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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대하고도 내밀하게 MCU는 다시 시작된다
이주현 2021-11-11

이주현 기자의 <이터널스> 리뷰

마블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화제작 <이터널스>가 11월3일 개봉했다. <노매드랜드>로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등을 받은 클로이 자오 감독이 연출을 맡은 <이터널스>는 인류를 지키기 위해 지구에 온 태초의 히어로 이터널스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터널스>가 보여주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새로운 지향을 살펴보고, 더불어 <이터널스>를 통해 새롭게 만나는 히어로 캐릭터들을 정리해 소개한다.

세대교체에는 진통이 따른다. 구세대가 물러나고 새 세대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을 경우 미화되는 건 과거이고 의심받는 건 미래이다. 어벤져스로 대변되던 마블의 한 시대가 저물었다. <아이언맨>(2008)을 시작으로 한 MCU의 영웅담은 <어벤져스: 엔드게 임>(2019)을 마지막으로 큰 챕터를 마무리했다(<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은 페이즈3의 에필로그 격이므로). 이른바 페이즈1에서 페이즈3까지를 일컫는 ‘인피니티 사가’가 끝난 것이다. 필요한 것은 변화이고, 마블의 다음 세대를 책임질 새로운 히어로들이다. <이터널스>의 글로벌 컨퍼런스에서 마블의 수장 케빈 파이기는 왜 지금 이때 <이터널스>에 주목했냐는 질문에 “포스트 인피니티 사가의 세계에서 우리는 새롭고 대담한 단계를 만들고 싶었다. 우리는 아직 우주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르고 <이터널스>에는 우리가 아직 만나지 못한 10명의 멋진 영웅들이 있었다”라고 답했다. 케빈 파이기가 언급한 것과 같이, 신화적이고 우주 적인 잭 커비의 원작 코믹스 <이터널스>에는 어벤져스 멤버들과는 결이 다른 새로운 영웅들이 있다. 이들의 활동 무대는 범우주가 될 것이고, 그것은 마블 페이즈4를 멀티버스(다중우주)로 이끄는 데 더없이 적합해 보인다. 그러니 <이터널스>에서 <어벤져스>를 기대하면 낭패를 본다. <이터널스>는 <어벤져스>와는 다른 캐릭터, 다른 문법, 다른 시각을 구사하는 작품이다. 매끈한 바통 터치 대신 과감한 변화. 기존에 알고 있던 세계가 펼쳐지지 않는다고 당황해선 안된다.

다양성의 가치를 심다

캐릭터의 보강과 차원의 확대로 확실히 MCU의 ‘지평’은 확장되었다. 사실 확장은 모든 블록버스터들이 외치는 공통된 구호다. 중요한 것은 확장 자체가 아니라 확장의 방향성, 즉 ‘지향’이다. MCU의 새로운 지향은 <이터널스>의 캐릭터들에게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우선 이터널스는 지금으로부터 7천년 전 지구에 온 태초의 히어로들이다. 이터널스는 인간을 위협하는 괴물 데비안츠를 상대하기 위해, 인류를 지키기 위해 올림피아 행성에서 온 불멸의 종족이다. 행성의 창조와 소멸을 관장하는 우주의 거대한 신적 존재 셀레스티얼의 명령을 따르는 이터널스는 기원전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도착한 이래 현재까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다. 셀레스티얼 아리솀과 소통하는 메신저이자 리더인 프라임 이터널스 에이잭(살마 아예크)을 비롯해, 물질의 성질을 바꾸는 세르시(제마 챈), 이터널스 최강의 전사 이카리스(리처드 매든), 수천년간 10대의 몸으로 살아온 스프라이트(리아 맥휴), 전쟁의 여신 테나(안젤리나 졸리), 무적의 주먹 길가메시(마동석), 정신을 조종하는 능력을 지닌 드루이그(배리 키오건), 우주에서 가장 빠른 존재 마카 리(로런 리들로프), 양손에서 에너지를 뿜어내는 전사 킨고(쿠마일 난지 아니), 이터널스의 발명가 파스토스(브라이언 타이리 헨리)까지 10명의 히어로가 주인공이다. 이들은 5세기 전 사라진 줄 알았던 데비안츠가 출몰하자 다시 힘을 모은다.

