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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첫 번째 시대극이자 밀도 높은 실내극 '스파이의 아내'
송경원 2021-04-07

비밀과 거짓말, 그리고 틈새의 진실

“전통을 따르면서 동시에 매우 현대적인, 보기 드문 영화.” 2020년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을 맡았던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그해 베니스국제영화제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상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스파이의 아내>를 두고 이런 평가를 남겼다. “히치콕 분위기가 뚜렷한 시대물”(<스크린 데일리>), “2차 세계대전을 다룬 특이하고 흡인력 있는 웰메이드 스릴러”(<할리우드 리포터>) 등 <스파이의 아내>에 대한 상찬은 일관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이 매우 잘 만들어진 장르영화라는 점이다.

하지만 구로사와 기요시는 장르를 자신의 중력 안으로 끌어들여 탈바꿈시키는 종류의 창작자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첫 번째 시대극인 <스파이의 아내>도 마찬가지다. <아사코>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각본에 참여하는 등(구로사와 기요시, 하마구치 류스케, 노하라 다다시 공동각본) 전작들과 달라진 면모가 눈에 띄지만 결국 이것은 구로사와라는 행성에 안착하고야 마는, 실로 기요시적인 영화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내 마음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데 상대방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구로사와 기요시가 일본의 아픈 역사 속에서 발굴한 비밀과 거짓말의 세계에 당신을 초대한다.

“아이는 작고, 문은 크다. 그리고 문밖에는 약속과 위험이 동시에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신의 영화에서 단 하나의 이미지를 골라달라는 질문에 <미지와의 조우>의 한 장면을 꼽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 한 문장에 20세기 스필버그 영화, 아니 내러티브 영화의 본질이 농축되어 있다. 같은 질문을 구로사와 기요시에게 한다면 무엇이라 답할까. 신작 <스파이의 아내>의 한 장면을 꼽는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자는 영사기 앞에 있고, 남편은 자리에 없다. 이윽고 화면에는 비밀과 진실이 동시에 떠오른다.”

본인에게 직접 답을 들을 순 없겠지만 구로사와 기요시라는 성으로 가는 길에 주변에 흩뿌려진 과자 부스러기는 많다. 2017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보스턴 교살자>(1968)의 시네마토크에서 힌트 한 자락을 발견한다. 봉준호와 구로사와 기요시, 두 감독이 창작의 비밀을 슬며시 드러냈던 이날의 대담에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보스턴 교살자>가 걸작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연쇄살인범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있는 장면. 다른 한편에서는 형사가 전혀 수사를 하지 않는 장면. 이렇게 다른 두 종류의 일상적인 장면이 포함되어 있는데 풍요롭고도 황홀한 균형감각을 느낄 수 있다.” 약속과 위험. 일이 터지기 직전의 긴장과 흥분. 여기서 중요한 건 저 문밖에 무엇이 있느냐가 아니다. 대상이 지금 현재, 부재한다는 감각이다. 감히 단언컨대 가슴 두근거리는 순간은 보여주지 않는, 기다리는, 설명되지 않는 곳에서부터 불꽃이 튄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첫 번째 시대극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의 심장에는 서스펜스가 자리한다. 정확히 그는 서스펜스, 스릴러, 공포의 장르적 관습을 비틀어 재창조를 하며 자신의 세계를 넓혀왔다. 그런 구로사와가 자신의 저서에서 21세기에 주목할 영화로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전쟁>과 봉준호의 <괴물>을 꼽은 건 어쩌면 당연한 선택인지도 모르겠다. SF와 호러의 경계에서 기묘한 결합을 선보이는 이 영화들은 장르에 익숙할수록 파괴적인 에너지를 뿜어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장르는 단지 이 영화들의 결과에 불과할지 모른다. 핵심은 서스펜스를 중심으로 한 마음의 형태를 그리는 과정에 있고, 영화의 영혼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막간에 깃드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로사와 기요시의 신작 <스파이의 아내>의 그림자 뒤로 문득 스티븐 스필버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잔상처럼 겹친다. 시대, 소재, 장르로만 보면 뜬금없는 소환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들의 유일한 공통점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우아함과 정확함이다. 두루뭉술한 단어를 쓸 수밖에 없음을 용서해주시라. 장면마다 정확한 자리에서 관객을 기다리며 인식의 줄을 풀고 조이는 솜씨를 묘사하기엔 그야말로 대가의 솜씨라는 표현 이외엔 다른 방도가 없다. 주제의식, 사회를 포착하는 시선, 흥미를 느끼는 대상은 각각 다를 수 있지만 이들의 연출은 길의 끝자락에서 결국 만난다. 고전적이라고 해도 좋을 차분한 속도와 정확한 화면들로 꽉 찬 기본의 기본.

