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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신인감독 이장호의 역동적인 장르 탐색

<어제 내린 비>

영후(김희라)와 민정(안인숙)의 관계는 점점 깊어진다.

제작 국제영화흥업 / 감독 이장호 / 상영시간 102분 / 제작연도 1974년

이장호는 그 누구보다 화려하게 데뷔했던 감독이다. 20대 때 만든 <별들의 고향>(1974)은 개봉관인 국도극장에서만 46만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그때까지의 한국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다. 이 영화의 성공은 기성 제작 시스템에서 나온 결과가 아니었다. 신상옥의 연출부 출신이었지만 감독이 카메라를 직접 잡는 특유의 촬영 현장에서 실질적인 연출 수업을 받지 못했던 이장호는 감독 데뷔의 기회를 잡은 순간 백지 상태의 자신을 깨닫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것이 한국영화의 새로운 분기점을 만들어낸 배경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렵게 원작 판권을 확보한 일부터 촬영 현장에서의 즉흥적인 연출, 편집실에서 비로소 완성된 구성 그리고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의 창작까지 배짱 반, 행운 반으로 돌파한 첫 연출 행보는 이젠 꽤 알려졌지만 여전히 흥미로운 스토리다.

불세출의 데뷔작 <별들의 고향>은 이후 한국영화의 중요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불행의 끝을 보인 경아의 이야기는 1970년대 중후반 한국 영화산업을 지배했던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의 출발점이 되었고, 당대 젊은이들의 감수성과 결합한 감각적인 영상 문법은 청년영화의 물꼬를 텄다. 이후 세편의 작품을 연이어 연출한 이장호는 1976년 대마초 사건으로 4년여 감독 일을 쉬어야 했는데, 결과적으로 이 공백기는 그에게 약이 되었다. 한국 사회의 현실을 자각하게 된 그는 재기작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을 시작으로 흥행과 미학적 측면 모두에서 1980년대의 가장 중요한 감독으로 우뚝 선다.

그의 필모그래피 중 비교적 주목을 덜 받는 시기가 데뷔작 이후 활동을 중단하기까지다. 이때 연출한 <어제 내린 비>, <너 또한 별이 되어>(1975), <그래 그래 오늘은 안녕>(1976) 세편은 젊은 창작자의 역동적인 장르 탐색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또 그의 1980년대 작품의 원형적인 요소들을 배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충분하다. 각각 성을 직접적으로 다룬 청춘영화, 사후 세계와 엑소시즘이라는 소재와 정면 승부한 공포영화, 하류계급 청춘들의 삶을 기록영화의 질감으로 담아낸 멜로드라마였다.

신선한 영상 감각과 맞물린 O.S.T

두 번째 연출작 <어제 내린 비>는 일약 스타 감독이 된 이장호가 거액의 개런티를 받고 옮긴 영화사에서 제작했다. 코닥필름 3만자를 사용하고 신인배우를 직접 기용하겠다는 특별한 요구사항도 받아들여졌다. 이 시기 감독들은 영화의 러닝타임보다 조금 더 여유 있는 수준인 1만5천자 내에서 영화를 만들어야 했고, 주로 코닥보다 저렴한 후지필름을 써야 했으며, 네거티브필름을 50% 절감할 수 있는 테크니스코프(반프레임 촬영) 방식을 수용해야 했다.

<어제 내린 비> 역시 데뷔작 때처럼 친구 최인호로부터 원작을 받았고, 베테랑 촬영기사 장석준이 함께했다. 시나리오는 1971년 최인호가 교지 <연세>에 실었던 <정원사>를 모태로 김승옥이 완성했다. <별들의 고향> 때 이장희, 강근식과 함께 성공시킨 O.S.T 녹음은 정성조와 메신저스가 맡았다. 주인공은 세명이었다. 영화사의 요청대로 <별들의 고향>의 안인숙을 캐스팅하는 대신 감독이 정하기로 한 신인 자리에는 동생 이영호를 데뷔시켰다. <별들의 고향>의 판권을 사기 위해 등록금을 가져갈 때 이영호에게 영화배우를 시켜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또 한명의 주인공은 액션 장르를 통해 스타로 발돋움한 김희라였다.

