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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길의 영화-다른 이야기] 작은 숲을 가꾼다는 것
강화길(소설가) 2021-03-01

<리틀 포레스트>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리틀 포레스트>를 좋아한다. 도시에서 시골로 내려온 주인공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거치며 성장하는 평범한 이야기였지만 이 만화책에는 아주 특별한 지점이 있었다. 이야기는 수유잼을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수유는 이치코가 어릴 때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과일이다. 그녀는 떫고 시큼한 이 작은 열매들을 주워 깨끗하게 씻고 씨를 빼낸다. 중량의 60% 정도 되는 설탕을 넣고 거품을 걷어가며 졸인다. 그 과정이 수채화 같은 그림으로 섬세하고 아름답게 표현된다.

물론 요리의 과정을 그대로 담아낸 만화는 <리틀 포레스트>가 전부는 아니다. 다만 이치코는 요리의 재료를 슈퍼나 대형 마트에서 사지 않는다. 그녀는 재료를 산과 들에서 직접 채취하고 수확한다. 거기에 특별히 다른 이유는 없다. 그게 시골 생활이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움직여서 내가 먹을 걸 만들고, 저장하고, 살고 있는 터전을 가꾸는 것. 봄을 맞이하며 겨울을 준비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것. 그리하여 내 뿌리를 어디에 내릴지 결정하는 것. 그 과정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나의 ‘지금’이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요리 만화나 드라마, 영화가 주는 ‘힐링’은 확실히 그런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어떤 시름을 잊게 해준달까. 게다가 요리는 그 자체로 어떤 서사를 품고 있다. 재료를 다듬고 그에 어울리는 양념을 선택하고, 신경을 써서 조리를 한 뒤 그릇에 아름답게 담는다. 하지만 그 결과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취향에 따라 많은 것을 생략할 수 있고, 첨가할 수 있다. 항상 이런 식으로 요리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그 과정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때문에 요리는 그 사람의 개성을 드러낸다.

그러니 요리가 이야기의 소재로 쓰이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요리하는 과정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주인공이 특별히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내면이 느껴지니까. 그 사람의 무언가를 알게 된 것 같으니까. 그리하여 나 역시 위로를 받으니까. 이 이야기가 영화로 나왔을 때 나는 무척 반가웠고, 지금도 종종 어떤 장면들을 보며 시간을 잊는다.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는 원작보다 조금 더 활동적이고, 요리의 서사가 약간 생략된 편이다. 하지만 주인공 혜원의 내면을 따라가기에는 충분하다. 즐겁다. 역시, 위안이 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에는 정말이지 내가 사무치도록 공감하는 대사가 있다.

“나 배고파서 내려왔어.”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나는 정말 황당할 정도로 배가 고팠다. 부모님 집에 있을 때는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었던 밥과 반찬에 상당한 돈을 쓴다는 게 적응이 좀 안됐고, 솔직히 맛도 별로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밥이 아닌 것들에, 그러니까 빵이나 간식 같은 것에 돈을 썼다. 그때는 건강했기 때문에, 그런 걸로만 배를 채워도 괜찮았다. 날을 새우며 과제를 하고, 다음날 수업에 가거나 아르바이트를 해도 멀쩡했다. 하지만 조금씩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

영화에서 혜원의 엄마는 아빠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계속 시골에 머무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너를 이곳에 심고 뿌리내리게 하고 싶어서였어. 혜원이가 힘들 때마다 이곳의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걸 엄마는 믿어.”

<리틀 포레스트>

우리 집은 외식을 거의 안 하는 집이었다. 나는 때때로 엄마를 따라 부엌에 들어가곤 했다. 그러다 혼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뒤져가며 이런저런 온갖 음식들을 만들었고, 언젠가부터는 빵도 만들고 쿠키도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자주 만들었던 건 고추장과 꿀을 듬뿍 넣어 만든 비빔국수였다. 노력에 비해 맛은 매우 좋았고, 식구들의 반응도 좋았으며, 무엇보다 내 입맛에 맞춘 그 음식이 너무 좋았다.

서울에 올라와서 가장 그리웠던 건 바로 그 비빔국수였다. 하지만 자취를 시작한 이후에도 나는 그 음식을 만들지 않았다. 웃기는 일이었다. 집이 없을 때는 제발 내가 밥을 좀 해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부엌이 생기자 전혀 의욕이 안 생겼다. 우선 요리를 한 지 너무 오래되어서 사먹는 게 익숙했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자 그런 생활의 여유 같은 게 사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항상 일에 쫓겼고, 마음이 급했다. 마감을 제외한 모든 것이 후순위였다. 먹는 것, 친구들을 만나는 것. 사실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리고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삶에서 우선순위가 있다는 건 중요하고, 어떻게든 그걸 사수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나는 아마 계속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나는 계속 배가 고프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다. 왜냐하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지 그 순간의 맛만 음미하는 건 아니니까. 요리는 서사이니까. 재료를 고르고, 다듬고, 취향에 맞는 양념을 만든다. 그리고 마무리를 짓는다. 하지만… 어떻게 그걸 매일 지속한단 말인가! 이미 나는 엉망진창인 나의 서사를 복구하느라 매일매일을 보내고 있는데, 그 와중에 다른 이야기를 어떻게 또 만들지? 하지만 그리웠다. 음식 이야기가 말이다.

그래서 마감이 끝나고 나면, <리틀 포레스트> 같은 요리 이야기를 자주 찾아보았다. 혜원이 배고프다고 말하는 걸 이해했다. 그건 단지 허기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내가 직접 고르고 만들고, 그래서 직접 느끼고 확신을 얻어 성취감을 느끼는 걸 말하는 거니까. 모든 이야기가 그렇다. 직접 쓰지 않으면 나의 이야기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약간 편법을 쓴 셈이다. 도저히 내가 만들 여력이 나지 않아서, 그들의 이야기를 슬쩍 들여다본 것이다. 산에서 밤을 줍고, 정성스레 껍질을 까고, 베이킹 소다에 담가 하룻밤을 재운다. 몇번이고 물을 갈아가며 삶고, 설탕을 넣어 조린다. 그 과정을 보고 있으면 착각일지는 몰라도, 어떤 허기가 가신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에서는 설거지를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정말로 깊은 착각에 빠져들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열번에 두번은 일어나는 일. 나도 나만의 작은 서사를 직접 꾸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견과류를 꿀에 절이기도 하고, 레몬청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비빔국수를 만들었다. 그날은 김치 대신 상추를 많이 넣었다. 참기름과 고추장, 그리고 꿀과 식초를 듬뿍 넣은 비빔국수. 그날을 돌이켜보니 어쩐지 오늘은 배가 고프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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