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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 <페어웰> 등 아시안 콘텐츠의 연이은 활약이 의미하는 것
김소미 2021-02-19

할리우드의 아시아 재현, 장르를 넘어 일상으로

<미나리>

아시아 문화를 다룬 콘텐츠들이 할리우드에서 또다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죽음을 앞둔 할머니와 함께하기 위해 중국으로 향하는 중국계 미국인 손녀의 여행기 <페어웰>, 미국에서 새 삶을 시작한 한국인 이민자 가족의 정착기인 <미나리>가 대표적이다. 각각 2019년, 2020년 1월에 선댄스영화제에서 차례로 초연한 두 영화 모두 한국 개봉을 앞두고 있다. <페어웰>은 지난해 제7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주연배우 아콰피나에게 아시아계 배우 최초로 뮤지컬·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을 안겼고, 룰루 왕 감독은 할리우드비평가협회상에서 최우수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시상 무대에만 33회 올랐다.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는 2021년 현재 60관왕을 달성했고, 이중에서 윤여정 배우가 수상한 여우조연상 수만 22개다. 미국 내 영화제에서 아시안 콘텐츠가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것은 국제영화제에서 뛰어난 기량의 아시아영화가 마땅한 주목을 받는 것과 그 뉘앙스가 확연히 다르다.

할리우드는 지금 아시안 콘텐츠에 시장의 지표를 동원해 ‘반응’하고 있다. 미국 박스오피스에서 약 1800만달러를 벌어들인 <페어웰>은, 선댄스에서 공개되었고 인지도가 있는 백인 배우가 주연했으며 제작 규모가 비슷한 <애프터 웨딩 인 뉴욕>(출연 미셸 윌리엄스·줄리언 무어, 158만달러), <카메론 포스트의 잘못된 교육>(출연 클로이 머레츠, 90만달러) 등에 비해 월등한 흥행 저력을 과시했다.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제니 한의 영 어덜트 소설이 원작인 넷플릭스 오리지널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역시 2018년 ‘다시 보기’ 횟수 2위에 오르며 2편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P.S. 여전히 널 사랑해>를 연달아 성공시켰다.

2월 12일 출시되는 3편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까지 순항을 예고 중이다. 디즈니도 트렌드를 놓치지 않고 올해 상반기 기대작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을 통해 다양성과 통합의 메시지를 전할 포부에 차 있다. 디즈니 최초로 동남아시아인 주인공을 내세운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에서는 <스타워즈>에서 최초의 아시아계 주인공을 연기했다가 불필요한 온라인상의 괴롭힘을 당했던 배우 켈리 마리 트랜이 왕국을 되살릴 공주를, 아콰피나가 전설 속 용을 연기한다.

2018년 8월 무렵,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과 <서치>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등이 동시에 활약하면서 미국 SNS상에서 ‘#AsianAugust’라고 이름 붙인 해시태그가 유행했다. 이어서 등장한 <페어웰>과 <미나리>는 아시안 콘텐츠가 반짝 유행으로 끝나지 않을 조류임을 방증한다. ‘아시안 아메리칸 시네마’가 꾸준히 새로운 작품을 수혈받는 동시대의 양상에는 정이삭, 룰루 왕, 제니 한처럼 미국 이민 2세대에 해당하는 70년대생 후반~80년대생 아시아계 창작자들이 전성기를 맞이한 시기라는 점이 작용하고 있다.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빈약하기 그지없는 미디어 속 아시아 재현(asian representation)을 목격하고 자란 이들은 자신의 고향과 정체성을 품은 작품들로 예술 세계의 포문을 연다.

방송 제작자이자 대중문화 비평가인 제프 양은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90년대 중후반 미국 미디어 산업내에서 벌어진 아시아 재현을 설명하면서, 애니메이션 <뮬란>과 TV시트콤 <올 아메리칸 걸>(한국계 가족이 처음으로 미국 TV시트콤에 등장한 작품으로 흥행에 참패하고 평단으로부터도 혹평에 시달렸다.-편집자)을 예로 든 바 있다. 그럴싸한 장르적 캐릭터(<뮬란>)이거나 시트콤 속에서 극도로 희화화된 동양인 가족(<올 아메리칸 걸>)이 “관객에겐 어색하고, 아시아계 미국인 당사자들에겐 더 조마조마했던” 90년대 속에서 지금의 3040 아시아계 미국인 창작자들은 10대를 보냈다.

