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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의 SF를 좋아해] 듀나 유니버스를 위한 안내서
이경희(SF 작가) 2021-11-04

당신은 ‘듀나DJUNA’라는 이름을 들으면 어떤 이미지를 가장 먼저 떠올리시는지? 아무래도 <씨네21>의 독자라면 영화평론가 듀나를 가장 먼저 떠올릴 가능성이 높겠다. 또 어떤 이들은 정체를 감춘 그의 익명성에 집중할지도 모르고. 또 어떤 이들은 그냥 트위터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나 풀어놓는 토끼 정도로 생각하고 계실는지도 모르겠다.나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듀나의 이미지는 ‘SF 작가’다. 아니, SF의 전설이다. 아니, 아니, 그걸로도 부족하다. 듀나는 이 땅에 현현한 SF의 화신…. 음음, 팔불출 같은 팬심 표출은 이 정도로 하고, 아무튼 오늘은 SF 작가 듀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듀나는 한국 SF 문학 계보에서 중요한 작가 중 하나다. 그는 90년대 PC통신 시절부터 지금까지 30년 가까운 기간 동안 100편이 넘는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으며, 현재도 수많은 SF 창작자들을 자신의 중력에 가둬두고 영향력을 발산하는 적색거성 같은 존재다. 사실상 듀나는 한국 SF의 역사를 관통하는 기둥과 같다. 장담하건대 만약 당신이 SF라는 장르에 관심을 갖고 파고들기 시작한다면 결국 어떤 식으로든 듀나의 장(場) 안으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내기해도 좋다.

사석에서 이렇게 듀나를 소개하고 나면 사람들은 이렇게 묻곤 한다. “듀나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뭐부터 읽으면 되나요?”

자, 여기서부터 생각이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당신의 취향을 모르기 때문이다. 듀나의 세계는 깊고 방대해 당신이 좋아할 만한 작품 하나쯤은 마련되어 있을 것이 분명하지만, 똑같은 이유로 어떤 작품부터 추천해야 할지 곤란할 때가 많다.

설명의 편의상 듀나의 작품 세계를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작품을 추천해보려 한다. 미리 말해두건대 이는 공인되지 않은 구분법이며 학술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다. 21XX년 1학기 K대 교양과목인 ‘고전 한국 SF 문학의 이해’ 교재에 따르면 이 모든 리스트는 듀나의 극초기 작품으로 분류될 뿐이다.

초기 듀나 세계의 정수를 탐구하고 싶다면 단편집 <태평양 횡단 특급>을 추천한다. 어떤 팬들은 이 책이야말로 범접할 수 없는 듀나의 마스터피스라 칭하기도 하는데, 이 책에 수록된 작품 중에서도 특히 단편 <태평양 횡단 특급>에 대한 평가가 그렇다. 달리는 국제선 기차 위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개인적으로는 같은 책에 수록된 <끈>과 <기생>을 좋아하는 편이다. 초기 듀나 작품의 특징을 아주 단순화해 정의하자면 영미 장르문학의 장르 관습과 한국문학의 세련된 문장이 결합된 형태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레퍼런스 삼을 국내의 SF가 전무하다시피한 상황에서 듀나는 이 둘을 재료로 자신의 기반을 다졌다. 과거 작품들이 쌓아올린 장르 관습에 대한 충분한 애정과 능숙한 활용은 듀나 문학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

만약 시기적으로 가장 앞에서부터 탐구하고 싶다면 단편집 <면세구역>부터 읽으면 되겠다. <태평양 횡단 특급>에 비해 스타일이 들쭉날쭉하지만 이 책에서만 읽을 수 있는 좋은 작품들도 존재한다. 더 앞선 시기에 출간된 단편집 <나비전쟁>도 있긴 한데 구하기가 정말 어렵다. 게다가 <면세구역>과 수록작이 반쯤 겹친다. 내가 보유하지 못한 유일한 듀나의 단행본으로, 도서관에서 겨우 찾아 읽었다. 이쯤 되면 거의 사료의 영역인 듯하다. 고고학적 호기심을 충족하고 싶다면 중고 서점을 뒤져보는 것도 좋겠다.