<이터널스>의 캐릭터들은 나이, 성별, 인종, 국적, 성적 지향 등 모든 면에서 <어벤져스> 시절과는 비교도 안되게 다양하다. 여기엔 히어로물의 주인공은 대체로 백인 남성이었던 이전의 공식을 바꾸고 다양성의 가치를 심고자 한 의도가 선명히 담겨 있다. 에이잭과 스프라이트 그리고 마카리는 원작 코믹스에서 모두 남자였다.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원작 캐릭터의 성별을 바꿔 10명의 이터널스 성비 균형을 5:5로 맞췄다. 성별만 바꾼 것이 아니다. 원작과 영화 사이 캐릭터의 간극이 가장 큰 인물 중 하나는 마카리인데, 영화에서 마카리는 수어를 사용하는 청각장애 히어로다. 장애를 지닌 인물이 마블의 히어로가 된 것은 마카리가 처음이며, 실제로 마카리를 연기한 로런 리들로프는 청각장애 배우다. 이외에도 지구에 정착한 파스토스는 사랑하는 남자 친구와 가정을 꾸려 자신을 닮은 똘똘한 아이까지 키우며 살아가는 동성애 커플의 모습을 보여주고, 한국 배우 최초로 마블 영화에 입성한 마동석과 파키스탄계 미국 배우인 쿠마일 난지아니도 <이터널스>의 다양성에 한몫한다.

MCU는 캐릭터로 지탱되어온 세계다. <이터널스>가 시대의 요구와 가치를 반영해 공들여 만든 캐릭터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기에 충분할 만큼 다양한 배경과 사연을 두르고 있다. 문제는 처음 안면을 트는 새 친구 10명과 친해지는 데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한데, 그러기에 영화의 러닝타임 155분은 너무 짧거나 너무 길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셀레스티얼, 이터널스, 데비안츠의 존재가 소개되 고, 그들을 이해하기 위한 포식자와 최상위 포식자의 개념이 더해지고, 기원전에서부터 시작하는 방대한 시간축과 전 지구에 발자취를 남기려는 듯한 광범위한 공간축까지 수시로 교차하다 보니 초반엔 정보를 입력하고 조합하느라 정신이 없다. 시간과 공간의 축지법에 익숙해지는 사이사이 10명의 새로운 캐릭터와도 반갑게 인사를 나눠야 하는데, 캐릭터를 알아갈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 또한 제한 적이다. 몸집이 큰 대서사 안에서 캐릭터의 운신은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적인 예로 마동석의 길가메시는 분명 우리가 MCU에서 처음 만나는 캐릭터인데도 익숙하게 다가온다. 우락부락한 근육에 가공할 힘을 지녔음에도 의외의 귀여움과 의로움을 가진 마동석의 기존 캐릭터가 길가메시에도 그대로 이식되었기 때문이다. 발리우드 스타가 되어 살아가는 킨고나 동성애 과학자 파스토스도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만 반듯하게 수행하고 퇴장하는 느낌이다.

거대한 서사 속의 모래 한알

“한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그대의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클로이 자오 감독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전조> 첫 구절에서 <이터널스> 의 비전을 보았다고 한다. “태양의 창조 같은 대서사적인 것과 연인의 속삭임처럼 내밀한 것, 이 두 가지 모두를 영화에 담고 싶었다.” 실제로 클로이 자오는 케빈 파이기 앞에서 처음으로 <이터널스> 프레젠 테이션을 할 때 거대하게 확대한 한알의 모래 사진과 앞선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인용해 영화의 비전을 설명했다. 감독은 전작 <노매드 랜드>에서 셰익스피어의 시 <소네트 18번>을 이용해 사랑의 영원성과 무한의 세계를 얘기한 바 있고, 연인간의 사랑과 멤버들 사이 마음의 연결(유니 마인드)은 <이터널스>에서도 중요한 주제로 다뤄진다. 영화의 후반부쯤 되면,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한알의 모래에 불과할지도 모를 인간의 삶을 놓고 신들이 벌이는 원탁회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회의에 상정된 안건의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그들만의 회의에 인간이 낄 자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면 거리감이 생긴 다. 그런데 불멸의 히어로이면서 영원의 시간을 포기하고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스프라이트의 이야기에 접속하면 그 거리감이 좁혀진다.

<이터널스>라는 거대한 세계에서도 정작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모래 한알의 세계가 아닌가 싶다. <이터널스>는 아름다운 비전과 의미를 가지고 탄생한 작품이다. 또한 MCU의 지향을 확인시켜준 작품이다. 다만 아직은 <이터널스>라는 원석을 제대로 광내지 못한 느낌이다. 의미와 재미의 공존은 숙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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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