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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도서 <은밀한 결정>
김송희(자유기고가) 사진 오계옥 2021-11-16

오가와 요코 지음 /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펴냄

‘나’는 소설을 써서 생계를 유지한다. 그가 쓴 세권의 소설에는 모두 무언가를 잃는 사람이 등장한다. ‘나’가 사는 세계에서는 매일 무언가 하나씩 소멸, 삭제된다. 어느 날은 상자를 묶는 리본이, 어느 날은 새가, 다음에는 장미가, 어느 날에는 향수가 사라진다. 물건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억과 그것을 칭하던 단어까지 삭제된다. 의식적으로 ‘그것’을 기억하려 노력하는 사람들은 비밀경찰에게 강제로 연행되어 어디론가 끌려간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작가 오가와 요코의 소설 <은밀한 결정>의 내용이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박사가 사고 후 기억하는 기능을 잃어버리듯 <은밀한 결정>의 사람들도 기억을 강제로 빼앗긴다. 모두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홀로 추억하는 사람은 과연 행복할까? 은둔하며 사물을 기억하는 ‘나’의 엄마는 향수 냄새를 기억하고, 단어를 잃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다. “엄마는 사라진 것들을 왜 그렇게 잘 기억해요?”라고 묻는 딸에게 엄마는 슬프게 답한다. “모르겠어. 왜 엄마만 아무것도 잃지 않는지.” 후일에 ‘나’의 동료인 R이 대신 답한다 “나는 알아. 에메랄드가 얼마나 아름답고, 향수가 얼마나 향기로운지. 내 마음에서는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거든.”

<은밀한 결정>은 오가와 요코가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발표하기 이전, 94년에 쓴 장편소설이다. 소설에서는 ‘나’가 따뜻한 스튜에 빵을 적시고, 홍차에 벌꿀을 넣는 모습을 천천히 묘사한다. 오가와 요코가 천착해왔던 것이 언어와 소통이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이것은 어쩌면 글쓰기에 대한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쓰는 주인공에게 할아버지는 ‘소설’이라는 말을 신중하고 소중하게 발음한다. 언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2016)에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세상에서 영화가 사라지자 주인공은 영화만 잃는 게 아니라 같이 영화를 보던 친구마저 잃는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새로운 소멸이 찾아온다, 는 문장에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노화로 인해 언어를 잃고 아무것도 쓰지 못하게 되는 일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한다. 그만큼 신중하게, 잃고 싶지 않은 단어들을 배를 엮듯 묶어낸 소설이다.

강낭콩이 사라졌다

어릴 적에 ‘강낭콩’이 듬뿍 들어간 샐러드를 좋아했다. 감자, 삶은 달걀, 토마토와 함께 마요네즈로 버무리고 파슬리를 뿌린 샐러드다. 어머니는 이동 마켓 아저씨에게 자주 이렇게 물어보았다. “신선한 강낭콩 있어요? 뽀득뽀득 소리가 날 만큼 신선한 거요.” ‘강낭콩’ 샐러드를 못 먹은 지도 꽤 오래됐다. 강낭콩의 모양과 색깔, 맛을 이제는 떠올릴 수 없다.(58~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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