 격차는 하나의 가능성처럼 보인다. 이들을 연결한 것은 서태지의 음악이다. 서연은 서태지의 팬인 영숙에게 그의 시간에서는 발표되지 않은 서태지의 음악을 들려준다. 전화기를 사이에 두고 호흡을 맞춰 서연이 서태지의 라이브 영상을 재생하면, 영숙은 소형 카세트 플레이어에 재활용 테이프를 끼워넣고 녹음 버튼을 누른다. 아날로그의 디지털 변환 대신 디지털이 아날로그로 안전하게 이행하는 역전이 여기에서 실행된다. 서태지의 <울트라맨이야>가 흐르는 가운데 두 사람 사이에 이뤄지는 소통을 순차적으로 몽타주한 시퀀스는 두 사람이 펼치는 싱크로나이즈 연기의 절정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관계가 깨어졌다는 최초의 신호는 영숙의 웃음이다. 전화기 속 영숙의 기괴한 웃음을 마주한 서연은 그것이 자신의 동조적 웃음을 허용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의 웃음이 침묵과 중얼거림을 동반한 욕지거리로 바뀐 뒤에야 서연은 자세를 고쳐 앉는다. 배우 전종서는 전작 <버닝>(2018)에서도 기이한 웃음이 걷잡을 수 없는 눈물로 바뀌는 것으로 요약될 캐릭터를 연기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전종서는 무언가에 반응하는 사람이기보다는 누군가의 반응을 요구하는 쪽이다. <버닝>에서 리액션은 해미(전종서)를 바라보는 종수(유아인)의 멍한 표정으로 귀결되었다면, <>에서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서연의 일렁이는 얼굴로 인해 진동한다. 배우 전종서와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하나의 반응체로서의 쌍을 필요로 한다. 영숙이 서연에게 화난 이유는 자신에게 적당한 반응을 해주지 않아서였다.

몸을 뒤트는 권력 구도

선형적인 타임라인에서 두 사람은 20살의 터울이 있지만, 전화기가 매개한 다른 세상 속에서는 28살 동갑내기 친구다. 한편 두 사람은 유사 모녀 관계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서연과 엄마의 갈등은 서연이 다른 세대의 여성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극복된 측면이 있다. 영숙과 서연의 엄마 사이에 대결 구도가 펼쳐지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영숙은 서연의 엄마와 몸싸움을 벌이고, 종국에는 그의 존재를 삭제하는 것으로 응징한다.

반대로 서연을 영숙의 엄마 자리에 놓는 것도 가능하다. 서연이 정보를 제공하고 영숙이 행하는 것으로 요약되는 둘의 소통은 자연스럽게 무당의 신딸인 영숙의 위치를 상기시킨다. ‘예언’은 무당의 일이다. 다른 시간대에 존재함으로써 미래를 예측하는 서연은 영숙에게 진짜 무당이기도 하다. 앞날을 예측하거나 현 상태를 꿰뚫어보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능력이 서연에게 있다. 서연이 예측하면 이를 뒤바꾸는 것은 영숙의 몫이다. 이들은 분업화된 무당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숙이 과거를 바꾸기 위한 행위가 미래에 원치 않는 영향을 끼치면서 힘의 우열 관계는 깨진다.

과거로부터 위협당하는 것은 미래의 정보들이다. 과거가 변화함에 따라 미래 역시 이에 동조해 조정된다. 정보의 가벼움은 흩날리며 사라지는 글자 이미지로 드러난다. 영숙이 과거를 바꿈에 따라 서연이 입수한 경찰이 수기로 기록한 노트 속 정보들은 점차 희미해지더니 사라진다. 글자가 사라지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사람과 공간 역시 사라지거나 뒤바뀐다. 영숙에 의해 서연의 아빠는 서연이 보는 앞에서 잔해로 부서진 채 사라진다. SF영화에서나 제한적으로 통용되는 당황스러운 슬로 이미지는 사람의 존재마저 일종의 정보값으로 바뀌었음을 폭로한다. 서연의 엄마가 형광등이 서서히 꺼지듯 점멸하며 사라지는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서연과 영숙의 싸움은 곧 미래와 과거의 싸움이며, 미래가 가진 유일한 힘이었던 정보가 무력한 것이 되면서 둘의 대결 국면은 서연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결말로 귀결된다.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스릴러로 기대되었던 <디바>는 이상할 정도로 신민아가 연기한 이영 캐릭터에 모든 것을 집중시키는 독식의 영화다. 이영의 시선 바깥에 존재하는 수진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수진이 이영에 의해 조작되거나 만들어진 인물임을 드러낸다. 수진의 실종 이후 이영은 종종 ‘내가 수진이로 보여?’라고 따져 묻는다. 이영에게 수진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일종의 대명사다. 이영은 자신의 열등함을 모두 모아 딱딱하게 굳혀 이를 수진이라는 자신의 다른 자아 속에 몰아넣는다.

