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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길의 영화-다른 이야기] 혼자 걷는다는 것
강화길(소설가) 2021-01-04

스티븐 킹셜리 잭슨의 <힐 하우스의 유령> 첫 문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영어로 쓰인 것 중에서 이 글보다 조금이라도 더 정교한 서술문은 거의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단어의 한계를 초월한 단어들, 부분들의 총합보다 훨씬 더 거대한 전체를 이루는 단어들.”(스티븐 킹, <죽음의 무도>, 황금가지, 2010)

또한 그는 <힐 하우스의 유령>이 지난 100년간 등장한 초자연적 소설들 중 가장 훌륭한 작품 두편 중 하나라고 말한다(나머지 한편은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이다). 나는 영어 서술문의 구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첫 문단이 훌륭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무엇이든 저택 안을 걸어갈 때는 항상 혼자이다.”

이 마지막 문장에 담긴 깊은 공포는, 스티븐 킹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언어를 초월해서’ 내게 도달했고, 그 기분은 책을 읽는 내내 계속됐다.

이 서술문은 드라마 <힐 하우스의 유령>에도 등장한다. 주인공 중 한명인 스티븐 크레인의 논픽션 <힐 하우스의 유령>에 말이다. 원래 셜리 잭슨의 소설에서 서술문은 이야기의 바깥에 존재하며, 역사적 배경과 감정적 톤을 직조하는 데 쓰였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이 문단은 ‘공포’를 직접 체험한 주인공이 서술한 ‘자신의 이야기’로 등장한다. 뭐랄까, 이 각색에는 꽤 짓궂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 바로 스티븐 크레인 캐릭터인데, 그는 어린 시절의 경험, 그러니까 ‘힐 하우스’에서 보고 들은 일들이 ‘진짜’가 아니라고 믿는 인물이다. 그러면서 논픽션을 집필하는 작가로 산다. 그는 자신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에게서 그 문제를 물려받았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야기의 다른 주인공들이자 그의 형제인 셜리(!), 테오, 엘리너, 루크, 모두 다 미쳤거나,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동생들에게 진심을 다해 말한다. 정신 차려!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엘리너, 너 약은 먹었니?”

따라서 “무엇이든 저택 안을 걸어갈 때는 항상 혼자이다” 이 문장은, 자신의 경험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이 쓴, 공포에 대한 서술인 셈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장 정확한 문장이기도 하다. 스티븐은 유령을 믿지 않고, 가족들도 믿지 않는다. 아내에게도 자신의 속내를 말하지 않는다. 그는 누구의 이야기도 제대로 듣지 않는 사람이다. 때문에 그는 언제나 혼자다.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그럴듯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미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하고, 혼자 걷는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힐 하우스가 원하는 것이다.

매일 밤,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하는 생각이 있다. 오늘은 제대로 잠들 수 있으려나. 나는 잠을 잘 자지 못하는 편이다. 운이 좋은 날은 두 시간안에 잠들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새벽 네다섯시까지 계속 뒤척인다. 진짜 운이 나쁠 때는 이런 식으로 늦게 잠드는 날이 이틀 이상 지속되고, 오전에 일이 있어서 밖에 나가야 할 때이다. 사실 이번주에는 그런 날이 꽤 많았다. 자야 할 시간에 잠들지 못했다. 그 시간에 책을 읽거나 작업을 하면 좋을 텐데, 이상하게도 밤에는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그 어느 것에도 집중이 잘 안된다. 몸의 스위치가 절반만 꺼진 상태 같다고 해야 할까. 고장 난 가스보일러 같다. 그런 상태의 나를 지배하는 건 대체로 생각들이다. 걱정과 불안, 분노와 슬픔, 희미한 기쁨을 끌어내는 기억들. 그 기억들에 대한 생각들. 그 생각들이 은밀하게 불러내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 온전히 깨어 있을 때는 별 의미도 없던 일들이 밤이 되면 유별나게 다가온다. 나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 때문에 고립된다. 내 마음과 다르게 움직이는 것들에게 소외된다. 내가 책임지고, 정리해야 하는, 남에게 떠넘길 수 없는 감정들에 사로잡힌다. 이제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바로 그게 공포라는 것을.

어둠에 잠긴 힐 하우스가 무서운 건, 바로 이 때문이다. 힐 하우스는 밤에 깨어난다. 기억을 되살려내고, 생각들을 부풀린다. 혼자서, 오직 혼자서 그 모든 걸 감당하게 한다.

셜리 잭슨의 <힐 하우스의 유령>은 오직 ‘엘리너’의 이야기였다. 그렇게 보였다. 스티븐 킹은 ‘엘리너’가 이 소설을 특별하게 만든다고 언급한다. 그런 것 같다. 타인과의 거리를 가늠하지 못하고, 수시로 망상에 빠져들고, 끊임없이 관심을 원하는 엘리너는 분명 이상한 사람이다. 그녀도 자신의 성격이 어떤지 알고 있다. 때문에 그녀는 미움받는 걸 두려워한다. 힐 하우스에 아주 좋은 먹잇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소설에 등장하는 기이하고 스산한 일들이 다 진짜일까? 엘리너의 환상과 거짓말에 불과한 건 아닐까? 힐 하우스의 광기일까, 아니면 엘리너의 광기일까. 독자도 그녀를 믿을 수 없다. 셜리 잭슨은 그 무엇도 명확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엘리너를 철저히 고립시킨다. 덕분에 엘리너의 정신은 끊임없이 무너진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그녀의 공포는 실현된다. 타인에게 소외되고,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 누구도 그녀를 구해주지 않는다. “내가 왜 이러지? 내가 왜 이러는 거야? 왜 저들이 나를 막지 않지?”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가장 먼저 혼자 걷는 사람이다. 하지만 소설과 달리 드라마에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스티븐, 셜리, 테오, 루크는 엘리너의 고독을 차례차례 경험한다. 그리고 알게 된다. 다들 잠드는 순간에는 혼자라는 것을. 나만 고통 받았던 건 아니라는 것을.

따라서, 자신의 경험이 사실이었다는 걸 깨닫는 스티븐의 여정은 엘리너가 이해받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드라마의 결말은 전형적인 가족극처럼 보인다. 그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말은 너무 다정하고 진심이 가득해서, 일종의 환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대화는 진짜일까? 이들의 환상과 거짓말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소설의 테오와 루크, 작가인 셜리조차 엘리너에게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그래.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해서, 공포가 사그라드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그들은 여전히 혼자 잠들고, 혼자 걷고, 일어날 것이다. 오늘은 잠들 수 있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할 것이다. 힐 하우스는 밤마다 깨어날 것이고, 나의 약한 부분을, 가장 인간적인 부분을 호시탐탐 노릴 것이다. 그 순간을 견디고 계속 살아가는 것은 결국은 나의 몫이다. 그러니 함께 걷는다고 해서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힐 하우스의 유령>은 여전히 가장 무서운 이야기로 남을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둠을 품은 채 언덕을 등지고 서 있는 힐 하우스는 광기에 물들어 있다. 지금까지 팔십년간 그 자리를 지킨 이 건물은 앞으로도 팔십년은 우뚝 버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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