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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의 SF를 좋아해] 불새의 못다 한 꿈
이경희(SF 작가) 2021-03-18

국내의 SF 마니아들에게 한국 SF 역사상 가장 안타까운 순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많은 수의 사람들이 전설적인 SF 전문 출판사 ‘불새’의 폐업을 꼽으리라. 불새 출판사의 마지막 폐업(1인 출판사인 불새는 그 이름에 걸맞게 폐업하고 부활하기를 반복했다)은 특히 나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는데, 왜냐하면 당시 불새의 차기 출간 예정작이 <코드웨이너 스미스 걸작선>이었기 때문이다.

코드웨이너 스미스(Cordwainer Smith)가 누구냐고? 그는 1950년대에 활동한 미국의 SF 작가다. 코드웨이너 스미스라는 이름부터가 일단 너무 멋있다. 게다가 이 사람, 살아온 이력을 들여다보면 깊게 빠져들 수밖에 없다. 코드웨이너 스미스의 대부는 신해혁명의 주역 ‘쑨원’으로, 이는 국제 정치 활동가였던 아버지와의 친분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도 스미스는 동아시아 정치 지도자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며 지내는 유년기를 보냈으리라 추측된다. 때문에 스미스는 어릴 적부터 전세계를 누비며 테러와 납치의 위협을 피해 30번 이상 학교를 옮겨 다녀야 했고, 아시아와 유럽의 다양한 문화적 특성과 차이를 자연스레 몸에 체득했다.

독일과 프랑스 등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무려 23살에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6개 국어에 능통한 언어적 재능과 어릴 적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동아시아 외교와 군사 심리전 전문가로서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첩보원으로 중국에 파견되기도 하고,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군사 자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꾸준히 소설을 썼다. 이언 플레밍이나 존 르 카레가 그러했듯 처음에는 첩보 소설을 몇편 썼는데, 결국 SF로 전향했다고 한다. 코드웨이너 스미스라는 필명 또한 SF를 쓰기 시작하며 지은 이름이다.

외국어를 잘하지 못하는 나에게 코드웨이너 스미스는 그야말로 환상 속 유니콘 같은 존재다. 나는 그의 작품 하나하나를 너무나 간절히 사랑하지만, 40편에 달하는 그의 저작 중 내가 읽어볼 수 있었던 작품은 딱 5편뿐이다. 왜냐하면 국내에 번역 출간된 작품이 5편뿐이었으니까. 더 안타까운 사실을 알려드릴까? 아마도 여러분 중 대부분은 아무리 간절히 원한다 해도 이 중 세편밖에 읽어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다섯편의 번역작 중 <황금의 배가 오! 오! 오!>와 <수즈달 중령의 범죄와 영광>은 현재 구입해 읽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 두 작품은 2007년 창간되어 2010년까지 명맥을 이어온 장르 전문지 <판타스틱>(FANTASTIQUE)의 2008년 3월호에 수록되었다. 다섯편의 작품 중 <황금의 배가 오! 오! 오!>는 내가 독자로서 가장 사랑하는 해외 SF 단편이자, 작가로서 스타일을 형성하는 데 크게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먼 미래 우주의 인류를 보호하는 집단인 ‘인류대행기관’ 시리즈에 속하는 짧은 단편인데, 그중에서도 심리전과 첩보전의 재미가 탁월한 작품이다.

행성 라움소그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인류대행기관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한척의 배를 파견한다. 황금의 배는 놀랍도록 거대하고 놀랍도록 빠르게 움직여 그 실체를 누구도 직접 확인하지 못한 비밀스러운 배다. 사람들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실은 황금의 배가 지나간 후엔 언제나 그 적들이 초토화된다는 것뿐이다.

