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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위도우'로 블랙 위도우를 떠나보내며

최종 악당은 MCU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영화들에 있는 두개의 심각한 문제점에 대해서는 몇년 동안 떠들고 다녔는데, 지겹지만 이번에도 거기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이걸 빼먹으면 <블랙 위도우>라는 영화가 설명이 안된다. 하나는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멤버 구성이다. 이건 눈치 없이 시대를 따라잡지 못한 결과가 아니다. 마블 코믹북 유니버스에서 어벤져스가 이렇게 백인 남자로만 구성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이건 심지어 마블의 기존 이미지와도 맞지 않는다. DC가 고전적인 스토리텔링을 추구하는 회사라면 마블은 늘 격변하는 시대를 반영하는 회사로 알려졌다.

어벤져스가 얼마나 이상한 모양인지 알려면 역시 같은 회사에서 나왔고 코믹북에서는 같은 우주를 공유하며 심지어 몇년 일찍 나온 <엑스맨> 시리즈를 보면 된다. MCU를 만든 사람들은 그냥 눈치 없었던 게 아니었다. 이것은 의도적인 성차별적, 인종차별적 혐오 행위다. 이렇게 10년 가까이 단물을 빼먹고 절대로 당연시되어서는 안되는 이미지에 정상성을 부여한 주제에, 비백인, 여성 캐릭터에 선심 쓰듯 단독 영화를 하나씩 주는 건 몰염치한 짓이다. 마블 넷플릭스 드라마는? 비백인, 장애인, 여성을 몰아놓고 2군 취급한 세계다. 물론 어벤져스 멤버들은 이들의 존재도 모른다.

다음은 일관된 유니버스에 대한 과잉 집착이다. MCU의 역사는 처음부터 좋은 이야기일 수가 없었다. 전혀 다른 성격의, 심지어 다른 장르의 이야기들이 엉성하게 엮였는데, 그 자체도 우스꽝스럽지만 이것이 배배 꼬이고 쌓여가면서 이후 영화에도 영향을 끼친다. 마블 영화들은 대체로 이 유니버스에서 분리되어 있을수록 좋다. 그리고 이 유니버스가 어느 정도 진척된 뒤에 나온 작품들은 직접적으로 퀄리티의 영향을 받는다. 최근 들어 가장 심하게 손해를 본 건 마블 최고의 슈퍼스타지만 MCU에서는 토니 스타크의 애완견으로 전락한 스파이더맨이다. MCU에 발목이 잡히지 않은 마일스 모랄레스가 얼마나 멋진 세계에서 멋진 모험을 하고 있는지 비교해보라.

MCU에도 여자가 있다는 알리바이를 넘어

<블랙 위도우>는 이 두 핸디캡을 묵직한 짐처럼 짊어지고 있다. 이 영화는 지난 10년 동안 어벤져스가 ‘여자도 하나 있다’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넣은 블랙 위도우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단독 영화다. 시리즈 내내 여기저기 구석에 박아두다가 캐릭터가 죽고 나서야 간신히 단독 영화가 나온 것이다. 이 알리바이는 어처구니없다. 원작에서는 당당한 메인 멤버였던 사람을 구석에 박아두는 것도 모자라 능력도 약화시키고 나이도 줄이고 스토리도 없애고 남자 멤버들의 고민을 받아주는 비서, 엄마, 여자 친구로 만든 뒤 결국 자기 희생을 핑계로 죽였다. 이건 아주 느린 살인 과정이다. 이 상황은 독립된 영화를 만드는 데에도 방해가 된다. 지금까지 나온 마블 영화들이 블랙 위도우를 필요로 할 때마다 불러와 조금씩 써먹었기 때문에 캐릭터의 역사는 좁고 비뚤비뚤하다. 캐릭터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 놓인 캐릭터의 이야기를 쓰는 건 크레바스 밑에서 길을 닦는 것과 같다. 아무리 노력해도 길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은 좁아터졌고 끝은 막혀 있다.

<블랙 위도우>를 보고 든 생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열심히 노력했구나!”였다. 하지만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역시 결함과 구멍들이다. 일단 영화는 1995년에 시작한다. 스파이인 위장 부모와 가짜 동생인 옐레나와 함께 미국에 살던 나타샤 로마노프(라고 써야겠지)는 임무가 끝나자 허겁지겁 러시아로 돌아가 여자아이들을 슈퍼스파이로 훈련시키는 레드룸에 투입된다. 벌써부터 구멍이다. KGB는 1991년 소련과 함께 사라졌다. 그 뒤라고 두 나라 사이에 첩보전이 없었던 것도 아닐 것이고 여기에 MCU의 허구 역사가 섞여 들어가지만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남의 나라 역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티끌만큼도 없다. 게다가 지난 10년 동안 <블랙 위도우>의 배경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멋대로 써먹… 이 이야기는 그만하기로 하자.

