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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핀처가 '맹크'에서 할리우드의 비극을 재연한 이유는

게임의 규칙

‘예술적으로 완벽한 구조 아래 차가운 인물’이라는 점에서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는 오슨 웰스의 영화, 그중에서도 특히 <시민 케인>과 유사하다. 인물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시민 케인>은 완전하게 반(反)장르적인 작품이다. 케인이 여느 누아르의 인물처럼 몰락하는 부분에서 감정을 이입하기란 쉽지 않다.

<맹크>에서 MGM의 수장인 루이스 B. 메이어는 훗날 거장으로 성장할 조셉 맹키위츠에게 스튜디오의 세 가지 룰을 말하며 첫 번째로 ‘눈물을 이끄는 감정’을 꼽는다. 그는 감정이란 머리와 가슴과 성기에서 나온다고 몸짓하는데, 어떤 감정을 가져오더라도 케인을 품기란 힘들다. 차가운 이성으로 대하더라도 가능한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극중 유일하게 타인에게 애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별 장면에서도 그는 그녀가 아니라 자신을 더 보호하려고 애쓴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고 사랑받기만을 원하는 인물은 누아르 남자주인공의 성격과 정확하게 배치(背馳)된다.

그런 웰스에게 핀처가 말을 거는 장면을 보는 건 즐겁다. 문제적 유형 둘이 서로 이해한다는 양 고개를 끄덕이는 게 연상된다. 차로 이동하는 장면에서 탁 트인 하늘을 제시하는 장면은 <악의 손길>의 그것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다. 주인공 맹크(허먼 맹키위츠)가 두번에 걸쳐 돈키호테를 언급할 때, 핀처는 웰스가 끝내 <돈키호테>를 완성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한다. 맹크가 매리언 데이비스와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다 내려 인사를 건네는 장면은 아예 농담이다. 후경의 맹크를 보여줄 때 매리언을 흐릿하게 처리하다, 전경의 매리언으로 돌아올 땐 거꾸로 보여줘 그 유명한 딥포커스를 고의로 뒤집는다.

핀처는 <시민 케인>의 무게에 눌리기보다 대화하는 쪽이다. 누군가는 다른 감독들도 <시민 케인>을 좋아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천만의 말씀이다. 장르적 성격으로 인해 관객과 영화 사이에 생긴 거리는 여타 감독에게도 마찬가지다. 감독들은 <시민 케인>을 질투하지 사랑하지는 않는다. 박찬욱 감독이 과대평가된 영화로 <시민 케인>을 언급하며 “자기현시적인 테크닉 과시로 일관할 뿐 스케일에 걸맞은 감동은 없다”라고 쓴 걸 나는 진심이라고 믿는다. 완전이란 말을 다시 써본다면, <시민 케인>은 완전하게 평자들을 위한 작품이다.

이상하게 걸린 부분은 29분때에 나온다. 케인이 약을 탄 술을 마신 맹크는 의식을 잃고 술병을 떨어트린다. 손에서 떨어지는 술병을 보여주는 숏은 영락없이 <시민 케인>의 도입부를 의식한 것이다. 그게 왜 이상한가? <맹크>에선 침대에 누운 맹크의 손에서 술병이 툭 떨어지는 것으로 끝이지만, <시민 케인>에서는 케인의 손에서 떨어진 스노볼이 계단을 구르다 바닥에서 펑 터진다. 다음 숏에서 웰스는 시나리오에 없는 두개의 숏을 삽입했다. 도입부에서 시나리오의 상세한 묘사를 따르던 웰스가 왜 그랬을까, 나는 궁금했다. 앞 숏에서, 누구의 시점인지 모호한 상황 아래 왜곡된 형상으로 간호사가 들어오는 걸 보여준다. 다음 숏에서는, 깨진 스노볼의 조각에 비친 간호사의 모습을 다시 보여주면서 앞선 숏을 영화 스스로 설명한다. 웰스의 영화에서 거울 혹은 유리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화가는 세상을 더 잘 보기 위해 유리공에 비친 물체를 연구하고 묘사한다.

<맹크>에서 시나리오를 손보는 존 하우스먼은 “시점 변화가 혁명이다”라고 말하는데, 스노볼의 의미가 그러하다. 웰스는 거울의 정과 반의 기능을 넘어, 영화의 구조를 세분해 앞과 뒤가 서로 마주하도록 했다. 젊은 케인과 늙은 케인, 첫 번째 부인과 두 번째 부인, 과거와 현재가 기능상 서로를 마주하는데, 웰스는 단순히 마주하게 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것을 통해 이면을 드러낸다. 전체 구조 상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영화가 반으로 접히는 곳이다. 핀처의 술병은 웰스의 스노볼을 기억하게끔 이끄는 장치이며, 핀처는 <맹크>와 <시민 케인>의 중심부에 무엇이 놓이는지 찾아보게 한다. 거기에 무엇을 두느냐, 가 곧 두 영화의 주제이다.

