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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제한' 김창주 감독, 액셀러레이터를 전속력으로 밟는 느낌으로
김성훈 사진 오계옥 2021-07-01

극장 개봉(6월 23일)을 하루 앞두고 긴장감이 덩달아 커져서일까. 김창주 감독의 편집실에 들어서자 맹수처럼 강한 인상인 그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사진 촬영 준비하랴 기자 맞으랴 편집실 이쪽저쪽을 바쁘게 오가는 모습이 영락없는 신인감독이다.

<더 테러 라이브> <끝까지 간다> <마녀> <명량> <설국열차> 등 많은 한국영화를 편집했던 김창주 감독이 처음으로 연출한 영화 <발신제한>은 은행센터장 성규(조우진)가 “지금 당신 차 의자 밑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라는 전화를 받고 살아남기 위해 부산 해운대 도심을 질주하는 스릴러영화다. 목소리의 사연이 드러나는 영화 중반부까지 관객을 스크린에 집중시키는 솜씨가 신인답지 않게 노련하고, 영화의 후반부에는 묵직한 감동까지 장착했다.

-특이한 차를 몬다고 들었다.

=도요타 AE 86. 만화 <이니셜 D>에서 주인공이 모는 차다.

-수동으로 조작하는 차 아닌가.

=영화 편집도 비슷한 원리인데 (한손으로 기어를 조작하는 시늉을 하며) 클러치를 조작하고, 왼발과 오른발을 다 쓰는 등 온몸을 움직여야 기계를 다루는 느낌이 든다. <발신제한>은 단순한 자동차 액션 영화가 아니라 자동차와 인물이 일체감을 형성해야 관객을 몰입시킬 수 있는 이야기다.

-뜬금없이 차 얘기부터 꺼낸 건 평소 자동차에 대한 관심이 연출 제안을 수락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내가 성규가 되어 도로 위를 달리는 모습이 절로 떠올려지더라. 시나리오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차를 모는데 엔진 소리가 들릴 만큼 생생했다. 난관을 극복하고 돌파하기 위해 액셀러레이터를 전속력으로 밟는 느낌이랄까. 엔진 소리,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짓밟고 나가는 질감, 도심을 질주하는 속도감 등 자동차가 인물의 내면을 관객에게 전달하기에 매력적인 장치라고 생각했다.

-자동차 말고 또 무엇이 매력적이었나.

=주인공 성규. 성규가 하룻동안 겪는 모든 상황에서 느끼는 공포심을 끄집어내 펼쳐내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매우 동물적이었다. 가령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자가 얼룩말을 사냥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달려와 순식간에 목덜미를 물어 숨통을 끊지 않나. 얼룩말은 사자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면 살아남기 위해 앞뒤 재지 않고 도망친다. 성규 또한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하는 거다. 이 영화를 통해 살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의 근원을 탐구하고 또 드러낼 수 있겠다 싶었다.

-성규는 VVIP 고객의 펀드를 관리하는 은행센터장으로, 자본주의사회에 최적화된 인물인데.

=자본주의사회에서 굉장히 세련되고 능력 있는 인물이라고 보았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은 평범하게 살아가지만 비즈니스나 업무에서 내린 결정이 사회 구조적으로 또 다른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나. 그 점에서 관객이 성규에게 동질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배우 조우진의 어떤 점이 성규에 적합하다고 보았나.

=성규는 계산된 연기보다는 검투사처럼 싸우고 몸도 얼굴도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게 중요한 인물이다. 이야기 내내 차를 운전하는 설정이라 상반신만 나오는 제약이 있는데도 공포감에 휩싸인 얼굴이 즉각적으로 드러나야 영화가 성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1987>에서 “내 조카, 경찰이 죽였습니다”라고 말하고 오열하는 조우진의 몸동작은 연기가 아니라 진짜 같았다.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데 그걸 할 수 있는 배우가 성규 역을 맡길 바랐다. 표정이 스크린 밖으로 뚫고 나올 것 같은 에너지, 위기를 몸으로 받아버리는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조우진이었다.

-아들 민준이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성규의 머리를 향해 장난감 전자총을 겨누는 오프닝 시퀀스는 꽤 긴장감 넘치게 연출됐다. 성규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암시한다는 점에서 <샤레이드>(1963)가 떠오르고, 성규가 아이들에게 신뢰받지 않는 아버지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메리칸 뷰티>(1999)의 오프닝 시퀀스가 연상된다.

=개인적으로 <아메리칸 뷰티>의 마지막 시퀀스를 너무너무 좋아한다. 딸의 친구가 케빈 스페이시에게 “하우 아 유?”라고 물어보자 케빈 스페이시가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질문이구나”라고 대답하는 장면으로 상황을 정리하며 이야기의 끝을 맺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이 느낌을 언젠가 꼭 살려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연출 데뷔작에 활용할 줄은 몰랐다. 글이든 영화든 첫 문장, 첫 장면이 정말 중요하다. 영화에서 오프닝 시퀀스는 그 영화를 안내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 점에서 이 오프닝 시퀀스는 관객을 이야기에 끌어들여 최면을 거는 중요한 장면이다.

-영화는 성규와 그의 가족을 소개한 후 의문의 목소리가 등장하자마자 앞만 보고 내달리는데.

