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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로덕션'에서 잘린 팔이 불쑥 내밀어질 때

[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어딘가에 옮겨둔 <옥희의 영화>(2010)의 대사를 우연히 발견했다. 나는 그 대사는 물론, 저장해둔 사실조차 망각했다. 왜 옮겨 적었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짧은 글귀를 읽은 뒤 <인트로덕션>에 관해 무엇이라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옮겨둔 대사는 이것이다. ‘이 우유팩이 여기에 놓여진 이유를 알면 온 세상을 알 수 있다.’

프레임 사이 깊은 바다

잘린 팔이 내밀어진다. 화면 바깥에서 안으로. <인트로덕션>의 세 번째 장에서 해변에 앉아 있던 주원(박미소)의 머리 위로 팔이 하나 내려온다. 분명 화면 밖에서 주원을 부르는 사람이 영호(신석호)이므로 그 손은 영호의 것이 분명한데, 그 형상이 기이하기도 하고 이상하게 감동적이어서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거나 마치 카메라가 내민 손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프레임 속으로 불쑥 침투한 신체의 형상은 왜 그토록 기이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1.

프레임에 의해 신체가 잘리는 형상 자체는 새롭지 않다. 신체의 한부분을 확대하는 클로즈업은 고전적으로 신체를 자르는 작업이라 인식되었다. 그때도 지금도 프레임에 의한 신체의 잘림을 실제의 잘림으로 인식하는 이는 없다. 스크린 바깥에 신체의 다른 부분들이 익숙하게 구성되어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루이스 부뉴엘이 <안달루시아의 개>(1929)에서 안구를 칼로 가로지르는 형상을 통해 보여준 것은 진짜 신체를 자르는 것의 의미다. 그 이미지는 잘린 신체가 실은 시선의 한계일 뿐임을 날카롭게 절단되는 안구 이미지 속에 각인시켰다.

이와 함께 프레임에 의해 잘린 신체가 시선의 한계가 아닐 수 있다고 믿는(혹은 믿게 하는) 영화가 있다. 로베르 브레송의 <소매치기>(1959)는 팔의 전능함을 믿게 한다. <소매치기>에서 드러나는 엄격하고 정확한 손과 팔의 움직임은 예술의 경지를 보여주는 데서 나아가 신의 손을 상상케 한다. 손의 매혹으로 인해 남자의 행위는 윤리적 판단의 맥락에서 떨어져나와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온전한 세계를 창조했다.

박찬욱의 <올드보이>(2003)의 팔은 누군가를 조종하는 명령자처럼 보인다. 우진(유지태)이 죽은 누나의 복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순간, 엘리베이터의 닫힌 문 안으로 잘린 팔이 불쑥 들어온다. 잘린 팔의 형상은 다리 위에서 몸을 뒤로 기댄 누나 수아(윤진서)와 그의 손을 가까스로 붙들고 있는 소년 우진(유연석)의 팔에 의한 기억으로 회귀한다.

그 팔은 누군가를 구하는 대신 그와 관련된 모든 이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수아를 붙잡던 우진의 팔은 총을 쏘는 제스처로 바뀌고, 그 제스처는 다시 실제 총을 든 손으로 변한 뒤 우진 자신에게로 쏘아진다. 잘린 신체 부위에서 통각을 느끼는 것과 유사한 차원에서 <올드보이>가 보여준 리얼리티는 환상 속에서 작동하는 리얼리티다.

<인트로덕션>에서 영호의 팔은 카메라에 의해 포착된 클로즈업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이미 고정된 프레임을 흐트러뜨리며 침투한다. 그것은 온 힘을 다해 무언가를 꽉 쥔 손이 아니라 순간을 정지시킬 의지도 힘도 소거된 근육 없는 팔이다. 팔은 그저 그곳에 존재한다. 신체의 일부가 프레임 내부로 침입하는 현상은 홍상수 감독 영화에서 예외라 할 수는 없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에서 영희(김민희)와 승희(안재홍)의 발이 고정된 카메라 안으로 들어오는 숏이라든지, <풀잎들>(2017)에서 줌아웃 이전에 화분 속 풀을 어루만지는 손을 보여주는 숏도 있다.