<시민 케인>의 중심부에 나오는 사건은 케인의 주지사 출마다. 부패한 정치인 게티스에 맞서 승기를 잡았던 케인은 불륜 스캔들로 인해 패하고 만다. 이혼 후 스캔들 대상이었던 가수와 재혼한 케인은 전반부와 전혀 다르게 변하며 쇠락의 길을 걷는다. 맹크가 <시민 케인>의 초고를 완성하는 지점에서 반환점을 도는 <맹크>의 중심부에 나오는 사건도 주지사 선거다. 작가로 유명한 업튼 싱클레어가 캘리포니아 주지사 자리를 놓고 공화당 후보 프랭크 메리엄과 힘을 겨룬다. 선거를 빌려 케인이라는 인물의 만가(挽歌)를 준비하는 웰스와 달리, 핀처는 맹크가 싱클레어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가,에 주목한다.

싱클레어에 대한 언급이 처음 나오는 건, 케인의 모델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메이어의 생일 파티를 열어주는 장면에서다. 사회주의자인 싱클레어가 사기업을 다룬 책을 두고 파티에 모인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눈다. 공화당 의장으로 뽑힌 메이어가 그를 일컬어 “그 비열한 볼셰비키는 히틀러만큼이나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놈”이라고 말하는 건 당연하지만, 한때 싱클레어가 사회 비판 세력으로 여겼던 허스트마저 “아무도 극성 사회주의자를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바라지 않는다”라고 응한다. 싱클레어의 공개적인 비판 대상인 두 사람은 그가 낙선하도록 반대 공작에 돌입한다. 평범한 백인들이 공화당과 메리엄을 지지하고, 유색인종과 밑바닥 인간들이 혁명을 핑계로 싱클레어에게 붙는다는 식으로 가짜 영상을 만들어 공개한 게 그중 하나다. “이 나라의 수입은 법률 제정이나 폭력적인 혁명 중 하나에 의해 재분배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싱클레어를 허스트와 메이어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싱클레어는 패배하고, 선전 영상을 만든 영화인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살하기에 이른다.

맹크는 메이어가 공개적으로 모금한 싱클레어 반대 기금을 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자도 아닌 것이, 그는 동생 조(조셉)가 주도한 작가협회에 가입하는 것도 거부한다. 그가 메이어와 허스트를 보며 분노하는 이유는 예술가 혹은 창작자의 순수와 자유를 지키기 위함이다. 순수와 자유는 웰스의 영화를 관통하는 첫 번째 주제다. 케인의 동료 리랜드는 그가 순수했던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서명이 들어간 선언문을 보관했다가 나중에 타락한 케인 앞으로 보낸다. 웰스에 따르면 순수는 소중한 만큼 변질되는 게 필연이다. 거기에 저항하는 게 예술가의 역할임을 기억하도록, 일찍이 할리우드에 도착했다가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 소환됐던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예술이라는 용어를 일반적으로 인간의 삶을 개선시키는 어떤 것을 지칭할 때 쓴다면, 왜 거기에 합당한 비판적 예술이 이런 종류의 예술로부터 동떨어져 있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생산과 소비의 관계에서 예술가의 위치는 각별하다. 근대의 시간이 들어올 즈음에도 예술가는 귀족이나 후원자에 의존해야 했다. 장 르누아르는 예술가로서 자기 위치를 빗대 <게임의 규칙>을 만들었다. 직업이 없거나 모험을 즐기는 존재로 다뤄지는 그들은 극중 서민보다 귀족에 더 가까워 보이지만, 취미와 대화와 인간관계에서 냉혹하고 차가우며 추악한 귀족에게 예술가는 장난감 이상이 아니다. 결국 비행사 쥐리외는 죽임을 당하고 르누아르가 직접 연기한 옥타브는 서둘러 귀족의 터전을 떠난다. <맹크>는 핀처가 그린 <게임의 규칙>이다. 여기서 예술가, 즉 영화인들이 겪어야 하는 대상은 귀족보다 훨씬 공포스러운 부르주아다.

메이어는 영화 비즈니스에서 물건은 판매자의 손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영화를 만들기보다 판매의 가치를 따지는 그에게 영화인의 존재는 특별한 게 못 된다. 대규모 자본이 요구되는 영화산업에서 감독의 위치는 종속된다. 맹크가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지배자의 타락을 지적하고 저항하는 이유는 그래서다. 새롭게 등장한 예술가 계급인 영화인은 귀족을 대체한 부르주아를 상대해야 한다. 고상함은 버리고 오직 냉혹함을 전수받은 그들은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냈다. 가진 자들의 권력은 작가들을 억압하며 생명을 좌지우지한다.