초기 듀나 스타일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대리전>을 추천한다. 이 작품은 듀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무대인 ‘부천’이 배경인데, 한국이라는 무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는 중요한 전환점인 것 같다. 부천 사람들의 몸에 통신으로 접속한 외계인들의 조용한 전쟁을 다룬 이 작품은 단편과 장편 두 가지 버전이 존재하고, 둘 다 훌륭하고 재미있다.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극히 한국적이면서도 살짝 기괴한 유머 코드는 이후 여러 작가들의 어레인지를 거치며 한국 SF의 보편적인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대리전>을 통과하면 여러분은 이제 듀나 세계의 중세로 접어들게 된다. 본격적으로 듀나만의 유니크한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시기다. 모두가 동의하진 않겠지만 나는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를 중기 듀나의 시작점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동명의 단편집에 수록된 이 단편은 ‘링커 우주’라는 세계 설정을 처음으로 선보인 역사적인 작품이다. 링커 우주는 ‘링커 바이러스’라는 설정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작품들을 총칭하는데, 감염된 생물의 용불용설적 진화(생물에는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있어, 자주 사용하는 기관은 발달하고 그렇지 않은 기관은 퇴화한다는 학설)를 촉진하는 이 특수한 바이러스를 재료로 듀나는 다양한 실험적인 세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진화가 극단적으로 촉진된 기괴한 우주에서 인간을 규정해온 틀은 모조리 박살나고, 세계는 꿈틀대는 변모와 도태의 장으로 바뀌어간다. 듀나 특유의 차갑고 관조적인 시선이 몹시도 매력적이다.

링커 우주만큼이나 사랑스러운 시리즈인 ‘배터리 우주’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주위 사람들을 초능력자로 만들어주는 ‘배터리’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줄거리가 펼쳐지는 일군의 시리즈는 일종의 성장담이다. 단, 여기서 성장하는 건 인류 그 자체지만.

100편이 넘는 듀나의 작품 중에서도 내가 최애하는 <민트의 세계>가 바로 배터리 우주에 속하는 작품이다. 한국을 무대로 민트라는 정신감응자(일종의 텔레파시 능력자)와 친구(?)들이 모험을 벌이는 일종의 하이스트물로, 듀나의 단편작들이 가진 매력에 깊고 흥미로운 장편 서사가 더해졌다. 특히 후반부 액션에서 결말까지 이어지는 흐름이 너무 좋다. 나는 여전히 이 작품보다 매혹적인 SF를 알지 못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얼마 전까지 나는 링커 우주와 배터리 우주를 듀나의 ‘후기’ 작품이라 소개했었다.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를 기준으로 듀나는 전기와 후기로 나뉘며, 전기 듀나와 후기 듀나 중 어느 쪽을 좋아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취향이 갈린다고 믿었다. <대본 밖에서>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SF 전문 무크지 <오늘의 SF> 창간호에 게재된 이 짧은 단편은 충격적이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한동안 이 작품의 구조를 파고 또 파며 분석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후기’로 분류하게 된 이 작품의 특징은 ‘비움’이다. 드라마 속 세상을 사는 인물들의 이야기인 <대본 밖에서>는 앙상한 뼈대만 남을 때까지 이야기의 요소를 비워내고 또 비워낸다. 어디까지 비워내도 이야기로 성립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으로 보일 정도다. 그럼에도 이 짧은 이야기는 완벽하게 성립한다. 막대한 경이감까지 일으킨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라지는 미로 속 짐승들> <불가사리를 위하여> 같은 이후의 작품들에서도 같은 경향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확실히 듀나는 새로운 페이즈로 접어든 것이 분명하다. 30년간 내리 소설을 써온 사람이 여전히 변모하고 진화하고 있다니. 듀나야말로 링커 바이러스의 본체가 아닌지. 우리는 아직 듀나의 끝을 모른다.

여전히 장르의 최전방에서 한국 SF를 첨단으로 이끄는 거대한 중력. 그게 듀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