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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카' 보는 자의 윤리에 관하여

[안시환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영화를 보다가 너무 갑갑한 마음에 몇번이나 한숨을 쉬다가 고개를 돌려 그 상황을 외면했다. 부끄러웠다.

고통을 마주하는 고통

<아이카>에 대한 리뷰에서 오진우 평론가는 “아이카를 짓누르는 여러 가지 조건들은 관객에게 피로감을 선사한다. 이때의 피로감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이는 영화가 끝에서 던지는 질문과 결부된 감각이다”라고 썼다. 오진우의 이 문장은 과장이 아니다.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보려 발버둥치는 주인공 아이카(사말 예슬랴모바)를 짓누르는 육중한 삶의 무게 앞에서 탈진할 것만 같은 감각에 사로잡히는 것은 <아이카>에 대한 윤리적 반응이다. 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 감독은 그 감각이야말로 고통받는 한 여인의 삶을 바라보는 관객이 응당 감당해야 할 의무라고 믿는다. 바라보는 행위만으로도 우리는 그 무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니, 벗어나려 해서는 안된다.

강제된 선택을 거부하는 선택

이제 막 병원에서 아이를 출산한 여인이 화장실 창문으로 도망친다. 그것도 아이에게 젖 한번 물리지 않고 말이다. 도대체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기에 그런 선택을 한 것일까? 그 여인의 이름이 다름 아닌 아이카다. 병원에서 도망친 아이카가 향한 곳은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는 닭가공 공장이다. 성치 않은 몸으로 기계적인 동작으로 닭 털을 벗기는 아이카의 모습에 숨이 턱 하고 막혀온다. 설상가상 돈을 주기로 한 업주가 사라져 2주치 월급마저 떼인다. 그날 밤 막막한 표정으로 그녀가 향한 곳은 아기가 있는 병원이 아니라 공장형 닭장을 닮은 호스텔이다. 커튼으로 공간을 나누고 몸 하나 누우면 그만인 그곳에서 아이카는 고드름으로 아랫배의 출산열을 식힌다.

이후 우리가 마주하는 아이카의 모습은 이 처참한 광경의 반복이다. 하혈하는 몸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서고, 쫓겨나고, 다시 일자리를 찾기 위해 폭설로 뒤덮인 거리를 헤맨다. 거기에 재봉가게를 열기 위해 돈을 빌렸던 사채업자가 찾아와 이틀 안에 돈을 갚으라고, 그러지 않으면 고향에 있는 동생의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협박하는 상황이 더해진다. 폭설로 가득한 모스크바의 겨울이 그녀의 삶이다. 더 끔찍한 것은 그 어떤 몸부림에도 그녀가 이 잔혹한 현실에서 단 한발도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녀의 미래는 꽉 막혔다.

영화는 아이카가 일하게 된 동물병원을 보여주는데, 이를 통해 모스크바에서 살아가는 이주민이 애완견보다 못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아이카뿐만 아니라 호스텔에 기거하는 이주민들이나 동물병원 한구석에 아이를 숨겨 키우는 여인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이카를 둘러싼 삶의 환경이 끔찍하다 해도, 그것이 그녀의 선택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동물병원에 이제 막 새끼를 출산한 어미 개가 상처난 몸으로 찾아온다. 영화는 어미 개의 젖을 빠는 새끼들을 아이카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우리는 상처난 몸에도 불구하고 새끼에게 젖을 물리던 어미 개보다 아이카가 더 우월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가? 때문에 우리가 그녀를 애완견보다 못한 처지라고 말할 때, 이를 단지 그녀가 처해 있는 현실의 문제로만 한정해서는 안된다. 그녀가 내린 선택의 문제를 생략한 채 모든 문제를 주어진 환경 탓으로 돌리는 구조주의적 태도는 인간을 비인간으로 취급하는 태도에 불과할 뿐이다.

결국 아이카가 동물보다 못한 처지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녀를 둘러싼 환경과 그녀의 선택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아이카에게서 두 가지 선택을 본다. 자본화된 사회가 강제하거나 그에 순응한 기계적 선택과 그로부터 이탈한 자유의지의 선택. 영화의 엔딩에서 아이카는 아이에게 젖을 먹인다. 그제야 울음을 멈춘 아이를 대신해 아이카가 눈물을 흘린다. <아이카>는 지옥 같은 현실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으려는 숭고한 생존의지와 더불어 (더 중요한 것은) 그 현실로부터 ‘강제된 선택을 거부하는 선택’을 보여준다. 그 선택은 지금까지 그녀가 따라갔던 모든 것들을 거부하는 선택이다.

