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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덕후가 만든 놀이터, 끝나지 않을 확장과 진화
송경원 2021-11-09

“스토리 중심의 콘텐츠가 될 것이다. 만화나 짧은 시네마틱 혹은 서사 중심의 콘텐츠, 중편 더 나아가 장편소설까지 개발해 여러분에게 세계관을 보여드리겠다.” 미디어 종합 그룹의 프랜차이즈 콘텐츠에 대한 발표가 아니다. 게임 <LoL>의 정체성과 미래에 대한 설명이다. 라이엇 게임즈의 공동 창업자 브랜든 벡은 <LoL>이 스토리라인에 집중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이렇게 세계관을 마련해놓으면 어떤 것이 여러분의 마음을 울렸는지, 다음엔 무엇이 더 보고 싶은지 알려주시리라 생각한다.” 자신들이 뛰어놀고 싶은 무대를 직접 만들 수 있는 세계. 함께 쌓아올려가는 이야기. 요약하면 플레이어가 주인이 되는 플레이어 중심의 게임. 참신한 아이디어에 이상적인 목표지만 실제로 이걸 실행한다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도전이다. 라이엇 게임즈의 성공 비결은 단순하다. 이 심플한 아이디어와 분명한 목표를 행동에 옮긴 것이다. 게임 덕후가 직접 만든 놀이터 <LoL>의 기적은 여기서부터 출발했다.

게임 덕후가 만든 놀이터, 끝나지 않을 확장과 진화

<LoL>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플레이어를 보유한 PC 온라인 게임이다. 2009년 게임 출시한 뒤 <LoL>이 걸어온 길은 화려하다. 출시 초기부터 2개월 만에 동시 접속자 10만명을 넘어서더니 미국, 유럽을 넘어 중국, 동남아시아, 한국 등 점차 그 서비스 지역이 넓어져 현재는 총 19개 지역에서 25개 언어로 서비스되고 있다. 2016년, 한달에 한번 이상 게임을 이용한 사용자가 1억명 이상이라 발표한 데 이어 최근에는 지난 10여년간 <LoL>을 비롯해 <레전드 오브 룬테라>처럼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게임들을 합치면 총 6억명이 게임을 플레이했다는 통계를 내놓았다. 지난 10월 한달 동안 <LoL> 및 각종 연계 게임에 접속한 사람만 해도 1억8천명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LoL>로 진행되는 월드컵과 같다 하여 ‘롤드컵’이라 별칭이 붙여진 <LoL 월드 챔피언십>은 전세계 e스포츠 대회 중 가장 많은 시청자 수를 확보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흥행작이다. MOBA(Multiplayer Online Battle Arena) 장르인 <LoL>의 룰은 간단하다. 팀을 이룬 플레이어들끼리 협력하여 상대의 본진을 부수는 것을 목적으로 한정된 맵에서 전투를 진행한다. ‘팀을 나눠 싸운다’는 간단명료한 룰을 듣고 나면 이 게임에 왜 이토록 방대하고 정교한 스토리가 필요한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짜임새 있는 협력 전투와 전략적인 진행, 절묘한 밸런스만큼이나 <LoL>의 영광의 성을 쌓아올린 중요한 기둥은 다름 아닌 ‘이야기’의 힘이다. 전투의 즐거움만큼이나 중요한 건 자신이 플레이하는 캐릭터에 빠져들고,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줄 각양각색의 이야기의 매력이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LoL>의 본질은 전장의 스릴보다 다채롭고 방대한 스토리라인에 있다. 게다가 이 스토리는 플레이어들과 함께 살아 움직인다. 플레이어의 꿈을 현실로 구현하며 조금씩 넓어져가고 있는 ‘룬테라’의 세계는 이미 거대하고 매혹적인 프랜차이즈 그 자체라 봐도 무방하다. 라이엇 게임즈가 <LoL>의 IP를활용한 다방면의 확장을 끊임없이 이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LoL>이 오늘날 세계적인 게임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기반은 바로 게임 리그의 창설에 있다. 게임을 너무 사랑하는 두 청년이 의기투합하여 만든 무료 게임 <LoL>은 시작부터 플레이어 친화적인 일종의 스포츠게임에 가까웠다. 당연히 플레이를 하는 것만큼이나 보는 재미도 충분한 장르였고, 라이엇 게임즈는 이 점을 놓치지 않았다. 유저들의 참여를 ‘플레이’에 국한하지 않고 경기의 ‘시청’으로까지 확장함으로써 그야말로 함께하고, 보고, 즐길 수 있는 모델을 구축한 것이다. 그렇게 ‘드라마’는 게임 안에만 국한되지 않고 게임을 플레이하는 과정, 이를 지켜보는 시청자들 안에서도 각각의 형태로 피어난다. 이것은 라이엇 게임즈가 지향하는 목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단발성 상품으로 소비되는 게임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 경험을 제공하겠다는 의지라 해도 좋겠다.

