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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방랑자들
김소미 남선우 2021-11-11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작품-첫 작품 <초원의 강>부터 <퍼스트 카우>까지

<초원의 강>(1994)

초원의 강

햇빛 찬란한 누아르’라는 이름표가 잘 어울리는 켈리 라이카트의 데뷔작. 영화는 만사에 무심한 듯 나른한 여자 코지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엄마 없는 유년, 사랑 없는 결혼…. 녹록지 않은 가정사를 힘 쭉 빼고 들려주는 그의 독백은 공상으로 이어진다. 권태로운 삶에 연료를 붓기 위해 조금씩 시동을 걸어온 코지에게 드디어 사건다운 사건이 터진다. 한밤중 아이를 재우고 외출해 만난 남자 리와 술을 마시고 장난을 치다 주인 없는 총을 쏴버린 것. 실수로 살인자가 된 코지는 리와 도주하고, 형사인 코지의 아빠는 잃어버린 총을 찾아 헤맨다. 마이애미 이스트 해변에 가려던 이들이 길을 잘못 들면 마주한다는 ‘초원의 강’처럼, 코지는 사고가 준 긴장과 흥분에 점점 중독되어간다. 어딘가로 가고 싶지만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이들의 번민을 다뤄온 켈리 라이카트. 그의 첫작품은 노곤한 듯 펑키하고, 파격 끝에 기이한 운치를 피워낸다. 재즈 디바들의 초상을 끌어와 어제의 무상함과 오늘의 충동들을 뒤섞는 대목 또한 백미다.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후보에 오르고, <필름 코멘트>가 그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꼽으며 켈리 라이카트를 차세대 작가로 주목받게 한 작품. 남선우

단편들

<송가>(1999), <그 후 일 년>(2001), <트래비스>(2004)

송가

켈리 라이카트의 관심사를 보다 역사적이고 논쟁 적인 지점까지 확장해 보여준 소품들을 소개한다. 1999년 공개된 <송가>(Ode)는 러닝타임이 50분 정도 되는 중편이다. 가수 바비 젠트리의 1967년 발표곡 <Ode To Billy Joe>에 영감을 받아 허먼 로처가쓴 소설을 각색한 <송가>는 노래에 얽힌 실화에서 출발한 영화다. 다리에서 투신한 소년 빌리 조는 왜 자살했을까? 영화는 소년과 소녀의 비밀스러운 만남을 통해 믿음과 불신, 욕망과 의문을 충돌시킨다. 단편 <그 후 일 년> <트래비스>는 한층 실험적인 면모가 돋보인다. 미술관의 전시실도 상영관으로 잘 어울릴 이 두편은 사운드 디자인에 공들인 티가 역력한 작품으로, 라이카트가 직접 녹음한 TV, 라디오 음성 들로 채워져 있다. 이는 미국의 전쟁과 범죄, 테러 이후 일상에 잠복한 무수한 혼란 그 자체를 표현한다. 특히 <트래비스>의 화면은 오직 색상의 변화로만 이뤄져 있어 떨리는 목소리에 더욱 집중하게 한다. 남선우

<올드 조이>(2006)

올드조이

<초원의 강> 이후 중단편 작업을 지속해온 켈리 라이카트가 12년 만에 내놓은 장편 <올드 조이>는 두 남자와 개 한 마리의 1박2일을 따라가는 로드무비다. 이후 <웬디와 루시> <믹의 지름길> <어둠 속에서> <퍼스트 카우>에 참여한 작가 조나단 레이몬드의 소설을 원작 으로 한 첫 영화기도 하다. 이야기는 간단하 다. 집 밖 간이 정원에서 명상을 하던 마크는 오랜 친구 커트의 전화를 받는다. 오리건의 산속 온천으로 캠핑을 떠나자는 커트의 제안을 받은 마크는 개 루시를 데리고 커크와 재회한다. 두 친구와 루시는 길을 잃기도, 길을 찾기도 하면서 짧은 여행을 다녀온다. 영화는 서먹하고도 애틋한 마크와 커트 사이를 소리와 풍경으로 채운다. 여정의 처음과 끝에는 정세를 토론하는 라디오 뉴스가 흐르 고, 눈을 돌리는 곳마다 새와 벌레, 나무와 물줄기가 각기 다른 생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틈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옛 친구들의 근황을 나누는 두 남자는 ‘한 시대의 끝’을 말한다. 더이상 전과 같지 않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동안, 이들은 오래된 기쁨의 조용한 존재 방식을 탐미하기 위해 움직인다. “슬픔은 기쁨이 닳은 것뿐”이라는 대사는 그래서 더욱 간절해진다. 제35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 타이 거상 수상작. 남선우