<디바>에서 이영과 수진의 대결은 서사 안과 바깥에서 동시에 이뤄진다. 두 사람은 좋은 캐릭터를 사이에 둔 싸움을 벌인다. 영화가 초반에 보여준 대로 이영이 열등한 수진을 챙기고, 수진이 이영에게 은밀한 열등감을 품고 금지 약물에 손대는 욕망을 지닌 인물이었다면 좋은 캐릭터의 자리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이영은 초반 관객과 소통하는 인물을 담당한 데 이어 수진의 실종 뒤 반전의 주인공이 되면서 극의 안과 바깥에서 동시에 수진의 자리는 옅어진다. 수진은 이영 캐릭터의 반전을 위해 소비된 인물이다. 어쩌면 영화 내부에 그려진 싸움보다 캐릭터의 반전을 위해 어느 한 캐릭터를 거의 삭제하다시피 한 양상이 더욱 잔혹하게 보이기도 한다. 이영은 마치 두 사람을 동시에 연기하는 것처럼 실종된 수진을 흡수해버린다.

두 사람의 싱크로나이즈드 다이빙은 한 사람의 몫이었던 셈이다. 두 여성의 불균형 관계는 한가람 감독의 <아워 바디>(2018)에서 문제적으로 시도된 것이기도 하다. <아워 바디>는 자영(최희서)과 현주(안지혜)의 관계를 지속하는 대신 어느 한쪽을 죽음을 통해 퇴장시킨다. 수진이 되기를 두려워하는 이영과 반대 방향에서 자영은 현주가 되려고 한다. 어느 쪽이든 누군가가 삭제된 자리를 극복하는 모습은 기이하며 두려움을 준다. 한편 이러한 양상들이 선인과 악인으로 찢긴 여성 캐릭터의 자리를 봉합하거나 혹은 거부하는 자리처럼 여겨진다.

마비에서 깨어나는 법

수진은 물속에서 나오지 못한 채 가라앉았고, 서연은 잃어버린 휴대폰을 되찾지 못한 채 전화기가 지시하는 동선 안에 갇히게 된다. 반면 <>의 클로이는 영영 존재가 삭제될 위기에 처한 인물에게 가능한 선택지를 보여준다. 클로이가 악몽이 된 자신의 집을 탈출하는 방식은 자신이 지닌 마비를 극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비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클로이는 다이앤이 보는 앞에서 독극물을 삼켜 그가 자발적으로 자신을 집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도록 만든다. 이미 다리를 움직일 수 없도록 마비된 클로이는 이제 자신의 목소리마저 마비시킨다. 다리를 잃고 목소리마저 잃은 상태에서 클로이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하고도 애절한 얼굴 근육의 액션을 보여준다. 다이앤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상황에서 지나가는 사람의 눈에 띄기 위해 크게 뜬 절박한 눈짓과 한쪽으로 기울인 고개의 각도에서 드러나는 얼굴성은 주로 표정이나 심리 상태 전달에 국한된 얼굴의 층위에서 바깥으로 밀려난 부분이다.

몸을 움직이거나 소리를 낼 수 없는 상태에서 이뤄지는 클로이의 절박한 얼굴은 그대로 지금 영화를 보는 관객의 거울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클로이의 입장에서 그와 같은 심경이 되지만,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의자에서 일어날 수도 없고, 소리를 칠 수도 없다. <>은 히치콕이 <이창>(1954)에서 다리를 다친 사진작가 제프(제임스 스튜어트)가 거동이 불편한 상태로 건너편 아파트의 상황을 관람하면서 관객을 비유했던 것과 정반대편에 관객을 집어넣는다. 보는 것은 하나의 능력이 아니다. 관객은 자발적인 마비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클로이라는 새로운 관객의 상을 통해 보여준다.