관객이 <아이카>를 보며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힌다면 그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아이카가 자유의지의 선택으로 자신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그녀의 삶이 지금보다 더 좋아지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없다. <아이카>가 피로감이라는 단어로 담을 수 없는 그 어떤 무게감으로 관객을 짓누른다면, 이는 그렇게 ‘엄마가 된’ 아이카에게 어떠한 삶이 기다리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감히 입을 열어 뭐라고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관객은 침묵으로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아이카의 선택에 의해 그녀를 짓누르던 절망적 현실의 무게감이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된다. <아이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희망이 아닌 절망의 표현이다.

‘머뭇거림’의 잠재력

이러한 선택과 관련하여, <아이카>의 가장 이질적인 숏 하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영화 촬영 세트장에 들른 아이카는 다른 여인에게 이미 일자리를 빼앗겼음을 알게 된다. 아이카가 그 자리를 벗어나 어딘가로 향할 때, 그 후경으로 여러 배우가 왈츠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이 슬쩍 보인다. 이때 아이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왈츠가 흐르는 곳으로 시선을 향한다. 일반적인 영화였다면 아이카의 얼굴과 춤추는 배우들을 숏/리버스숏으로 보여주었겠지만, <아이카>는 리버스숏을 생략한 채 무언가에 시선을 빼앗긴 아이카의 얼굴만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숏이 이질적으로 느껴진 까닭은, 아이카는 영화 내내 생존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바쁘고, 그런 탓에 생존 외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이 숏이 아이카가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은 여인에게 따지러 가는 길에 등장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아이카는 생존을 위해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그래서 자신의 아기까지 사채업자에게 넘기겠다고 약속하는 인물이다. 아이카는 자본화된 사회에 편입되기를 바란다. 그러니 그것이 무엇을 강제하든 그 게임의 법칙에 저항할 생각이 없다.

그런 아이카가 기계화된 반응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바라본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것은 기계화된 삶에서 이탈한 아이카의 얼굴이다. 물론 이러한 무표정의 얼굴에서 쿨레쇼프 효과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내게 이 숏은 다른 숏과의 연결을 통해 전체로서의 개념에 봉사하는 부분적 요소로서의 숏이 아니라, 그러한 연결에서 이탈한 채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듯 보인다. 그러니까 (이 숏에서 아이카의 행동이 그러하듯) 이 숏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

영화에서 아이카의 얼굴이 가장 인상적인 장면들은 아이카의 눈에 공포나 분노, 고통 등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표출될 때가 아니라, 모호하게 표현된 표정과 함께 침묵으로 머뭇거리는 순간들이다. 가령 영화 촬영 세트장에서 자신의 일자리를 뺏은 여자에게 복수를 한 뒤 건물 바깥으로 나온 아이카는 눈 내리는 거리에서 머뭇거린다. 그녀의 시선은 어딘가를 향하지만 그 대상이나 목적지는 알기 어렵다. 사채업자들이 다녀간 직후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좁디좁은 방에서 눈을 크게 뜨고 어딘가를 응시하지만 그 얼굴은 실체적인 감정보다는 텅 비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앞서 언급한 아이카의 거부하는 선택, 즉 아이카에게 열리는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은 바로 이 머뭇거림의 순간에서 비롯된다. 생존의 위기는 가혹한 현실이 강제하는 것 이외의 가능성을 사고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아이카는 또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빼앗긴 채 살아간다. 그렇기에 그녀는 주어진 조건에 무조건적으로 반응하는 기계에 가까운 삶을 산다. 닭 가공 공장에서 기계적으로 털을 뽑던 모습은 그녀의 삶 그 자체다. 그런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고 주춤거릴 때, 이는 거대한 세계 앞에서 느끼는 막막함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조건반사의 기계화된 삶의 균열(간극)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이 간극 속에 ‘강제된 선택을 거부하는 선택’의 기회가 열린다. 머뭇거림의 힘이다.

본다는 것에 대한 믿음

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는 모스크바의 산부인과 병원에 키르기스스탄 출신의 여성이 한해에 버린 아이가 무려 200명이 넘는다는 기사에서 <아이카>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는 이 사실(결과)로부터 그녀들이 이러한 선택을 한 연유에 대해 서사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결과를 먼저 제시한 후 그 원인(이유)을 보여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이카>는 원인과 결과의 순서를 뒤집어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행위(또는 결과)를 본 다음에 그 이유(또는 원인)를 알 수 있다. 아이카는 나뭇가지를 주워 고드름을 깬다. 우리가 그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은 그녀가 좁디좁은 침대에 누웠을 때다. 그녀는 고드름으로 출산열로 뜨거워진 아랫배를 식힌다. 심지어 아이카 아기의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그 아기를 어떻게 갖게 됐는지 알게 되는 것은 영화가 끝날 무렵이다.