<웬디와 루시>(2008)

웬디와 루시

<올드 조이>에서 두 남자와 발맞춘 리트리버 이자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반려견 루시가 웬디 곁에 나타난다. 웬디를 연기한 배우는 미셸 윌리엄스. <믹의 지름길> <어떤 여자들>까지 동행하며 라이카트의 페르소나로서 자리 매김한 그가 처음으로 그의 프레임에 들어온 영화가 <웬디와 루시>다. 집도 돈도 없는 웬디는 보수가 좋다는 알래스카 공장에 가서 일하고 싶다. 하지만 빈 지갑과 낡은 자동차에 갇힌 웬디에게 알래스카는 너무도 멀다. 게다가 절도로 유치장에 다녀온 웬디가 루시를 놓치면서부터 웬디의 발은 개를 잃은 오리건에 완전히 묶여버린다. 영화가 공개된 2008년 칸국제영화제, 루시가 매년 가장 훌륭하게 역할을 소화한 견공 배우에게 수여되는 팜도그상을 받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가난한 주인을 인내하는 자세를 네발로 설득한 루시는 앵글에 따라 건장한 말처럼 보이기도, 눈망울이 큰 소처럼 보이기도 한다. <웬디와 루시>는 정처 없이 소외된 인간의 고독을 끝까지 바라봐주는 영화기도 하다. 영화는 자본과 기계에 밀려난 인간이 무엇을 잃어야 했는지, 무엇을 가져야 했는지, 그럼에도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 목격한다. 이 뭉클한 성장담은 감독이 루시와 함께한 마지막 영화가 되었고, 라이카트는 루시가 떠난 이후 나온 장편 <어떤 여자들>을 그에게 바친다. 남선우

<믹의 지름길>(2010)

믹의 지름길

켈리 라이카트의 서부극은 미국 영화의 멘탈리티를 따르기 이전에 물리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환경의 본질을 파고든다. 말을 타고 질주하는 카우보이 대신 갈증에 허덕이다 쓰러지는 청교도 남편을 무릎에 뉘이는 임산부가 있고, 지평선 너머에 나타난 의문의 대상은 광활한 대지를 천천히 건너오는 동안 결코 점프컷으로 축약되지 못한다. 1845년, 새 정착지를 찾아 동에서 서로 횡단하는 3쌍의 부부와 행렬의 안내자 믹이 험준한 오리건주 골짜기를 건넌다. 극심한 피로와 물 부족이 이어지자 일행은 점차 믹의 안내를 불신하게 되는데, 우연히 인디언 한명을 생포하게 되면서 그를 따라 물길을 찾아나설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해진다. 믹의 허위 의식과 폭력성을 꼬집고, 인디언을 두려워하면서도 그의 신발을 꿰매어주는 에밀리(미셸 윌리엄스)는 그 중심에 있다. 장르가 아닌 태도로서 풍경을 수집하는 라이카트의 시선이 극대화된 작품이며 감독은 그 풍경의 주체로서 여성을 호출했다. 믹의 쇼트컷(shortcut·지름길)이 아닌 컷오프(cutoff·절단, 분절)로 묘사된 제목처럼 이 영화가 의심하는 것은 숏을 분열시켜 역사와 세계를 감각적으로 조작하는 영화의 기술이기도 하다. 에밀리가 인디언을 처음 발견하고 장총 한발을 쏘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총을 장전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카메라는 서부극의 필연적 양식이 슬로 시네마일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내러티브의 논리 안에서 끈질기게 이어지는 인물들의 행위, 지속되는 시간을 통해 폭력과 윤리, 본능과 의식이 혼재하는 식민 역사의 이면을 기록하는 작품. 김소미

<어둠 속에서>(2013)

어둠 속에서

<초원의 강>과 함께 주류 내러티브에 가장 가까운 형태의 라이카트 영화. 오리건주에서 활동하는 3인의 극단적 환경주의자들이 댐을 폭파하기 위해 벌이는 모의를 심리 스릴러로 펼쳐냈다. 수력 발전 댐에 폭탄을 설치하 려는 조쉬(제시 아이젠버그), 데나(다코타 패닝), 하몬(피터 사즈가드)은 신념에 기초한 파괴적 행위를 자처하면서 그 반향을 안고 살아 간다. <어둠 속에서>를 통해 감독이 예리하게 벼려낸 관점은 급진적인 행동주의와 인간 윤리에 대한 지적인 탐구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본성의 모호함이다. 영화 속 3인방이 자처하는 전투와 폭력은 결국 각자의 근원에 대한 혼란을 불러낸 다. 영화는 프레임 바깥에서 스토리를 전개하거나 극적인 어둠을 지속하는 형태로 주제를 시각화했다. 극장 환경에서 보지 않으면 제대로 관람하기 힘든 영화다. 한편 켈리 라이카트의 미니멀리즘은 제시 아이젠버 그라는 배우를 만나 연기의 스타일로서도 이상을 실현한다. 조쉬가 얼어붙은 얼굴과 웅얼 거리는 말투 뒤로 숨기고 있는 불안감은 영화의 전개와 함께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나는 데, 댐의 폭파 시점이 다가올수록 그 주변에 살고 있는 무고한 타인의 존재가 부각되면서 딜레마 또한 극대화된다. 김소미

