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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의 SF를 좋아해] 애정의 향연, 연대의 감각
이경희(SF 작가) 2021-01-28

1999년은 <매트릭스>의 해였다.

TV 속 연예인들은 너도나도 키아누 리브스 흉내를 내며 허리를 뒤로 꺾었고, 캐리 앤 모스처럼 학다리 자세로 허우적댔다. 광고부터 시트콤까지 빙글빙글 돌아가는 카메라 효과와 총알 따라 물결이 번지는 CG가 등장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밤거리는 검정 가죽옷과 롱코트에 점령당한 상태였고.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한데, 해킹 전문가를 뉴스 시간에 불러다놓고는 “프로그래밍 실력이 뛰어나면 가상현실 속에서 벽을 타고 달리는 게 가능한가요? 네, 가능합니다” 따위의 어처구니없는 문답을 주고받는 모습을 본 것도 같다. 영화 속 명대사처럼, 정말이지 매트릭스는 어디에나 있었다.

상영 시간 내내 폼 잡는 대사와 상징물이 가득한 탓에 아는 체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매트릭스와 성경과 데카르트와 장자를 엮어가며 썰을 풀기 바빴다. 빨간 약과 파란 약 중에 무엇을 고르겠냐는 질문도 지겹도록 들어야 했고. 믿기지 않겠지만 매트릭스로 철학을 배우는 책도 나왔다. 어휴, 한해 동안 대체 얼마나 많은 나비들이 장자의 꿈을 꿔야 했는지.

고백하자면 나 역시 그런 철없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당시 심각한 중2병을 앓고 있던 나는 <매트릭스>의 비디오테이프를 몇번이나 처음부터 돌려보며 워쇼스키 감독들에게 푹 빠져들었다. 수년이 흘러 개봉한 후속작 <매트릭스2: 리로디드>와 <매트릭스3: 레볼루션>은 물론, <브이 포 벤데타> <스피드 레이서>까지 섭렵한 나는 확신했다. 워쇼스키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자유’와 ‘전복’이라고.

워쇼스키의 영화들은 자유와 전복을 이야기한다.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는 세기말 자본주의 세계를 강요하는 컴퓨터들에 맞서 자유를 되찾고, <스피드 레이서>의 주인공 스피드 레이서는 자본가들의 탐욕으로 얼룩진 그랑프리를 실력 하나로 전복시킨다. 처음부터 끝까지 혁명 이야기인 <브이 포 벤데타>는 말할 것도 없고. 워쇼스키의 야심작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주인공들 또한 각자를 억압하는 세계에 맞서 변화를 주도한다. 각각의 사연을 품고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그들의 모습은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서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워쇼스키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나는 주저 없이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꼽는다. 워쇼스키가 창조한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거대한 야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1849년부터 2321년까지 여섯 시대를 교차하며, 여섯개의 각기 다른 장르 이야기를, 여섯명의 주연배우들이 시대마다 다른 배역을 1인다역으로 소화하는 것. 여섯 주인공이 마주하는 테마도 하나같이 묵직하다. 노예해방, 퀴어, 자본주의, 노인 소외, 휴머노이드 인권, 문명의 쇠락과 멸망까지. 물론 야심이 크다고 꼭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타깝게도 워쇼스키는 자신들의 야심을 온전히 실현하지 못했다. 일단, 이 이야기는 영화라는 포맷에 맞지 않았다. 상영시간이 제한된 극장용 영화로는 방대한 테마와 복잡한 플롯을 담는 데 한계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숙제도 열심히 하지 않았다. 다섯 번째 이야기의 주 무대인 네오 서울은 정말이지 엉망진창이었다. 한글 간판과 벚꽃과 다다미가 뒤섞인 촌스러운 오리엔탈리즘도 진부했고, 휴머노이드를 활용하는 방식도 게을렀다. 더구나 동양인으로 분장한 백인 배우들의 인종차별적 메이크업은 끔찍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실패 덕분에 워쇼스키는 일생일대의 역작을 완성할 기회를 얻는다. 바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센스8>. <센스8>은 텔레파시로 감정과 감각을 공유할 수 있는 초능력자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전세계에 흩어진 8명의 주인공. 복잡하게 교차하는 8개의 사연. 얼핏 보기에도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하는 워쇼스키의 야심이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우연한 계기로 서로의 정신과 연결되기 시작한 주인공들은 정체불명의 비밀 조직에 목숨을 위협받는 한편, 각자 해결해야 할 문제도 안고 있다. 시카고에서 경찰관으로 재직 중인 윌은 어린 시절 겪은 살인 사건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런던에서 DJ로 활동 중인 라일리는 복잡한 과거사와 마약중독에서 벗어나려 노력 중이며, 어릴 적 가정 폭력에 시달렸던 볼프강은 베를린의 폭력 조직에서 빠져나오려 한다. 나이로비의 버스 운전사인 카페우스는 극심한 빈곤 속에서 엄마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분투한다.