영화는 첫새벽에 조깅하는 청년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이건 청춘들의 이야기라고 선언하는 듯 감각적인 영상에 경쾌한 음악이 얹힌다. 이때 나오는 노래가 O.S.T 중 하나인 최병걸의 <달려서 가네>다. 청년은 첩(도금봉)의 자식이라는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영후(김희라)인데 비위에 거슬리면 차라리 웃어버리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지만 속으로 상처받는 인물이다. 아버지(최불암)가 그를 본가로 데려가는 날 모친은 그에게 “돼지 새끼”, “멍텅구리 새끼”라며 막 대하지만 헤어지는 모자는 애틋함을 쉽게 숨기지 못한다.

이어지는 아버지의 집 장면이 가족사진을 찍는 모습으로 연결되는 것도 흥미롭다. 그들을 가족으로 묶어내는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아버지가 만지는 장총 소리와 구분되지 않는데, 영후가 새로운 가족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불행이 기다리고 있음을 예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초반부 영화는 사내다운 영후와 병약한 영욱(이영호)이라는 상반된 두 인물을 설명하는 데 할애한다. 운동은 무엇이든 잘하는 영후는 대학의 마라톤 선수이고 아직 소년 같은 영욱은 생맥주 클럽에서 노래하는 무명 가수다.

영후는 그저 뛰는 게 좋을 뿐 시합에 나가 이기고 지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코치(박암)는 승부의식이 결여된 것은 승부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아서 그런 것이라고 영후를 꾸짖는다. 이 말은 영후와 배다른 동생 영욱, 그 사이 민정(안인숙)이 벌이는 관계와 겹친다. 영후는 자신에게 마음을 여는 영욱에게 웃는 장난감을 건네준다. 과장된 웃음소리를 내는 이 장난감은 영화의 핵심적인 소품인데, 비루한 혈통이라는 콤플렉스, 히스테릭한 어머니를 견디기 위해 자신의 감정과 상관없이 웃어야 했던 영후의 분신과도 같다.

기이한 엔딩

마라톤 대회에 나간 영후는 결국 경기를 포기하고 코치는 “국가로서도 가장 쓸모없는 패배주의자”라며 그를 비난한다. 영후는 “사지 말고 아껴 쓰자” 같은 내셔널 구호가 즐비한 명동에서 반강제로 헌혈차에 오른다. 이때 흐르는 최병걸의 <오후>는 영후 혹은 당대 청년들의 심산한 마음 속 풍경을 대변한다. 영후는 영욱이 노래 부르는 클럽에서 처음 민정과 마주치는데, 이때 들리는 노래가 타이틀곡인 윤형주의 <어제 내린 비>다. 민정에게 반한 영후는 그녀를 쫓아다니지만 집안끼리 영욱과 맺어주기로 한 사이임을 알고 물러선다. 하지만 어머니의 결혼식 날 자신을 위로하는 민정과 밤을 보내게 된다. 영후와 민정의 첫 관계를 담은 호텔 시퀀스는 <별들의 고향>에서 선보인 이장호 특유의 플래시백으로 세련되게 완성됐다.

영후와 민정의 관계는 더욱 뜨거워진다. 형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민정에게 영욱은 마지막 여행을 부탁하고, 그녀가 같이 떠나자 영후는 이 게임 역시 포기한다. 총을 가져간 영욱과 민정이 무사히 돌아오지만 영후는 둘을 강하게 밀어낸다. 그리고 차가 추락하며 둘은 죽는다. 엔딩은 독해가 힘들다. 다시 인트로곡이 흐르며 터널 속을 달리는 영후, 그리고 영후의 모친, 아버지와 영욱의 어머니가 자고 있는 짧은 컷이 나온 후,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는 영후의 모습을 보여준다. 돌아보지 말라는 코치의 목소리에도 그는 자꾸만 뒤돌아본다. 이 영화는 영후의 악몽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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