라이엇 게임즈는 ‘플레이어들에게 최고의 경험을 선사한다’는 목표 아래 그동안 콘서트, 음악, 패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IP를 활용한 콘텐츠를 선보여왔다. 2015년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의 <소환전> 전시, 2016년 부산 벡스코의 팝업스토어, 2021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LoL 라이브: 디 오케스트라> 등 유저들의 진입 장벽을 낮추기 위한 수많은 행사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시네마틱 영상을 더 재밌게 보기 위해 게임을 한다’는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을 만큼 라이엇 게임즈는 각각의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하이퀄리티의 시네마틱 영상으로 매 시즌 화제를 불러모았다.

정점은 2018년 선보인 가상의 걸그룹 K/DA의 활약이다. <LoL>에서 인기 많은 4명의 여성 캐릭터 카이사, 이블린, 아리, 아칼리로 구성된 K/DA는 한국의 (여자)아이들의 미연과 소연, 매디슨 비어, 자이라 번스, 이렇게 실제 유명 가수들이 보컬을 맡았다. 2018년 롤드컵 월드 챔피언십 기념으로 결성된 K/DA의 <POP/STARS> 뮤직비디오는 공개 4일 만에 2천만뷰, 1개월 만에 1억뷰를 돌파했고(2021년 현재 4억6천만뷰), 빌보드 월드 디지털 송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K/DA의 등장은 플레이어들을 위한 서비스 이상의 파급력을 가져왔다. 게임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롤드컵이 얼마나 거대한 행사인지 게임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확실히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방위로 IP를 확장 중인 라이엇 게임즈가 짧은 시네마틱 영상에 그치지 않고, 인기 캐릭터들을 바탕으로 한 본격적인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만드는 건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첫 번째 애니메이션 시리즈 <아케인>, 모험의 닻을 올리다

2019년 ‘<LoL> 출시 10주년’ 기념 행사에서 라이엇 게임즈는 팬들을 위한 애니메이션 시리즈 발표를 약속했다. 2년이 지난 2021년 11월 7일, 드디어 팬들의 오랜 염원이 담긴 프로젝트가 베일을 벗는다. 넷플릭스를 통해 190개국에 동시 공개되는 <아케인>이 그 주인공이다. <아케인>은 <LoL>의 세계인 룬테라 행성의 여러 지역 중 필트오버와 자운을 배경으로 하며 인기 캐릭터 중 하나인 바이와 징크스 자매의 이야기를 주축으로 다룬다. 왜 바이와 징크스인가. 공동 제작자인 크리스티안 링케는 “제작 초기 단계에서 징크스와 바이의 이야기에서 아주 특별한 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가족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가치를 타협하고 어떤 갈등을 인내할지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켜보고 싶었다”며 이들을 주인공으로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같은 맥락에서 왜 필트오버와 자운인가. 녹서스와 데마시아, 아이오니아의 전쟁, 그림자 군도의 위협, 무법항구도시 빌지워터에서의 모험, 신비로운 타곤과 엄혹한 프렐요드에서의 사투 등 <LoL>에는 다룰 이야기가 너무 많다. 그중 라이엇 게임즈의 첫 번째 애니메이션 시리즈 <아케인>이 선택한 건 기계를 중심으로 진보적인 도시를 이룬 필트오버와 이를 둘러싼 거대한 지하도시 자운이다.