<인트로덕션>에서도 물웅덩이에 비친 주원의 형체와 그의 발을 포착한 숏이 있다. 반면 앞서 언급한 팔의 틈입은 예정된 프레임 안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예정된 것을 뒤흔드는 것에 가깝다. 흔들리는 팔은 규정된 화면 속에서 일종의 잉여로서 잠시 펄럭이며 프레임을 깨운다.

2.

홍상수의 영화에서 프레임 내부에 침투하는 것은 신체 일부이기보다는 신체에서 나오는 목소리일 때가 많다. 화면 밖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면 카메라는 패닝하면서 그 소리가 어디에서 들려오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런 맥락에서 커튼 뒤에서 들려오던 대화는 이상하다. 배우(기주봉)가 영호의 아버지(김영호)를 찾는 숏 내부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은 채 그 뒤에 누군가의 몸을 감추었을 커튼만을 보여준다. 이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침을 맞던 장면에서 잠시 등장했던 여자는 오랜 부재 뒤에 배우에게 응답하면서 그가 쭉 그곳에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는 무언가가 부재하는 것보다 무언가가 그곳에 있으며 그것이 의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이 오히려 영화의 미스터리를 구축함을 보여준다.

3부의 주원과 영호의 모습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해변에 모로 누운 여자 영희와 그를 깨우는 남자의 목소리를 연상시킨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카메라는 옆으로 누운 영희의 뒷모습으로 줌인한다. 카메라가 영희의 앞모습을 비추면 그는 마치 잠을 자는 듯 눈을 감고 있다. 이때 화면 밖에서 “일어나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의 주인은 프레임 속으로 들어오지 않은 채다. 카메라가 줌아웃한 뒤에야 비로소 누운 영희 가까이에 선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영희는 혼자의 힘으로 일어나 막대기 하나를 들고는 남자와 함께 나란히 걸어간다. 이와 비슷한 장면은 반복된다. 영희의 누운 뒷모습으로 목소리가 침투하면 카메라는 우측으로 이동해 두 사람을 함께 잡는다. 영희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는 줄곧 남자를 배제한 채 영희만을 프레임에 잡는다. 영희는 화면 밖의 남자와 인사한 뒤 혼자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영희를 깨우는 남자의 목소리는 프레임 속으로 자유롭게 침투하는 반면 남자의 몸은 카메라가 이동해야만 프레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두 사람은 함께 이동하던 앞선 장면을 부정하며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갈라진다.

<인트로덕션>에서 화면에 침투하며 프레임 밖으로 향해가는 두 사람의 걸음은 다른 시퀀스에 의해 부정되지 않는다. 물론 둘의 만남 그 자체를 꿈으로 볼 여지는 있다. 이 숏 전후로 영호와 정수(하성국)가 탄 차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숏이 등장하면서 시간의 경과를 표현하고 있다. 그사이 영호는 술을 많이 마신 상태로 차 안에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프레임에 침투한 영호의 팔은 마치 그것은 꿈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더 정확히는 그것이 꿈이든 아니든 상관없는 상태가 된다. 이 장면 이전에 등장한 나이든 남자배우의 호통이 마치 사자의 전언처럼 이후의 장면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영호의 어머니와 배우가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자리에 영호와 그의 친구가 함께 나타난다. 영호가 어머니 옆에 자리 잡고, 잠시 뒤 그의 친구가 뒤따라 영호 옆에 자리 잡으면서 술자리의 구도는 1:3으로 기울어진다. 이러한 자리 구도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영희는 영화 촬영팀의 술자리에 끼어든다. 영희의 양옆에 있던 인물들이 자리를 비우면서 영희는 나란히 앉은 사람들을 홀로 마주하는 모양새가 된다. 이때의 영희의 외침은 꿈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되는 것이기도 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이 서로 다른 자리에 있음을 확인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술자리의 불균형한 구도는 제사상을 연상시킨다. 제사는 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진으로 대표되는 죽음과 산 사람들의 경계가 지어지는 의식이다. 이 구도가 배우의 자리를 죽음과 가까운 것으로 밀쳐놓는다.