<스파이의 아내>는 태평양전쟁 직전인 1940년 고베를 배경으로 스파이로 의심받는 남자와 그의 아내에 얽힌 사연을 그린다. 2020년 6월 <NHK>에서 방영된 스페셜 드라마로 제작된 이 작품은 일본 드라마 중엔 드물게 8K 카메라로 촬영되었는데, 이후 영화 포맷에 맞게 조정되어 극장에 어울리는 형태로 다시 태어났다. 이야기는 비교적 단순하다. 고베에서 무역회사를 운영 중인 유사쿠(다카하시 잇세이)는 국가를 신봉하는 대신 세계시민을 자처하는 남자다. 전쟁 중인 일본의 분위기는 날로 험악해져 가지만 유사쿠의 아내 사토코(아오이 우유)는 오직 남편과의 행복한 생활에 집중한다.

어느 날 유사쿠가 사업차 만주를 다녀온 뒤 미묘한 변화가 일어난다. 유사쿠는 만주에서 일본군 부대가 저지른 끔찍한 만행을 목격하고 이를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 사토코는 남편의 비밀이 행복한 가정을 파탄내고 말 것이라 여기고 결사적으로 그를 말려보지만 소용이 없다. 하지만 사토코 역시 어떤 계기로 결국 남편의 뜻을 따라 ‘스파이의 아내’로 살 것을 결심한다. 한편 사토코의 어릴 적 지인이자 헌병대 대장 야스하루(히가시데 마사히로)는 유사쿠를 의심하고 주변을 감시한다.

우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이고 이해한 듯 안심한다. 이름은 대상의 본질이 아니라 불안을 가리는 가면에 불과하다. <스파이의 아내>에는 어떤 이름표를 붙일 수 있을까. 시대를 경유하는 멜로드라마이고, 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도 읽힌다. 의심과 집착, 불안과 갈망으로 얽힌 캐릭터의 관계도는 서스펜스 멜로의 정석이라고 할 수도 있다.

1950년대 일본 고전영화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정제된 화면들은 한폭의 유려한 그림처럼 만족감을 안긴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가장 대중적인 영화”(<버라이어티>)라는 설명도 일정 부분 납득이 간다. 그럼에도 이 모든 수식어의 총합이 <스파이의 아내>라고 말하진 못하겠다. 이런 부스러기 같은 단어들을 모아봤자 껍데기만 훑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스파이의 아내>의 신비한 옷자락을 붙잡으려면 차라리 이렇게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목격자와 목격되는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우아한 동선에 대한 기록이라고.

목격자들의 드라마, 밀도 높은 실내극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자신의 첫 번째 시대극으로 1940년을 선택했다. 그는 “예전부터 시대극을 해보곤 싶었지만 너무 오랜 과거로 가진 않길 바랐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1940년은 절묘하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감은 비밀과 거짓말을 탐색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는 셈이다. 당시 제국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한반도와 만주를 침공해 들어간 일본은 한창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 내부는 전쟁과는 상관없는 자유로운 분위기였지만 2차대전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국내에도 전쟁의 기운이 밀어닥치기 시작한다. <스파이의 아내>는 안개처럼 옅게 깔리기 시작하는 그 불안의 전조를 먹고 자란다. 자신의 손이 닿는 시대, 허구의 상상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실감을 구축하고 싶었던 구로사와의 선택은 예상 밖의 성취를 거둔다. 다름 아닌 시대와의 간격, 인물과의 간격, 영화와의 간격, 진실과의 간격에 대한 절묘한 거리감의 확보다.

영화의 시작, 1940년 고베 명주실 검사소라는 자막과 함께 마치 일본식 정원처럼 안정감 넘치는 구도의 화면이 등장한다. 한 그루 소나무가 화면 왼쪽을 가리고 있고, 나무 너머에는 흰 벽의 공장 건물이 보인다. 초록색 문을 가운데 두고 흰색과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권총을 손에 든 채 문 양옆에 서 있다. 이윽고 화면 바깥, 소나무 안쪽에서부터 한 무리의 군인들이 초록문을 향해 행진하듯 걸어온다. 군인들이 문을 열고 차례로 들어가면 카메라는 천천히 줌인하여 문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화면 오른쪽 하단에 뜨는 작은 자막. ‘스파이의 아내.’ 까마귀 소리와 바람 소리가 스산하게 들리는 가운데 영국인 한명이 스파이 혐의로 끌려나오고 검은 차에 태워져 끌려간다. 이것은 야외에서 일어나는 일임에도 마치 정교한 실내극처럼 보인다.