서울에 살고 있는 격투가 선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당하고 누명을 쓴 채 감옥에 갇힌다. 샌프란시스코의 해커 노미는 트랜스젠더임을 밝힌 후로 가족들과 연이 끊긴 상태다. 멕시코시티의 인기 영화배우 리토는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지만 상대역인 여배우가 자꾸만 그를 의심한다. 뭄바이의 칼라는 제약회사에서 일하는 능력 있는 여성으로,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들이 바라는 소망은 단순하다. 자유.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방식대로 사랑할 권리. 단지 그뿐이다.

지구의 정반대 편에 살며 얼굴 한번 본 적 없던 여덟 주인공들은 갑작스런 접촉에 당황하며 상대를 거부하지만, 텔레파시를 통해 서서히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조심스레 각자의 상처를 보듬고 위로하며, 자신이 가진 능력을 공유해 서로를 돕는다. 약자들의 연대. 자유와 전복. 워쇼스키가 평생 동안 반복해 쌓아올린 테마는 이윽고 <센스8>에 이르러 완성된다.

걱정스런 마음으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우리 또한 서서히 그들과 하나가 된다. 마치 9번째 멤버가 되기라도 한 듯 자연스레 그들 사이에 녹아든다. 시즌2 분량의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어느새 우리는 그들의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고, 이윽고 완전한 한몸이 된다. 이 경험은 정말 각별하다. 전세계를 누비는 엄청난 스케일의 로케이션만으로도 시청할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다. 특히 한국처럼 생긴 한국이 등장하는 몇 안되는 작품 중 하나이기도 하다. 네오 서울의 실패를 재현하지 않겠다는 듯, 워쇼스키는 대부분의 분량을 현지에서 촬영했다.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런던, 뭄바이, 멕시코시티, 베를린, 나이로비, 서울…. 덕분에 우리는 배두나, 윤여정, 차인표 등 반가운 배우를 만날 수 있다. 물론 가끔은 반갑지 않은 배우와 마주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이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는 한없이 폭발하는 애정의 향연 때문이리라. 젠더와 섹스에 대해 이보다 진지하게 정면 승부하는 장르 드라마는 찾아보기 어렵다. 세상이 그어놓은 편견의 선들을 모조리 뛰어넘어 보이겠다는 듯, 워쇼스키는 <센스8>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종류의 애정 행위를 묘사한다. 헤테로 섹슈얼과 호모 섹슈얼, 트랜스젠더와 폴리아모리(다자간연애), 데이팅 앱을 통한 즉석 만남, 텔레파시를 통한 초월적 접촉까지. 공들여 촬영된 아름다운 성애 장면을 통해 워쇼스키는 인간 육체의 내부에 축적된 생명의 에너지를 한껏 드러내 보인다. 거기엔 어떠한 한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맞닿은 입술과 손길과 살갗을 통해 땀에 젖은 기쁨이 폭발하는 순간, 그들은 진정한 자유를 만끽한다. 작중에서 선이 말한 대사처럼.

“우리가 존재하는 건 섹스 때문이야. 그건 겁낼 일이 아니야. 감사해야 할 일이고, 즐겨야 할 일이지.”

<센스8>은 자유와 사랑에 대한 한없는 찬미다. 우리에겐 사랑할 자유가 있다는, 그리고 사랑받을 자유가 있다는. 부디 모두가 자유로이 사랑할 수 있게 가만히 내버려두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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