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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사 형제 연출, 변요한·김무열 주연의 '보이스'가 담아낸 보이스피싱 범죄의 모든 것
김소미 2021-09-17

전화기 너머, 늑대들의현장

사진제공 CJ ENM

국내 최초로 보이스피싱 범죄를 집요하게 파고든 범죄 스릴러 <보이스>는 곡사 형제가 만든 공포영화 못지않게 섬뜩한 난장을 펼쳐낸다. <화이트: 저주의 멜로디>(2011), <무서운 이야기>(2012), <무서운 이야기3: 화성에서 온 소녀>(2016) 등을 연출했던 김선, 김곡 감독이 호러 장르의 테두리를 벗어나 처음 선보이는 상업영화다. 보이스피싱 사기를 당한 전직 마약반 형사가 중국의 거대 콜센터에 잠입하는 이야기인 <보이스>는 금융감독원, 지능범죄수사대의 자문을 받아 날로 수법이 진화하는 보이스피싱 사기의 거의 모든 것을 담았다.

올해 데뷔 10주년을 맞이한 배우 변요한이 특유의 깊고 비장한 눈빛으로 나 홀로 복수를 감행하는 전직 형사 한서준을 연기했고, 김무열은 콜센터의 브레인 곽프로로 분해 <승리호>(2020)에 이어 또 한번 서늘한 악역의 면모를 드러낸다. 한서준이 흘린 단서를 따라 조금씩 거리를 좁혀오는 경찰반장 역의 김희원, 매사 덤벙거리지만 해킹 실력만큼은 뛰어난 해커 역의 이주영, 중국 콜센터 조직을 관리하는 본부장 역의 박명훈 등 적재적소에서 음과 양의 밸런스를 조율하는 배우들의 내공도 구멍난 데 없다. 주조연 배우의 활약과 보이스피싱 현장의 생생한 실체가 담긴 <보이스>의 매력을 소개한다.

사진제공 CJ ENM

“엄마 나 폰 액정이 나가서 수리 맡기고 임시번호로 문자하는 중. ㅠㅠ 통화가 안되니깐 문자로 답장해줘~.” 오랜만에 날아온 딸의 연락에 신이 난 60대 여성은 더듬거리며 답문을 써내려갔다. “소미야. 통화가 안되는 모양이구나. 모처럼 비가 세차게 내리네. 집에는 언제 올 거니?” 그러자 딸이 말한다. “응, 근데 나 지금 급하게 인증받을 거 있는데 이 앱 좀 설치해줘.” 조급한 딸은 곧바로 이렇게 덧붙인다. “엄마 설치할 때 꼭 모든 걸 허용하고 활성화하기 해줘야 해요.” <씨네21> 1319호 메타버스 특집에 실릴 인터뷰를 진행 중이던 기자는 몇번이고 연달아 걸려오는 모친의 전화에 놀라 결국 인터뷰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말았다. 10여분 후, 보이스피싱범은 갑자기 묵묵부답이 된 타깃에게 최후 통첩을 날린다. “엄마 나 급한데… 설치했어요? 왜 답이 없어요?”

부엌 식탁에 앉아 보이스피싱범에게 정성스레 답장을 적었을 엄마를 생각하니 어쩐지 짠해졌지만, 특유의 친절함으로 본의 아니게 보이스피싱범을 희망 고문한 모친의 능력은 곧 유쾌한 무용담 정도로 잊혀졌다. 웃음기 묻은 기억이 갑자기 서늘한 기세로 돌변해 뒤쫓아온 건 영화 <보이스>를 보고 나오는 시사회장 출구에서였다. <보이스>에 의하면 우리 가족을 타깃 삼았던 피싱 사기단은 규모가 작고 수법도 대단히 허술한 축에 속했다.

사진제공 CJ ENM

전직 형사 한서준을 노린 거대 조직이었다면, 상황은 결코 쉽게 종료되지 않았으란 안도와 경각심이 뒤늦게 찾아왔다. 변작기(중계기)로 발신번호를 조작하거나 공기관을 사칭해 그럴듯하게 금전을 요구하는 수법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보이스>에서 거대 조직이 구사하는 전략은 상상 이상으로 지능적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이들은 전화 가로채기 앱을 통해 피해자를 고립시킨다. 앞선 상황에 적용하자면, 자초지종을 확인하기 위해 딸에게 연락을 시도한 엄마의 전화를 콜센터가 가로챈 뒤 다급한 상황을 꾸며댔으리란 추측이 가능해진다. 변작기, 가로채기 앱, 가짜 은행 사이트, 공기관 사칭 앱 등이 난무하는 요즘, 더이상 어설픈 서울말로 뻔한 대본을 읊던 레퍼토리는 찾아볼 수 없다. 고작 핸드폰 액정이 깨진 정도의 시나리오라 다행이지, 만약 피싱범이 꾸며낸 이야기가 교통사고나 금융사기였다면 어땠을까. 아찔한 상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공감- 영화와 피싱의 공통 철학

사진제공 CJ ENM

<보이스>에서 배우 변요한이 연기한 한서준은 한때 잘나가는 마약사범 전문 경찰이었지만 모종의 비리에 얽혀 지금은 건설 현장의 반장으로 일한다. 그런데 현장 감독으로 승진 계약을 앞둔 어느 날, 두개의 사기 사건이 그를 덮친다. 시작은 자신을 김현수 변호사라 소개한 남자에게 걸려온 한통의 전화. 그는 건설 현장의 인부가 사망해 서준이 조사를 받고 있다며 서준의 아내 미연(원진아)에게 7천만원의 합의금을 요청한다. 피싱 사기단의 공작으로 서준의 전화가 먹통이 된 탓에 부부는 연결될 수 없었고, 당황한 아내는 아파트 중도금으로 마련한 돈 7천만원을 전송하고 만다. 같은 날, 현장 사무소 소장 또한 보험을 권유하는 피싱 사기단에 속아 인부들의 개인정보를 넘겼고, 30억원에 달하는 돈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서준은 결국 가족과 동료들의 전 재산을 되찾기 위해 직접 수사에 나선다.