<스파이의 아내>는 시대극을 구현하기 위해 밀도 높은 실내극이란 형식을 취했다. 세트에서 찍지 않아도, 건물 바깥에서 찍을 때조차 영화는 연극 세트를 보는 것 같은 인위적인 거리감으로 프레임 내부를 구성하는 것이다. 바로 이 간격, 구체적으로 인물의 동선과 장면 안에서 누가 누구를 어떻게 가리는가의 문제가 <스파이의 아내> 전반을 장악하는 긴장의 미학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건 대단한 발명이나 연출적인 모험이 아니다. 기본 중의 기본에 충실한 프레임 배치를 통해 진실과 재현, 비밀과 거짓말의 관계를 쌓아올리는 절정의 드라마다. 이 지점에서 구로사와는 스필버그나 이스트우드와 같은 길을 걷는다. 주제와 형식이 맞닿아 있는 영화라고 해도 좋겠다. 전쟁에 대한 고찰, 인간에 대한 믿음, 신념에 대한 불안, 그리고 사실과 재현 사이 영화에 대한 흔들림. 그리하여 <스파이의 아내>는 외부와 내부를 가리지 않고 켜켜이 쌓아올린 우아한 서스펜스의 결정체로 거듭난다.

왜 스파이가 아니라 그의 아내인가

<스파이의 아내>에는 정작 스파이 활동이 거의 없다. 유사쿠의 스파이 활동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직접 화면에 등장하진 않는다. 일본의 비윤리적인 전쟁 행위를 고발하는 유사쿠가 아니라 그의 아내의 시점에서 상황들을 관조한다. 사토코에게 세상의 중심은 남편 유사쿠인 까닭에 그는 남편이 현재의 행복을 버리고 위험 속에 뛰어들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적어도 사토코에게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구로사와는 스파이가 아니라 스파이의 아내의 시점을 택한 이유에 대해 그것이 전쟁이란 거대한 사건의 수행자들이 아닌 은밀한 내부자의 시선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유사쿠가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이라면 사토코는 애정, 즐거움, 행복 등 좀더 복잡한 면모로 움직이는 인물이다. 그녀는 단순히 특정 신념에 몸을 맡기는 대신 스스로의 색을 훼손하지 않는 가운데 다른 길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사토코는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남편을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믿고, 믿는 가운데에서도 불안에 떨며 마음의 형태를 그려나간다. 이 영화의 진정 매혹적인 부분은 일련의 불안이 어떤 형태로도 쉽사리 표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요시는 인물이 감정을 토해내거나 어떤 이미지로든 요동치게 하는 대신 화면 안쪽에 단단히 가둔 채 기다린다. 이윽고 얇은 살얼음 아래 흐르는 불안과 의심의 격류는 서서히 진동수를 올리며 표면 위로 스며나오기 시작한다.

<스파이의 아내>가 가장 많이 보여주는 이미지를 딱 하나만 꼽는다면 상대를 등진 인물의 뒷모습들이다. 내부자로서 사토코의 시점은 역사와 진실, 재현과 현실의 간격을 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보았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목격자와 목격되는 것들 사이의 간격을 ‘보고’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간격은 물리적인 거리와 피사체의 위치와 동선은 물론 사건이 인물에게 도달하기까지의 시간 차까지 포함한다. 예컨대 만주에서 일본군이 자행한 끔찍한 실험이 유사쿠를 거쳐 필름의 형태로 사토코에게로 당도하기까지의 과정을 관객이 ‘목격한다’는 행위가 중요하다.

때문에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스파이 활동이라는 사건의 실체를 재현하는 대신에 주변을 둘러싼 인물들의 리액션을 화면에 담는다. 관객이 목격하는 것은 정확한 감정이나 인물의 심리, 상태가 아니다. 그저 겉모습, 달리 말하면 역사의 가죽이다. 영화는 이것이 진실인 양 설명하거나 재현하는 대신에 특정 상황에 던져진 인물들, 가령 남편의 스파이 활동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 한 여성의 불안하고 흔들리는 상태를 가만히, 그리고 집요하게 보여준다. 누구도 이들의, 혹은 그녀의 진심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의 말, 말투, 꾸며진 표정 등을 통해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파이의 아내>에 또 다른 이름을 붙인다면 ‘뒷모습의 얼굴, 등의 표정’에 대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발생하는 비밀과 모호함. 구로사와 기요시가 멜로드라마의 틀을 빌려 전쟁 한가운데에서 서스펜스라는 보석을 발굴하는 방식이 이와 같다. 여기 당신의 목격으로만 성립하는 순간들이 있다. 유사쿠의 필름을 목격했던 사토코가 변화했던 것처럼, 스크린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종의 음모들이 끝내 당신의 심경을 변화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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