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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오필리아' 햄릿의 연인 오필리아를 여성감독의 시선으로 담은 작품
배동미 2021-07-09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햄릿의 연인 오필리아를 여성감독의 시선으로 새롭게 탄생시킨 작품. 책 속의 인물이 아니고서는 여성이 도서관에 출입조차 할 수 없는 12세기 덴마크 왕실에서, 주인공 오필리아(데이지 리들리)는 평민 신분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거트루드 왕비(나오미 왓츠)의 시녀가 된다. 아첨꾼인 아버지 폴로니어스(도미닉 마프햄)가 평민 신분으로 왕국의 재상 자리에 오르고 오필리아가 왕실을 드나들면서 거트루드 왕비의 눈에 띈 덕분인데, 총명한 오필리아는 시대적인 분위기에 짓눌리지 않으면서 몰래 오빠 레어티즈(톰 펠튼)에게 글을 배워 왕비에게 책을 읽어주는 시녀로 성장한다.

어느 날 이 지혜로운 여성에게도 열병 같은 사랑이 찾아온다. 상대는 왕국의 왕자인 햄릿(조지 매카이). 독일 비텐베르크의 대학에서 공부 중인 왕자 햄릿은 잠시 왕실로 돌아와 물가에서 목욕을 하던 오필리아와 마주치고는 첫눈에 반해 그를 ‘물고기’라고 부르며 구애하기 시작한다. 신분 차이로 두 사람의 사랑이 쉬이 맺어지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사이, 왕실에서는 기이한 일들이 벌어진다. 햄릿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왕비는 시동생인 클로디어스(클라이브 오언)와 서둘러 혼인해버리고, 햄릿은 깊은 상실감과 우울감에 빠져든다. 오직 오필리아만이 갈등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결단을 내린다.

스무개의 장면으로 이뤄진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서 오필리아는 다섯 장면에서만 등장한다. 등장 횟수나 분량은 짧지만 희곡의 감정적인 국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덕에 오필리아는 오랫동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아온 캐릭터다. 광분에 휩싸인 연인 햄릿이 자신의 아버지를 왕으로 오인해서 죽이자 종국에는 실성해버림으로써 동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존 에버렛 밀레이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이 희곡에 영감을 받아 그림 속에 오필리아를 가련하면서도 기묘한 기운을 품은 여인으로 남겨놓기도 했다. 참고로 희곡 속 오필리아는 아버지 폴로니어스와 클로디어스 왕이 시키는 대로 햄릿을 혼란에 빠뜨리는 미끼로 움직였고, 햄릿이 어머니에 대한 증오 때문에 여성 혐오적인 발언을 하더라도 그저 듣기만 하는 인물이었다.

여성감독 클레어 매카시에 의해 재탄생한 영화 속 오필리아는 가부장의 지시를 그저 따르는 법이 없고, 시야가 좁아진 자신의 사랑 햄릿을 올바르게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주체적인 캐릭터다. 이런 변주에 힘을 싣는 건 <스타워즈> 시퀄 3부작에서 새 시대의 제다이인 레이 역을 맡았던 배우 데이지 리들리다. 야무지고 강단 있어 보이는 눈매와 입매를 가진 데이지 리들리는 미치지 않고 다른 길을 걸어가는 오필리아의 모습을 관객에게 납득시킨다. 함께 출연한 조지 매카이의 호연도 돋보이는데, 예스런 대사를 소화하면서도 사랑을 듬뿍 담은 눈으로 연인을 연기하다가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복수심에 사로잡힌 아들을 표현해낸다.

원작 희곡에 조예가 깊은 관객이라면 <오필리아>의 변주를 신선하게 받아들일 것이며, 시대극 팬들 역시 오랜만에 등장한 눈이 즐거운 이 작품을 환영할 것으로 보인다.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고,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늘어뜨린 인물들로 가득한 영화 속 세계는 부드러운 조명과 색감으로 아름답게 표현됐다. 밤 장면을 제외한 대부분의 장면을 자연광으로 촬영할 만큼 공을 들였으며, 음악감독 스티븐 프라이스의 음악도 장엄하게 흐른다. 다만 주인공의 복잡한 내면을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인지 내레이션을 너무 자주 사용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오프닝과 엔딩 시퀀스 모두 오필리아의 내레이션으로 채워져 있는데, 관객에 따라서는 이런 영화의 화법을 다소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CHECK POINT

여성감독 클레어 매카시

데뷔작 <크로스 라이프>와 두 번째 작품 <기다리게 하는 도시>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던 클레어 매카시는 <버라이어티> 선정 ‘2018년 주목해야 할 감독 10인’에 뽑힌 여성감독이다. 여성 캐릭터가 돋보이는 그의 필모그래피는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차기작은 <브리저튼>의 피비 디네버를 주연으로 한 <더 컬러 룸>과 나오미 왓츠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더 버닝 시즌>이다.

희곡 <햄릿>의 가려진 캐릭터 오필리아

클레어 매카시 감독은 대학 시절 <햄릿>을 주제로 논문을 쓸 때부터 오필리아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귀족이 아니고, 주변 인물들에 의해 관찰되는 캐릭터인 데다 원작에서 겨우 13줄 정도로 설명되기 때문에 영화로 옮기는 데는 상상력이 많이 필요했다. 매카시 감독은 오필리아가 원작과는 다른 선택을 하는 것으로 그린다.

나오미 왓츠의 1인2역

<오필리아>에서 거트루드 왕비를 연기한 배우 나오미 왓츠는 미지의 여인 메틸드까지 연기하며 1인2역을 소화했다. 원작에서는 나약하게 그려진 거트루드를 새롭게 해석하기 위해 매카시 감독은 거트루드 왕비의 그림자와 같은, 비밀스런 여성 캐릭터 메틸드를 만들어냈다. 나오미 왓츠는 <멀홀랜드 드라이브>에 이어 1인2역에 도전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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