게임 속 필트오버가 깨끗하고 위선적인 도시라면 지하도시 자운은 좀더 위험하고 욕망에 충실한 곳이다. <아케인>은 두 도시가 아직 하나였던 시절을 배경으로 <LoL> 속 여러 영웅들의 시작을 그린다. 공동 제작자 앨릭스 이는 “<아케인>은 이중성에 관한 이야기다. 도시의 상부와 하부로 나뉘는 캐릭터들은 자신이 볼 때는 주인공일 수도 있지만 타인의 시점에서는 악당일 수도 있다”고 밝혔다. 선악의 이분법이 아니라 다층적인 면을 건드린다는 건 <LoL>의 세계관을 한층 깊이 있게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아마도 선명하게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도시가 좀더 복잡한 드라마를 빚어내기 적합한 장소이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닐까.

이런 요소들을 종합해볼 때 <아케인>은 단지 게임 IP를 충실히 구현하는 것 이상의 결과물이 될 가능성이 짙다. 이 야심만만한 애니메이션은 이제까지 라이엇 게임즈가 선보인 숱한 IP 콘텐츠와 마찬가지로 <LoL> 팬이 아니라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요소로 가득하다. 짧은 예고편만 봐도 게임 팬들을 위한 서비스를 넘어 단독 콘텐츠로서의 충분한 완성도를 보증한다고 해도 좋겠다. 우선 <토이 스토리2>(1999)를 연출한 애쉬 브래넌 감독의 첫 번째 애니메이션 시리즈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K/DA의 뮤직비디오를 성공적으로 완성한 프랑스의 3D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포티셰 프로덕션과의 협업은 이번에도 믿음을 더한다.

무엇보다 원작의 인기에 기대어 캐릭터를 소비하는 대신 그들의 과거로 돌아가 <LoL>의 전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집중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익숙한 영웅들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어쩌면 <아케인>이 기존 세계관의 반복이나 보충이 아니라 또 다른 우주를 창조하는 작업의 시작일지 모른다는 기대감. 필트오버의 집행관 바이와 폭발광 범죄자 징크스에 얽힌 사연을 중심으로 제이스, 케이틀린, 하이머딩거, 에코 등 필트오버와 자운을 무대로 하는 영웅들의 숨겨진 사연은 깊이 있는 이야기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다. 애니메이션 시리즈 오리지널 캐릭터인 밴더와 실코의 심상치 않은 존재감도 이러한 기대를 뒷받침한다. 어쩌면 <아케인>은 원작 게임의 설정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항로를 설정할지도 모르겠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원작 코믹스와는 또 다른 우주를 창조한 것처럼 말이다.

<아케인>은 팬들을 위한 최상의 선물이자 방대한 세계관의 기반부터 다시 촘촘히 다지는 작업이다. 동시에 <LoL>의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재구축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게임과의 유기적인 연결은 유지하되 소설, 코믹스, 애니메이션, 심지어 실사영화까지 확장 가능한 본격적인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향한 모험의 시작이라 해도 좋겠다. 이미 디즈니를 비롯한 여러 미디어 그룹들이 IP 기반의 세계관 구축에 열을 올리는 시점에서 이렇게 좋은 IP를 가만히 내버려두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게임을 통해 충분히 학습된 ‘룬테라’의 세계는 그야말로 이야기의 보물창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이엇 게임즈는 아직 캐지 않은 보물, 이야기의 원석을 다듬기 위한 본격적인 모험의 닻을 올렸다. 그렇게 룬테라의 세계는 게임을 하고, 플레이를 보고, 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즐기며 다양한 형태로 확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