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는 이러한 서사적 진행을 통해 ‘관객의 자리’를 마련하려 한다. 그는 자신이 보여주는 결과의 원인(이유)을 유추하는 자리가 바로 관객의 자리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핸드헬드와 롱테이크, 클로즈업을 활용해 세계의 주변부에 위치한 아이카를 영화의 중심에 세우고, ‘날것 그대로’의 삶을 보여준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날것 그대로’라는 것은 그것이 허구인가 다큐멘터리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 이전에 모호한 상태로 출현하는 미결정 상태의 현실, 뚜렷한 의미의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의 현실에 가깝다. 그러니까 관객은 해석되기 이전의 것과 마주해 그에 대해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아이카>는 심리분석이나 현실해석이 아닌 실체를 비운 채 그 주변을 그리는 윤곽선처럼 아이카의 삶을 그려나가면서도, 그녀의 일상과 행동을 무척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게 묘사된 일상의 적나라함이 우리의 시선을 난폭하게 파고든다.

그런데 이처럼 누군가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재현하는 행위에는 언제나 창작자의 윤리에 대한 요구가 동반되곤 한다. 그것이 사진이든 영화이든 간에 카메라는 사각의 프레임 속에 세계를 재단한다. 그리고 그것을 끌어모아 (그것이 타인의 고통이라 하더라도) 시각적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다. 때로 그것은 중독적이기도 하다. 때문에 카메라로 찍는다는 것에는 어느 정도의 폭력성이 내재한다. 그것이 창작자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요구하는 이유다.

하지만 창작자의 윤리가 있다면 그 이미지를 마주하는 관객의 윤리도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이카가 고드름으로 출산열을 식히며 잠이 들던 그날 새벽에 휴대폰 소리가 울려 모두의 잠을 깨운다. 출산열로 온몸을 땀으로 적신 아이카의 모습을, 힘없는 얼굴로 일어나 물을 벌컥 삼키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하니 막히는데, 그런 그녀를 재촉하는 휴대폰 소리를 듣는 일은 너무나 힘겨웠다. 나는 그 이미지에서 시선을 돌려 그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다. 이 치졸한 이기심과 비겁함은 얼마나 비윤리적인가? 수지 린필드의 지적처럼(<무정한 빛>), 고통의 이미지가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라고 말할 때, 그 속에는 동시에 ‘이것은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상황에서 고개를 돌려 회피한다면, 그것은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비정상의 상황을 그저 묵인하는 행위가 아닐까?

그렇다면 영화는 고통받는 삶 앞에서 고개를 돌려 외면하려는 이 비윤리적인 욕망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물론 <아이카>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온전한 해답을 가진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아이카>에서 집요할 정도로 아이카를 따라다니는 카메라의 시선에 ‘보여준다는 것’뿐만 아니라 ‘본다는 것’의 윤리가 담긴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 보면 카메라는 보는 자의 기록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창작자의 윤리는 보는 자의 윤리와 본질적으로 구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결국 창작자의 윤리에서 보는 자의 윤리를 배워야 한다(또는 그 반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카>의 카메라는 그녀가 사각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녀를 끝까지 프레임 속에 ‘붙들어 맨다’. 살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아이카만큼이나 폭설로 가득한 거리의 카메라 역시 위험을 각오하고 이리저리 움직인다. 한순간도 그녀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카메라는 그녀를 바라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아이카>의 카메라는 그녀의 고통 앞에서 결코 회피하지 않는다.

<아이카>의 카메라가 그녀의 ‘고통을 마주하는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를 깨달은 것은 영화의 엔딩에서였다. 6일간의 여정 끝에 아이카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아간다. 어쩌면 그 카메라의 시선은 그녀의 또 다른 자아,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것을 자본에 종속시키는 기계적 선택 속에 버려졌던 그녀의 또 다른 자아의 시선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본다는 것’이 어떠한 행위로 이어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상처난 몸으로 새끼에게 젖을 먹이던 어미 개를 ‘바라보는’ 아이카의 시선과 울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아이카의 ‘행위’가 과연 무관한 것일까? 비록 보는 행위와 실천적 행위간에 필연적 관계를 상정하는 일만큼 미련한 일이 없다 해도, <아이카>는 본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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