마비된 관객에게 요구되는 것은 영화가 지시하는 길을 따라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장르영화가 관객에게 내기를 거는 상황은 익숙하다. 이들 영화는 캐릭터와 그들의 관계에 대한 관객의 착각을 요구한다. <>에서 미숙아로 태어나 생명이 위험한 아기를 보여주는 인트로가 병명을 건조하게 나열하는 자막을 거쳐 휠체어에 의존한 소녀가 식사와 투약, 구토와 가래로 이어지는 아침의 통과의례를 거치는 시퀀스로 이어질 때, 첫 장면에 등장한 아기가 그러한 미래를 맞게 되었다는 점을 거의 의심하지 않는다.

선입견은 또 있다. 장애아를 둔 부모의 심경은 다 비슷할 거라고 여긴다. 다이앤은 학부모 모임에서 어울리지 않는 연민과 공감의 장에 놓인다. 사람들은 장애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인식하고 다이앤이 장애인 딸을 대학생이 되도록 키운 것에 자랑스러움과 성취감을 가질 것이라 넘겨짚지만, 다이앤은 정해진 답변을 거부한다. 그는 자신이 평생 먹이고 입히고 보살핀 딸이 자신을 떠나 세상으로 나아갈 것에 질투를 느낀다. 다이앤의 심리는 장애인의 가족에 대한 세상의 편견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장애인 돌봄은 가족들에게도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맥락에서만 이야기되어왔다. 다이앤은 평생 자신에게 의지할 누군가를 원하며, 그가 떠나는 것에 질투를 느낀다. 그가 두려운 것은 오직 아이가 성장해 자신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이앤의 시선에서 장애를 지닌 아이가 축복이자, 선물이다. 이를 통해 장애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묘하게 비튼다.

<디바>

<디바>는 이영 캐릭터에 관한 관객의 착각을 기반으로 작동한다. 이영이 표면적으로 보이는 대로 사고 후유증에 시달리는 인물이라면 그는 연민과 공감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영은 자신의 잘못을 적극적으로 은폐하는 인물이자, 다른 이에게 이를 덧씌우는 인물이 됨으로써 연민에서 벗어날 수 있다. 좋은 캐릭터를 향한 이영과 수진의 싸움, 그리고 두 캐릭터를 모두 포함한 독식자로서의 이영은 지금의 한국영화가 관객에게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안락한 자리에 앉은 관객의 연민이다.

<>에서 영숙의 변신이 겨냥하는 것도 자신에 대한 연민이다. 서연이 발견한 신문 기사에 드러난 영숙의 예정된 운명은 무당의 엽기적인 퇴마 의식으로 인해 살해된 신딸이다. 초반 영숙이 집에서 학대당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에 대한 연민을 자아낸다. 서연이 영숙이 죽지 않도록 돕기로 한 것에 의문을 부칠 수 없는 것도 영숙이 불쌍한 사람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미래를 알게 된 영숙이 복수를 시작하면서 기존의 정보는 무력해진다. 바뀐 결말을 통해 돌이켜보면 신문 보도 속 사이코로 묘사된 무당은 지극히 정상적인 인물이었고, 잔혹하게 희생된 신딸은 죽어야 마땅한 자가 된다.

<>은 연민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연약하며 편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누군가의 불행은 타인을 공격하지 않는 선에서만 연민의 대상이 된다. 영화 속 인물들은 기꺼이 타인을 공격하면서 연민을 박살낸다. 두 캐릭터의 대결에서 다른 한쪽이 희미해질 때, 남은 자리에 들어오는 것은 관객이다. ‘센’캐릭터들은 우리의 동화를 요구하지 않고, 우리도 거기에 동화되지 않는다. 캐릭터는 변화해야만 좋은 캐릭터가 될 수 있고, 그렇기에 끊임없이 다시 쓰는 방식으로 자신을 감춘다. 여기에는 단지 장르적이라고만 해석하기에는 복잡한 이유들이 숨겨져 있다. 우리는 보이는 캐릭터에 열광하는 것만큼이나 그것이 삭제해버린 캐릭터에 관해 생각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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