그 배우를 연기한 이가 기주봉이라는 사실도 여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 그는 <풀잎들>에서 ‘자살했던’ 배우였고, <강변호텔>(2018)에서는 이례적인 죽음을 맞았다. 홍상수 영화 속 자신을 연기하는 것 같은 배우 기주봉의 외침은 술 취한 사람의 넋두리의 진부한 재현으로 떨어지지 않은 채 마치 저 너머의 세계에서 이쪽으로 건너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소리치는 것 같다.

3.

배우였던 영호는 여자 친구가 있는 상태에서 다른 이와 가짜로 포옹하는 것이 죄스럽다는 이유로 연기를 거의 포기한 상태다. 기주봉이 연기한 배우는 그에게 연기든 장난이든 포옹은 포옹이고, 포옹은 진짜이고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호통친다. 배우의 외침은 주원과 영호의 반가운 재회가 꿈이든 연기이든 그것은 진짜라고 믿어야 한다고 관객에게 외친다. 해변에 홀로 앉은 주원은 왜 위험한 곳에 앉아 있느냐는 물음에 “죽으려나 보지”라고 자조적으로 답했다.

영호의 손짓에 주원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의 손을 잡는다. 주원을 구원한 것은 죽을힘을 다해 꽉 쥔 손이 아니라 그저 가볍게 펄럭이는 손짓 하나였다. 그 팔은 힘들이지 않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프레임 여기에서 저기로 잡아끈다. 그와 같은 단순한 손짓에 의해 주원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죽음의 프레임으로부터 살아나온다.

<인트로덕션>에서 반복은 더는 ‘미로’이기를 그친다. 어머니가 호텔에 묵고 있다는 이야기는 두번 등장한다. 첫 번째는 영호와 주원의 대화에서, 다음은 영호와 친구의 대화에서. 이들의 대화는 의심을 불러온다. 정말 어머니가 저 호텔에 묵는 것일까. 혹은 묵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기억일까. 이런 의심이 피어오르던 찰나 하나의 얼굴이 솟아오른다. 멀리서 잡아 뭉개졌지만, 영호의 엄마임이 분명한 그 형상은 이상하게 섬뜩한 감정을 불러온다. 섬뜩한 것은 부재가 아니라 존재하는 것임을 얼굴의 형상은 보여준다. 반복된 시간이 뒤섞이며 관객을 혼란에 빠뜨리곤 했던 홍상수 영화의 시간은 이제 뒤섞이지 않아 혼란하다.

그리고 마침내 파도가 당도한다. 감독의 영화에서 파도는 인물들이 머무는 공간 곁에 존재했지만, 결코 인물을 덮치지 못하는 것이거나 인물들이 바라보는 스크린 내부에 존재했다. 그런데 <인트로덕션>에서 파도가 인물과 뒤섞일 때 그것은 스크린 너머의 것의 초월적인 도래를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정말로 초월적인 것은 초월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다. 영호가 바다에 뛰어드는 장면이 주는 감동은 그것이 부인할 수 없는 어떤 사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호의 행위는 연기이든 아니든 정말로 바다에 뛰어든 것이며 그것은 부인할 수 없다. 파도치는 바다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할 수 없으며, 연출하거나 통제되는 것이 아니다. 바다는 그곳에 그저 존재한다. 들뢰즈는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이 모두 파괴된 뒤에도 파괴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파괴를 믿어야 한다는 전언조차 파괴되었음을 씁쓸하게 인정하게 된다.

그 자리에서 <인트로덕션>의 카메라는 기다린다. 카메라는 그저 파도를 맞으며 앞으로 나아가던 배우가 다시 되돌아 나올 것을 기다린다. 관객 역시 배우를 기다린다. 관객은 배우가 실제로 바다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음을 인식한 뒤 그가 그곳으로부터 돌아 나올 것을 믿는다. 한 철학 수업에서 부정할 수 없는 진리 하나를 찾으라는 과제를 받아든 적이 있다. <인트로덕션>의 마지막 장면은 이에 관해 대답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을 보여준다. 배우를 바다에 들어가게 할 것. 그리고 그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것. 그사이에 믿음이 존재함을 믿을 것. 그것이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가 경험하게 될 가장 무력하고도 충만한 믿음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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