그로부터 20년 후, 제프 양은 미국 <ABC>에서 아시아계 미국인 가정의 일상을 담은 시트콤 <프레시 오프 더 보트>(2015~20)를 시즌6까지 성황리에 마쳤고, 정이삭 감독이 자신의 부모님을 회고하는 자전적 스토리인 <미나리>를, 룰루 왕 감독이 할머니의 고향 창춘을 배경으로 삼은 <페어웰>을 만들었다. 당사자성이 뚜렷한 이야기를 대상화된 장르에서 현실로 복원하는 주체적 시도. 지금의 아시안 콘텐츠는 그 힘으로부터 일어서고 있다.

<페어웰>

미국 인구조사국 통계에 따르면 2017~20년 전체 인구 중 아시아계 비율이 약 5.9%(1800만명)으로 추산된다. 실제 인구보다 현저히 적은 통계치임을 감안하더라도 흑인, 히스패닉계에 비해 할리우드가 아시아계 관객을 극장 수입원의 마이너리티로 분석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러한 오랜 소외에도 불구하고 최근 5년 사이 아시아계 미국인 창작자들이 조금씩 두각을 드러내고 나아가 작품의 질적 향상과 다양성을 꾀할 수 있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지금의 할리우드는 OTT의 초강세 속에서 메인 타깃이 될 관객의 범주를 새롭게 정의하기 바쁘다. 팽창하는 중국 시장, 그리고 OTT의 블루 오션인 동남아 시장에 대한 관심이 넷플릭스의 초창기 관객 유입 전략이었던 하이틴 로맨스 장르물과 결합한 것이 바로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반쪽의 이야기>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도 일찍이 넷플릭스가 탐냈던 작품이다. 가족 드라마, 로맨틱 코미디 등 중소 규모의 영화 및 장르를 아시아계 주인공과 결합하는 다분히 전략적인 마케팅이 성공을 거두자 결과적으로 이들 작품이 아시안 콘텐츠의 마중물 기능을 하게 된 상황이다.

넷플릭스는 현재 샌드라 오와 아콰피나가 자매를 연기하는 코미디 영화를 준비중이며 인도네시아 작가 제시 Q. 수탄토의 로맨스 소설 <다이얼 어 포 앤티스>의 영화화를 결정해 제2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도 꿈꾸고 있다. 애플TV에서 제작되는 아시안 콘텐츠 <파친코>를 쓴 한국계 미국인 이민진 작가의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 역시 영화화가 결정됐다. 가난, 학벌과 인종주의 속에서 성공을 꿈꾸는 한국계 미국인 여성들의 이야기인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 역시 팬시한 아시안 콘텐츠 열풍의 대열에 합류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OTT 문화가 비영어권 콘텐츠에 대한 면역을 길러내고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기생충>의 연이은 극장 흥행으로 자막 영화에 대한 비선호도도 옛말이 됐다. <뉴욕타임스>는 <기생충>의 개봉과 함께 ‘<기생충> 이후, 미국 관객에게 자막은 여전히 1인치의 장벽일까?’라는 리포트를 냈는데, 이 기사에서 미국 대형 극장체인 AMC의 부사장 니콜 덴슨 랜돌프는 흥미로운 의견을 더한다. 그는 자막이 있는 비영어권 영화의 상승세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아직은 자막이 있는 해외영화라면 반드시 ‘캐릭터 중심’의 매력이 중요하며, (중략) <기생충>은 완벽한 예시”라고 분석한 것이다.

자신의 현실을 투영한 진솔하고 힘 있는 캐릭터들이 관객을 울리는 <미나리>와 <페어웰>은 그러므로 장르의 틀거리를 벗고도 아시안 콘텐츠가 북미 시장에서 관객을 사로잡게 된 새로운 케이스 스터디라 할 만하다. 아시안 콘텐츠에 기반한 중소 규모의 장르영화가 성공 사례를 쌓고, 이는 아시아 재현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 인디펜던트 영화들에 기회를 확대하는 선순환으로 연결된다. “1인치의 장벽”을 타넘고 있는 아시안 콘텐츠의 도약을 기쁘고도 불안하게 목격 중인 지금, 그 풍경의 확장과 변화는 올해도 빠르게 이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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