살짝만 내용을 스포일러하자면 황금의 배는 가짜다. 황금의 배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빛보다 빠르게 행성을 스쳐 지나가는 동안, 행성의 대기권 내부에서는 반란 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한 또 다른 비밀 작전이 벌어지고 있다. 황금의 배라는 거대하고 우스꽝스러운 상징물과, 그 과장된 화려함 뒤에 감춰진 극도로 효율적이고 차가운 ‘진짜 전쟁’의 그늘. 작품은 협소한 지역의 사소한 사건을 짧게 다루고 있을 뿐이지만, 이 간결한 묘사만으로도 미래 인류가 어떤 정치적 환경에서 살고 있는지, 인류대행기관이 어떤 사상을 지닌 조직인지 거대한 우주 세계를 효과적으로 짐작게 하며 경이감을 불러일으킨다. 냉혹한 첩보와 기만적 심리전이 진득하게 배어 있는 스페이스 오페라 본연의 재미도 탁월하다. 1950년대에 이미 이런 세련된 SF를 쓴 작가가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같은 잡지에 수록된 <수즈달 중령의 범죄와 영광> 또한 탁월한 아이디어를 지닌 시간 여행 이야기다. 이 작품은 아이디어를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스포일러여서 구체적인 내용을 소개할 수 없는 점이 아쉽다. 하지만 굉장하다. 그리고 정말 귀여운 고양이들이 나온다. 매우 독창적인 방법으로 위기에서 탈출하는 수즈달 중령의 이야기를 꼭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다.

위의 두 작품을 구해보기 힘들다면 <SF 명예의 전당>에 실린 <스캐너의 허무한 삶>이나 <방황하는 씨’멜의 연가>를 한번 찾아보시길. 이 두 작품 또한 ‘인류대행기관’ 시리즈에 속하는 작품들로, 인류에 대한 코드웨이너 스미스만의 개성적인 고찰과 투쟁을 담고 있다.

<스캐너의 허무한 삶>은 몸에 대한 짧은 단편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우주여행에서 미쳐버리지 않기 위해 신체와 정신을 분리한 존재들인 ‘스캐너’들이 등장한다. 스캐너들은 뇌와 몸을 완전히 분리해 센서와 기계장치를 통해서만 외부를 인식하며, 아무런 감각도 통증도 느끼지 못한다. 불법 시술을 통해 일시적으로 감각을 다시 일깨운 스캐너 마텔은 우연히 감각 차단 없이도 우주를 여행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고, 자신의 감각을 되찾기 위해 보수적인 스캐너 조직에 맞서 투쟁하기 시작한다.

<방황하는 씨’멜의 연가>는 동물의 유전자가 섞여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하층민(언더 피플)들에 대한 이야기다. 하층민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믿는 대행기관 의원 제스토코스트는 고양이의 유전자가 섞인 하층민 여성 씨’멜을 만나 하층민들의 권리 신장을 이루고자 한다. 백인 남성이 손녀뻘 여성과 사랑에 빠져 시혜적으로 권익 향상을 이루어주는 이야기 구성은 아쉽지만, 작품의 발표 시기를 고려하면 다인종 다문화를 존중하고자 하는 이러한 문제의식 자체는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당시 주류 백인의 장르였던 영미 SF계에서 코드웨이너 스미스는 소수자와 약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몇 안되는 작가였고, 때문에 어슐러 K. 르 귄으로부터 진심 어린 찬사를 받기도 했다.

또 스미스는 고양이를 무척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고양이를 좋아한다면 <쥐와 용의 게임>을 꼭 한번 읽어보시길. 파트너 고양이의 마성에 흠뻑 홀려버린 텔레파시 우주 비행사들의 이야기니까. 이 작품은 현재 각종 온라인 서점에서 전자책으로 판매되고 있다.

부디 뜻있는 출판 관계자께서 이 칼럼을 읽고서 분연히 일어나 불새 출판사의 못다 한 꿈을 이뤄주시기를. 오늘도 <판타스틱> 전권이 나란히 꽂힌 서고 앞에서 <코드웨이너 스미스 걸작선>의 출간을 간절히 기도해본다. 에후, 쓰고 보니 진짜 꿈같은 소리구먼. <황금의 배가 오! 오! 오!>나 다시 한번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