보이스피싱 사기단의 ‘몸통’이 중국 선양에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는 ‘한번 넘어가면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그곳에 위장잠입을 결심한다. 그렇다. 이건 은퇴한 액션 히어로(형사, 스파이, 특수요원 그리고 리암 니슨…)가 불가항력적인 호출에 의해 다시 자신의 본업을 수행하게 되지만, 이번엔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 외롭게 싸운다는 익숙한 설정이다. 유유히 꼬리를 숨기는 범죄조직을 쫓는 주인공의 뒤로 경찰이 따라붙는 삼자구도 역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전개와 결말이 뻔히 내다보이는 이 뼈대를 극복할 전략으로 <보이스>는 크게 두 가지의 활로를 모색한다. 첫 번째는 보이스피싱 세계의 핍진성과 구체성을 녹여낸 각본이다. 대림동 어딘가로 보이는 허름한 빌라 안, 험상궂은 조직원들이 남몰래 거래 중인 물건은 지퍼백에 든 마약이나 무기 따위가 아니다. 이들은 백화점 문화센터 수강생, 대기업 최종면접자, 아파트 청약 당첨자 등 타깃이 될 만한 고객명단을 통으로 빼낸 작은 USB를 주고받는다. 중국 사무소에 이들의 정보가 도착하면 기획실 작가진이 건강보혐료 인상 소식과 같은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대본을 작성해 수백명에 달하는 콜센터 직원들에게 뿌린다. 배우 김무열이 연기한 곽프로는 이 과정을 쥐고 흔드는 선양 콜센터 기획실의 실세다. 그는 곧잘 김현수 팀장으로 통하는데 은행, 금융감독원, 변호사 사무소 등을 사칭하며 자신의 이름을 늘 김현수라 소개해서다. “피싱은 곧 공감”이라는 사이코패스적 철학에 충실한 그는, 궁지에 몰린 사람들의 심리를 조종하는 데 탁월한 한편 그들의 고통 앞에서는 전두엽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양 무감하다.

“우리는 망할 전화 테러리스트다!”

사진제공 CJ ENM

<보이스>를 추동하는 또 다른 활력은 거대한 사각의 방 안에서 벌어지는 음지의 스펙터클이다. 영화에 담긴 조직의 본거지 모습은 신자유주의가 낳은 기이한 시궁창처럼 묘사된다. 전광판에선 목표 달성액을 향해가는 숫자가 시시각각 경신되고, 전화선 사이로 한쪽에서는 비명이 다른 한쪽에서는 스포츠영화에서 볼 법한 아드레날린이 폭죽처럼 솟아오른다. 하루 동안 3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것이 목표인 ‘취업준비생 프로젝트’ 시퀀스는 사기 실화를 다룬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2013) 속 증권 사무소의 풍경마저 연상시킨다. 전자는 지하창고에서 일련번호가 적힌 점퍼를 입고 일하는 사람들의 감옥이고, 후자는 뉴욕 마천루에서 맞춤형 슈트를 입고 일하는 사람들의 무대다. 계층을 적시하는 이 아찔한 수직의 격차만을 제외하면, 두 영화에서 콜센터 직원과 증권가 브로커들이 작동하는 방식은 동일하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실존 인물 조던 벨포트가 외치는 대사, “우리는 망할 전화 테러리스트다!”에 답이 들어 있다. 전화기 너머의 남을 회유해 나의 돈을 버는 것, 그 고통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가능한 한 최대치의 광기에 취하는 것. 이들의 원리는 유일하고 강력하다. 실제로 증권가 출신에 마약중독자의 전력을 지닌 캐릭터 곽프로가 마이크를 들고 직원들에게 사기를 불어넣는 장면은 돈에 미쳐버린 조던 벨포트의 지하조직 버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무열이 돈의 숙주가 되어 더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인간을 연기한다면, 변요한은 때로 신파에 가깝게 인간적 존재의 감정을 연기하면서 그 대척점에 선다. 보이스피싱 콜센터라는 지극히 현대적인 사기 현장의 스펙터클 속에서 인간과 비인간, 피해자와 가해자가 줄다리기하는 영화 <보이스>는 예상 가능하게도 선한 양의 편을 들어주면서 끝맺는다. 하지만 “<보이스>의 시나리오를 읽고 며칠 후 가족에게 매니저의 이름으로 돈을 요구하는 문자가 왔다”는 배우 변요한의 말처럼, 영화의 결말은 관객을 좀처럼 안심시켜주지 못한다. 크레딧 너머에서 늑대들은 여전히 도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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