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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개월의 미래' 남궁선 감독
남선우 사진 최성열 2021-10-28

임신은 여성에게 혼란스러운 경험이다

임신 11주차, 계획 없이 엄마가 된 미래(최성은)에게 주어진 선택지들은 모두 시간싸움이다. 아이는 열달 후에 태어난다는데 한주 한주 몸과 마음이 변한다. 남자 친구는 속없이 굴고, 상사는 눈치를 준다. 아이를 낳을 자신은 없고 지우자니 “명분이 없다”. <세상의 끝> <최악의 친구들> 등 여러 단편으로 주목받은 후 지난 10월 14일 첫 장편 <십개월의 미래>를 내놓은 남궁선 감독은 “미래의 MBTI는 분명 NTP 유형일 것”이라며 그 직관적이고도 즉흥적인 사고방식을 곱씹었다. 그러나 개봉 일주일 만에 1만 관객을 만난 이 성장담은 유형과 전형을 벗어나는 시선으로 임신이라는 경험의 복합성을 껴안는다. 그 끝에 ‘엄마에게’라는 헌사를 띄우며, 남궁선 감독은 영화 밖 미래들에게 손을 뻗는다.

- 제목에서부터 돋보이는 이 영화만의 시간 감각이 있다. 미래의 임신 주차가 각각의 챕터가 되어 크고 흰 폰트로 스크린을 채운다. “생각을 하면 시간이 사라진다”고 강조하는 중절 수술 코디네이터의 대사도 그 폰트처럼 각인되더라.

= 미래가 처음 임신 사실을 알고 고민에 빠지는 게 11주차고, 다른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궁금해하는 게 13주차인데, 23주차엔 이제 세상이 자신을 다르게 본다고 느낀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단위로 너무 많은 변화가 쏟아진다. 그 느낌을 살리고자 폰트가 침략하듯 영화에 끼어들게 했다. 게다가 미래는 논리가 납득되지 않으면 움직이기 어려운 성격인데 주변에서는 깊이 생각하면 안된다고 한다. 생각하면 아이를 지울 수 없다, 낳을 수 없다, 외국에서 일할 수 없다…. 정작 모든 걸 감내할 여성에게는 생각할 여유가 없다. 이런 시간성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미래가 생각을 좀 하려고 하면 어떤 일이 끼어들도록 영화를 전개했다.

- 영화 초반부, 남자 친구 윤호(서영주)와 미래 모두 어떻게 임신을 한 건지 도통 몰라 그 과정을 추측하기에 이른다. 계획 없이 임신한 여성이 비난받지 않도록 연인의 설정을 다듬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 맞다. 그래도 비난할 분은 비난할 거다. (웃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조심했어야지’라는 표현에는 조심하면 임신을 안 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런데 콘돔을 사용해도 피임 실패율이 2~15%나 된다. 모두가 조심해도 2%는 존재하게 된다. 여성이 임신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에 오류가 있다는 걸 상황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미래가 어떻게 10주가 되도록 임신 사실을 모를 수 있냐고도 물을 수 있지만 생리 주기가 10주를 넘어가는 사람도 있다. 그런 허점, 틈새를 짚어주고 싶었다.

- 임신이라는 사건 자체에 무게를 두려는 시도 또한 느껴졌다. 여러 주변 인물을 통해 경제력과 결혼 여부를 떠나 임신 그 자체가 여성에게 혼란스러운 경험이라는 걸 강조한다.

= 특수한 상황에서 임신을 한 것이라 설정하면 풀어가기 쉬운 명확한 지점, 도덕적 합의 같은 게 생겼을 테다. 그러나 보통의 여성들이 겪는 임신이라는 경험에는 그런 특수성이 덜하다. 미래의 나이를 29살로 설정한 것도 그래서다. 아이를 생각해본 적 없다는 이유만으로 중절을 택하기 어렵게 만드는 사회적 압력도 있다고 생각했다. 미래에게 주어진 이 모든 설정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애매한 임신의 조건을 향하고 있다. 불안정하면서도 원하는 바가 명확한 미래가 한끗 차이로 무너질 수 있는 설정이 아니었나 싶다.

- 그런데 미래는 이상할 정도로 엄마와 소통하지 않는다. 임신한 여성이 가장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는 대상이 자신의 엄마일 텐데.

= 어떤 어머니들은 자신이 딸의 롤모델로서 똑바로 살아오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하며 조언을 삼간다. 미래가 엄마에게 질문을 하는데 그때마다 엄마가 대답은 못하고 맥주만 홀짝이는 장면도 있었다. (웃음) 편집 과정에서 잘려나갔지만 미래 어머니에게 알코올중독기가 있다고 설정했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많은 공간이 미래에게 답을 주지 못한다. 미래와 엄마의 관계도 그랬으면 했다.

- 잠깐 등장하고 사라지는 또 하나의 공간이 미래의 자취방이다. 어디서도 안정을 취하지 못하고 계속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도 특징이다.

= 내 자취방보다 친구들이나 애인의 공간 중 가장 좋은 곳에서 놀지 않나. 미래가 사는 공간도 그래서 짧게 나온 것 같다. 미래와 윤호 모두 가정으로부터 떠나고 싶은 욕망은 강하지만 한국적 가족주의로 인해 애매한 독립을 한 인물들이다. 가족이라는 다이내믹 안에서 경제적 주권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들도 조망해보고 싶었다. 이때 미래는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기에 그 중간적 상태에 걸맞은 게 자동차 아닐까. 그 차는 선배 강미(권아름)가 타고 다니던 아빠 차를 물려받은 걸로 설정돼 있다. 그 작은 공간만이 온전한 미래의 공간으로 보이더라. 거기에 카시트가 들어오면서 아이와의 미래도 진행될 것 같다.

- 여성의 임신 경험에 대해 활발히 얘기되지 않던 시기를 지나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았다. 2014년에 어머니가 되면서 쓰기 시작한 영화와 함께 시대적 변화를 통과하고 있는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 처음 이 영화를 구상했을 때는 놀라울 정도로 이름 없는 곳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경험을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게 걸려 영화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 이후로 새로운 페미니즘의 물결이 왔고,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깨야 하는 편견이 훨씬 줄어들었다. 물론 이 영화의 결말이 프로 라이프 대 프로 초이스 논쟁에 있어 오해를 살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미래가 어떠한 확신을 갖고 선택을 내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 속에 깊이 들어가버리면 어느 쪽도 쉽게 선택할 수 없다. 이 경험의 복잡성을 이해하고 나면 쉽고 단순하게 말할 수 없다. 어머니들도 늘 두 가지 비난을 받아왔다. 왜 충분히 헌신적이지 못했냐는 비난과 왜 그렇게 희생적으로 살아왔냐는 비난. 그 비난을 걷어내고 모성이 한 가지 그림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야 어머니들이 덜 외로워질 것 같았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미래로부터 시작했지만 어머니로 끝난다. 우리는 바닥을 쳤을 때 사회의 답대로 합리화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이 영화를 통해 관객이 지금의 상황을 직시하고 거기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얻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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