대놓고 <007 문레이커>를 레퍼런스로 삼은 영화답게 <블랙 위도우>는 007스러운 판타지 에스피오나지물이다. 과거 007 영화들은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에서 분리된 환상적인 악당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였다. <블랙 위도우>는 독립된 악당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지만 뜬금없이 냉전시대의 분위기를 풍긴다. 특히 영화가 세뇌와 행동 통제를 다룰 때는 더욱 그렇다. 60, 70년대 에스피오나지물에서 공산국가가 저지르는 행동심리학에 기반을 둔 세뇌는 단골 소재였다. 그런데 MK울트라(미 중앙정보국이 비밀리에 수행하던 불법 생체실험)를 진짜로 굴린 나라 사람들이 21세기를 배경으로 여자애들을 세뇌하는 구소련 악당을 등장시켜 영화를 만든다면 좀 염치없다는 생각이 든다. 구소련 출신 악당이 등장하는 것까지는 주인공 캐릭터 설정상 이해가 되는데, 이 모든 일들을 이미 죽은 ‘악의 제국’의 책임으로 몰아붙이면 메시지가 은근슬쩍 분산된다. 결국 여기서 나라는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는 반박과 설명이 필요한 이유

페미니스트 영화다.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 할리우드에서 여성 히어로 영화를 만들면서 페미니즘을 제거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MCU에서 굴러온 블랙 위도우는 처음부터 별다른 방해 없이 자기 이야기로 시작한 원더우먼이나 캡틴 마블과 다른 입장에서 있다. 10년 동안 별 생각 없는 수많은 (남자) 작가들이 필요할 때마다 기능적으로 굴려왔지만 원작과 배우와 우연의 힘으로 아슬아슬하게 버텨온 캐릭터에게 이야기와 존재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최종 악당은 레드룸과 두목인 드레이코프가 아니라 MCU 자체다.

이 영화에서 그 대결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레드 가디언/알렉세이의 무심한 생리 언급 뒤의 나타샤와 옐레나의 반박이다. 여성의 신체에 대한 끔찍한 폭력의 이야기가 조심성 따위는 개에게나 줘버린 뻔뻔스러운 농담을 입고 폭포수처럼 쏟아져나온다. 이 농담은 이 영화의 각본을 쓴 에릭 피어슨(이 영화의 원안과 각본을 쓴 사람들도 모두 남자다)의 매우 끔찍했다는 생리 농담 대사를 지우고 니콜 홀러프세너가 고쳐 쓴 것이다. 이는 <블랙 위도우> 원래 각본에 대한 반박이기도 하지만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 나와 모두를 분노하게 했던 ‘괴물’ 운운 대사에 대한 반박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영화 자체를 대표하는 장면인 것이다. <블랙 위도우>는 끊임없는 반박과 설명으로 채워진 영화다.

다소 길긴 하지만 발랄하고 재미있는 영화다. 특히 가짜 동생인 옐레나, 가짜 엄마인 멜리나와의 경쾌한 호흡은 일품이다. 이야기의 액션이 파괴보다는 구출과 구원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 레드룸을 통해 여성에 대한 물리적, 심리적 지배를 상징하게 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블랙 위도우의 캐릭터를 쓴 건 옳은 선택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길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미 호의적인 다른 팬들이 꼼꼼하게 분석했으니 더 더할 것은 없어 보인다.

문제는 여전히 영화가 블랙 위도우 자신에게 숨 쉴 공간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명과 반박, 의무방어 액션이 끝나면 이번에도 주인공에게 남는 시간은 별로 없다. 이는 짊어진 짐이 거의 없어 어디든 튈 수 있는 옐레나 캐릭터와 비교해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다른 주인공이라면 대충 첫 영화의 짐을 여기서 버리고 이어지는 삼부작의 다른 두편에서 새로운 모험을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이 영화를 찍기도 전에 죽어버렸고, 영화는 쿠키에서 옐레나를 MCU의 또 다른 이야기에 투입시키느라 애도할 시간도 제대로 주지 않는다. 결국 블랙 위도우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는 여기서 끝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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