<게임의 규칙>이 저택의 공간 사이를 자유롭고 여유롭게 움직이는 것과 비교해, <맹크>의 카메라는 규정된 공간 안에서 엄격하게 움직인다. 전자가 우스꽝스러운 무도회와 파티의 느낌이라면, <맹크>의 숨 막히는 만찬과 파티는 영화인과 지배계급 사이의 견고한 관계를 전달한다. 여기서 질문은, 여러 영화들이 비판적으로 묘사한 바 있는 할리우드의 비극을 왜 재연하는가, 다. <맹크>의 역사는 새로운 게 아니다. 핀처가 맹크를 불러들여 웰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맹크>에서 오르간 주자의 원숭이 이야기가 두번 나온다. 맹크가 하우스먼에게 원숭이 이야기를 아느냐고 묻고, 나중 플래시백에서 허스트가 맹크에게 원숭이의 본질을 알려준다. <시민 케인>의 도입부에서 인물보다 먼저 등장하는 건 원숭이고, <맹크>에서 맹크와 매리언이 스쳐 지나가는 우리 안에서도 원숭이가 뛰논다. 천재로 추앙받던 젊은 웰스는 영화사 RKO로부터 창작 과정에 어떤 간섭 없이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아 <시민 케인>을 만든다. 웰스는 의기양양했으나 어쩔 수 없이 영화계의 진실에 눈이 먼 아웃사이더였다. 그 진실을 전하는 게 맹크의 역할이다. 그가 웰스에게 전달한 시나리오는 기실 원숭이 이야기의 은유였을 터, 웰스는 늙은 케인을 연기하면서도 진실은 몰랐던 것 같다.

엔딩에서 웰스는 <그것은 모두 진실이다>(웰스의 미완 영화 중 한편이다)를 찍느라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인터뷰한다. 정부에 의해 남미 특별대사로 임명된 웰스가 타지로 떠난 사이에 RKO는 웰스가 막 끝낸 <위대한 앰버슨가>의 촬영본을 148분에서 88분으로 난도질한 데 이어 <그것은 모두 진실이다>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감독직에서 해고했다. 자기가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던 원숭이는 오르간 주자로부터 철퇴를 맞았고, 이 사건은 이후 웰스를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는 비극적 운명의 서장에 불과했다. 영화에 대한 끝없는 의지와 반대로, 할리우드는 웰스에게 어려운 영화를 만드는 고집불통이란 죄목을 내렸다. 그리고 그에겐 ‘영화를 완성하지 못하는 감독’이란 오명이 붙었다.

원숭이의 처지에 웰스를 비뚜름하게 대입하려고 핀처가 <맹크>를 만든 건 물론 아니다. 오히려 핀처는 웰스에게 접근한 RKO를 ‘악의 손길’로 파악한다. 웰스에게 <시민 케인>은 최고의 저주였다. 그는 점차 할리우드의 진실을 깨달았지만 끝내 타협하지는 않았다. 원 제목이 <They’ll Love Me When I’m Dead>인 다큐멘터리에서 한 관객이 최고의 순간이 언제였냐고 묻자 그는 “언제나 은행에 돈이 있다는 걸 알 때”라고 답했다. 이어 “여러분은 사랑할 수 없는 매체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영화를 완성할 돈을 구하기가 너무나 힘들고 배급하기도 너무나 힘듭니다. 우리는 일을 하면서 이 일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행운인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운이 너무 좋은 나머지 궁극적인 정의와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지성인이라면 이 세상에 어떤 형태의 정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테니까요”라고 말하며 기이하게 웃었다. 여기서 정의의 부재를 말한 것은, 그가 맺은 인간관계의 배신의 결과로 순수의 파괴가 필연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배신의 통증을 웰스가 꼭 나이 들면서 깨우친 건 아니다. 그 자신이 그것을 극복할 정도로 초연하다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그는 <시민 케인>에서 케인이 리랜드를 배신하도록 했고, 그 배신의 주제는 마지막 미완성 작품인 <바람의 저편>에서 웰스와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관계로 이어진다. 그걸 알았던 맹크는 오로지 사랑받기만을 원하는 케인의 얼굴에 웰스를 새겨놓았다. 그런 까닭에, 평생 힘겹게 영화 작업을 이어간 웰스에게 세 현인이 찾아오는 영화가 <맹크>다. 허먼 맹키위츠, 원작을 쓴 잭 핀처, 그리고 데이비드 핀처가 젊은 웰스를 방문한다. 젊은 웰스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이지만, 긴 시간을 돌려 그를 방문한 세 현자는 끝내 쓸쓸한 위로의 말을 전한다. 지금은, 위대한 할리우드 현역 감독인 데이비드 핀처와 스티븐 소더버그가 스튜디오 대신 넷플릭스와 HBO를 떠도는 시간이다. 데이비드 린치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스크린에서 멀어지면서 핀처와 소더버그 또한 스크린을 잃었다. 그러니까 그 위로는 핀처가 자신에게 하는 행위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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