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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원의 노래가 끝났지만] 행복
윤덕원(가수) 2021-02-25

일러스트레이션 EEWHA

‘아빠, 옛날 생각이 나서 자꾸 눈물이 나.’

잠들기 전에 누워서 책을 읽어주고 있는데 아이의 눈에 갑자기 눈물이 글썽하다. 어떤 옛날 생각이 나는데? 하고 물어보니 ‘젖병’이라고 한다. 젖병? 그래 젖병. 아기 때 쓰던 젖병은 나중에 분유를 떼면서 장난감이 되었다가 홍제천에서 떠내려가버렸다. 나도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다리 위에서 떠내려가는 젖병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날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던 것 같은데, 젖병아 안녕 하고. 그 뒤로 몇년이 지나서 아이가 갑자기 젖병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처럼 자기 전에 갑자기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고, 낮에 책을 보다가 눈물이 가득하길래 물어보니 젖병 생각이 난다고 한 적도 있었지. 왜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젖병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오늘도 그렇다고 했다.

괜찮아? 어떤 기분이야? 물어보면 잘 모르겠다고 한다. 슬픈 기분인지(추억이 많은 젖병을 떠나보냈으니까) 그리운 건지(어린이집만 졸업해도 동생들에게 ‘그때가 좋은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친구들이 있다) 어쩌면 그때 뭔가 힘든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억은 없어도 느낌은 남아 있어서 눈물이 날 수도 있지. 지금 생각해보면 지나간 일들은 왜 그랬는지 알 수 없기도 하니까. 소중한 젖병이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것이 충격이었을 수도 있다. 그때까지 아이의 인생에서 가장 많이 오래 사용한 물건이니까, 소중한 기억도 함께 사라진 것처럼 느낄 수도 있지. 어른의 입장에서 수년간의 사진들이 들어 있는 스마트폰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다고 생각하면 비슷한 느낌일까.

아무튼 그 젖병은 나에게도 각별한 추억을 주었던 물건이다. 어쩌다 보니 갓난아기 때 아이는 그 젖병 하나로 젖먹이 시기를 다 보냈다. 분유를 다 마시고 나면 바로 병을 씻어서 닦아둬야 했기 때문에 엄청나게 자주 많이 씻었고, 다행히도 부서지거나 깨지지 않고 마지막까지 그 역할을 잘해냈다. 마트에서 처음 젖병을 구입하던 순간도, 젖병을 뽀득하게 씻어서 올려두던 싱크대에 놓인 스테인리스 설거지 건조대도 기억에 남는다. 방금 타서 따끈하고 고소한 분유 냄새가 나던 순간도, 다 먹지 않아서 차갑게 식어버린 분유를 비울 때도. 몸과 마음이 지쳐서 들고 있던 젖병을 떨어뜨렸을 때 나던 소리나 병이 굴러가던 모습들도. 갓 만들어 따뜻한 분유가 담긴 젖병은 거꾸로 들면 압력 때문에 자동으로 쪼르르 흘러나오는데 왠지 ‘살아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었다. 세척할 때 쓰는 전용 솔도 있었는데, 병의 깊이가 깊지 않아서(용량이 적은 제품이었다) 손가락 길이와 비슷했기 때문에 깨끗한 수세미로 살살 씻어도 딱 맞아떨어지는 바람에 많이 쓰지는 않았다.

그때그때의 기분 같은 것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추억을 따라서 하나씩 써내려가자 잊고 있던 일들과 감각들이 떠오른다. 대체로 좋았던 일들에서 힘들고 잊고 싶은 일들 순서다. 왠지 조금 더 노력해서 떠올리려고 하면 더 생각이 날 것도 같지만 여기까지만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비슷한 마음인데, 어떤 순간을 떠올릴 때 일기를 쓰거나 뭔가 기록을 해두면 좀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왠지 그렇게 하지 않게 된다. 그 속에 담긴 잊고 싶은 것들을 그냥 흘러가게 두고 싶은 마음 때문인 것 같다. 돌아보면 아름답고 경이로운 순간만큼이나 피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은 일들도 많았다. 그때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선명하게 확인하는 것은 겁이 난다.

속이지는 않되 솔직하지는 않은 일종의 거짓말로 메꾸어가며 버티는 시간들이 있었다. 시시콜콜 이야기하면서 털어낼 수 없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마음에는 먼지가 쌓인다. 언젠가 마음만 먹으면 청소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냥 후 불어내면 날아가버릴 것 같은 먼지. 하지만 막상 닦으려고 해보면 쉽지 않다. 기름때 낀 가스레인지 후드를 닦는 것 같다. 쌓여 있는 기름때는 생각만큼 잘 지워지지 않고 한번 손대고 나면 그냥 내버려두기도 곤란하다. 마음먹고 정리하고 청소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서 덮어두게 된다. 그렇게 덮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통째로 버려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덮지도 못하고 정리도 못할 거라면 그냥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지난 몇년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버리고 나면 그 뒤에는 괜찮을까? 갑자기 어느 날 떠내려가버린 젖병 같은 것을 생각하면서 눈물이 나는 것은 아닐까?

젖병을 생각하고 옛날 생각을 하면 슬픈 느낌이 든다는, 아직 10년도 채 살아오지 않은 아이에게 지난 일들은 어떤 의미기에 잘 알지도 못하는 와중에 눈물이 나는지 궁금하다. 여섯살 때까지 아이는 자신이 태어난 순간부터가 다 기억난다고 말하곤 했는데, 이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시절들도 생겼을까. 그렇다면 혹시라도 아이가 지난 일들을 돌아볼 때 그곳에 행복했던 기억이 있으면 좋겠다. 모든 페이지가 행복이 아니라도 인용할 만한 문장들이 있다면 좋겠고. 나는 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꽤 긴 시간 동안을 자꾸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과연 잘하고 있는 일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과거를 돌아보면 후회만 있고 미래만 생각하면 걱정뿐이라는 말도 있지만 역시 확신은 잘 들지 않는다.

오늘은 잠들기 전에 아이에게 물어보려고 한다. ‘오늘은 어땠어? 오늘은 행복했어?’ 그러면 녀석의 평소 말투대로라면 이렇게 답하겠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

그래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행복> 브로콜리너마저

지난 일들을 기억하나요

애틋하기까지 한가요

나는 잘 잊어버리거든요

행복해지려구요

일러스트레이션 EEW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