<어떤 여자들>(2016)

어떤 여자들

작가 마일 멜로이의 단편소설들에 기초해 세편의 이야기를 앤솔러지 형태로 묶은 <어떤 여자들>은 <믹의 지름길>과 느슨한 연작을 이룬다고 풀이해도 흥미롭다. 미국 몬태나주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네명의 현대 여성의 삶을 엿보는 영화에는 산업 재해를 겪고 정서가 불안정한 의뢰인에게 시달리는 변호사 로라(로라 던), 현지에 맞는 생태적 재료로 집을 지으려고 노력하지만 남편의 무관심에 근심하는 외지인 지나(미셸 윌리엄스), 벨프리의 목장에서 일하며 야간 수업을 듣는 주민 제이미(릴리 글래드스톤), 왕복 8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운전해 수업을 운영하는 법대생 베스(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나온다. <믹의 지름길>에서 원주민과 교감했던 배우 미셸 윌리암스는 에서 타지에 정착해 그곳의 환경과 순리를 있는 그대로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로 되풀이된다. 한편 실제로 몬태나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자랐고 인디언 혈통을 가진 배우 릴리 글래드스톤은 에 중요한 멜로드라마적 동요를 일으킨다. 이번에 땅을 가로질러 개척에 나서는 역할은 백인이 아닌 제이미가 갖는다. 원작에서 남성이었으나 영화에서 여성으로 풀이된 그가 새롭게 발굴하려는 것은 금광이 아닌 사랑이다. 밤샘 운전 끝에 만났으나 기대와는 다른 베스의 반응을 확인하고서 돌아가는 길, 졸음에 빠진 제이미의 차가 도로를 이탈하는 장면이 있다. 그 순간 서북부의 광활한 평원은 핸들을 놓친 운전자의 차를 받아주는 넉넉한 품이 되어 이미지를 지배한다. 라이카트 영화의 풍경은 코엔 형제의 것처럼 비정한 범죄의 지대이거나 테렌스 맬릭의 것처럼 영적인 무대가 아니라 우리 곁에 상존하며 불쑥 위엄을 드러내는 자연의 세례로서 살아 숨쉰다. 김소미

<퍼스트 카우>(2019)

퍼스트 카우

켈리 라이카트 영화는 캐릭터의 내면을 복잡하게 사유하는 부류가 아니다. 각각의 인물들은 도식적일 정도로 분명한 상징을 취하지만 인물과 인물, 인물과 자연이 얽혀 있는 형국이 복잡다단한 역학을 구축하면서 끝내 기묘한 여운을 남긴다. <퍼스트 카우>는 감독이 자신의 특징을 거의 메타적으로 노골화 또는 단순화한 작품처럼 보인다. 1820년대 오리건주, 사냥꾼들의 식량 담당인 피고위츠(존 마가로)는 무리에서 도망쳐나온 중국인 킹 루(오리온 리)와 숲속에서 조우한다. 두 남자는 자신들이 가진 최상의 것을 내다팔아 돈을 번다는 자본주의적 이상을 갓 구운 맛있는 ‘쿠키’로 실현하려 한다. 미지의 땅에 발을 내디딘 이민자들과 원주민의 긴장 구도가 희석된 자리에 전면화된 것은 영국인 대장이 소유한 암소의 젖을 훔치는 피고위츠와 킹 루의 범죄 행위다. 계급의 분열과 심화, 신자유주의의 원형에 대한 비판은 중심 인물이 품은 순진한 우정, 아름다운 풍경과 심상한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먼 훗날, 공업화된 오리건의 강물 위에 증기선이 유유히 떠다닐 동안 숲길을 혼자 걷던 여성이 기록되지 않은 기원의 존재들과 연결된다. 개와 산책하던 한 여자의 상상으로 시작된 이야기일지 모르는 <퍼스트 카우>는 실패한 아메리칸 ‘밀키’ 드림을 통해 자생과 개척의 미국 신화를 해부하는 부드러운 우화다. 김소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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