=군 시절 병장을 달고 휴가 나와 집에서 팝콘을 튀긴 뒤 <스피드>(감독 얀 드봉, 1994)를 보았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팝콘을 하나도 먹지 못했다. (웃음) 어린 나이에 무릎을 ‘탁’ 쳤다. 언젠가 영화를 만들면 <스피드>처럼 만들어야겠다. 어디 영화를 보는데 팝콘을 먹어, 화면에서 눈을 못 떼게 만들어야겠다. (웃음)

-성규가 운전하는 차는 성규의 집이 위치한 달맞이 고개에서 출발해 건물과 골목길이 빽빽하게 늘어선 장산역과 스카이라인이 펼쳐진 수영만을 거쳐 관광객이 몰려 있는 해운대 광장까지 해운대의 곳곳을 달린다. 차 동선을 설계할 때 세운 원칙은 무엇인가.

=각각의 신에서 가장 중요한 배경을 먼저 정하고 확보한 뒤 그 배경들을 순서대로 이어 붙였다. 다행스럽게도 이야기에서 필요한 배경들이 모두 해운대구에 있었다. 관객이 영화를 보는지, 성규의 시점이 되어 체험을 하는지 구분이 안 갈 만큼 생생하게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공간을 배치하려고 했다.

-로케이션 촬영 비중이 높아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예측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부담감도 컸을 것 같다.

=해운대를 거대한 세트장으로 쓴 셈인데(웃음) 사람들이 많고 카메라가 담아내야 할 커버리지가 넓다 보니 앵글을 쪼개서 찍을 수밖에 없었다. 후반작업에서 장면들을 한번에 찍은 것처럼 이어 붙였다. 얘기한 대로 로케이션 촬영 비중이 90% 이상이라 현장에서 변수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연기도 촬영도 연출도 긴장감이 넘치는 이 영화와 닮았다. 도심 질주 시퀀스가 생생했다면 현장에서 감도는 긴장감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전반부가 의문의 목소리가 지시하는 대로 해운대 도심을 질주하는 카 체이싱 신을 보여준다면, 목소리의 정체와 사연이 드러나는 중반부부터 서사의 방향은 사회 드라마의 형체를 갖추어가는데.

=서스펜스만으로 끝까지 끌고 가는 이야기는 아니다. 서스펜스를 통해 관객을 서사 깊숙이 끌어들인 뒤 목소리의 사연이 밝혀진 뒤부터 엄청난 충격과 감동을 관객과 나누고 싶었다. 목소리의 정체가 드러나기 중반부까지 성규는 그와 한번도 충돌하지 않잖나. 두 사람이 충돌하는 순간이 중요했고, 그 순간 서사가 다른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전환되는 게 관건이었다. 성규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겪으며 자신을 괴롭힌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걸 통해 엄청난 깨달음을 얻는 순간과 그 진심을 표현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성규는 그 일을 겪고 난 뒤 삶이 무엇인지 깨닫고,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또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성장한다.

-지창욱이 연기한 의문의 목소리는 선과 악의 경계를 묘하게 넘나드는 다층적인 캐릭터인데.

=중반부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전화로 협박하는 목소리만 등장하는데 목소리가 협박과 어울리지 않는 아이러니함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단순한 악역이 아닌 굉장히 입체적인 캐릭터인데 그가 후반부에 자신의 사연을 구구절절 설명하면 영화의 힘이 상쇄될까 봐 걱정을 많이 했다. 그의 사연이 가진 논리도 중요하지만 관객이 그 사람에게 진짜 공감하는 게 필요했다. 그 점에서 지창욱의 눈빛은 정말 깊다. 편집할 때 늘 하는 얘기가 배우는 좋은 눈빛을 가지면 만 가지를 보여줄 수 있다는 거다. 지창욱의 깊은 눈빛이라면 관객이 목소리가 가진 사연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수많은 한국영화를 편집하다가 직접 연출을 해보니 감독의 마음이 이해가 되던가.

=영화를 직접 편집하면서 ‘이 장면은 다시 안 찍어, 아니 못 찍어’(웃음) 그러고. 그간 함께 작업했던 감독님들이 정말 대단하신 분이구나 하며 완전히 공감했다. 오랫동안 편집하면서 내 영화를 연출하는 것처럼 주체적으로 생각했고, 어떻게 하면 이 장면 없이 이어 붙일까 고민했던 게 연출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그게 많은 감독들이 김창주 편집감독과 일한 이유라고 하더라. 편집감독으로 일하면서 언젠가 연출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나.

=어릴 때부터 연출하고 싶은 마음은 품고 있었다. 그동안 편집 일에 쫓겨 꿈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예기치 않은 타이밍에 연출 제안이 들어오면서 어어 하면서 운명처럼 데뷔했다.

-미국영화연구소(AFI) 유학 시절, 연출이 아닌 편집을 전공한 이유는.

=어릴 때부터 영화의 이미지와 사운드가 주는 감흥에 매료돼 연출이든 뭐든 영화를 직접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내성적이고 영화라는 게 혼자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편집이 연출로 가는 빠른 길이 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편집하면서 가장 좋았던 건 배우의 감정을 직접 조절할 수 있다라는 사실이다. 사운드도 음악도 그외 모든 아이디어를 집어넣고 조율할 수 있다. 편집은 또 다른 연출을 시도할 수 있는 일이구나 싶어서 편집에 발을 들이게 됐다.

-생각보다 연출 기회가 빨리 찾아온 셈인데 앞으로 연출을 계속할 건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에너지가 다할 때까지 하고 싶다. 마지막 색을 다 발산하고 사그라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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