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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에반 핸슨' ‘좋아요’
남선우 2021-11-26

2020년 6월 마지막 토요일, 달뜬 마음으로 귀가 후 한숨도 못 잤다. 7년 만에 돌아온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월드투어 프로덕션의 서울 공연을 만끽한 밤이었다. 두달 전 앙상블 배우 중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와 잠시 중단했다 재개한, 입장 전 서너 차례의 체온 검사와 문진표 작성 후 관람한 공연은 걱정을 잊게 할 정도로 황홀했다. 여운을 안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TV를 틀었다. 유튜브를 연결해 본 클립은 조엘 슈마허의 영화 <오페라의 유령> 속 지하 호수 신. 무대에 오를 순 없었던 촛대 행렬과 깊은 물길을 보며, 영화가 잘하는 게 무엇인지 확인한 동시에 노래로 모든 걸 이해시킨 뮤지컬의 설득력을 되새겼다. 이어서 각국의 크리스틴과 팬텀을 차례로 소환해준 알고리즘은 슬슬 다른 작품들로 엄지를 잡아끌었다. 일레인 페이지가 부른 <Memory>(<캣츠>)를 듣고, <Defying Gravity>(<위키드>)를 옥주현과 손승연 버전으로 감상한 뒤, 뮤지컬 서바이벌 참가자들의 경연까지 훑으니 아침이 왔다. ‘뮤지컬의 유령’에 제대로 홀렸다.

<디어 에반 핸슨> ‘좋아요’

유명세만 익히 알고 있었던 브로드웨이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의 넘버를 처음 들은 것도 그때다. 엄밀히 말하면 <더블 캐스팅>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뮤지컬 배우 나현우가 <Waving Through A Window>를 직접 한국어로 번안한 무대 영상을 본 것이다. 그 덕에 찬찬히 읽게 된 <디어 에반 핸슨>의 스토리는 지난 11월17일 개봉한 동명의 영화 버전으로도 충실히 옮겨졌다.감독이 <월플라워> <원더>를 연출한 스티븐 크보스키라는 점에서 예상할 수 있듯 <디어 에반 핸슨>은 마음에 구멍이 난 청소년과 그들의 가족에게 안부를 묻는 극이다. 주인공 에반 핸슨(벤 플랫)은 우울증과 불안 증세를 가진 고등학생. 깁스에 사인해줄 친구도 없는 에반은 의사에게 받은 ‘나에게 편지쓰기’ 과제를 하며 자신의 친구가 되려 한다. 우연찮게 엮인 코너(콜튼 라이언)가 에반의 팔에 사인을 남기고, 에반이 쓴 편지까지 손에 넣은 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부터 이야기는 달라진다. 코너의 가족은 에반이 코너의 절친이었을 것이라 짐작해버리고 에반을 새로운 가족 구성원처럼 대해주기 때문이다. 홀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상에 지친 에반은 하얀 거짓말로 유가족의 마음을 달랜다.

<디어 에반 핸슨>은 죽음, 그것도 자살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유대를 몇 가지 유형으로 보여준다. 그 갈래는 그들의 소셜미디어 활용 유형과도 궤를 같이한다. 코너를 피했던 동급생들은 그의 사물함 앞에서 셀피를 찍고 인스타그램에 올리며 간략한 인사를 남긴다. 진짜로 죽고 싶어본 적이 있는 에반에게는 그들의 ‘좋아요’가 허탈하다. 이 감정은 에반의 고독과 합쳐져 실제 에반이 코너와 스친 짧은 시간을 뛰어넘어버린다. 에반이 코너와 주고받은 이메일 내용을 꾸며내 유가족에게 나누기까지, 허구로 치유받은 이에는 에반 자신도 포함된다. 솟구치는 피를 닦느라 총알을 빼지 못하는 이들을 대신해 또 다른 추모 작업을 시도하는 건 학생회장 알리나(어맨들라 스텐버그). 모범생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역시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기에, 알리나는 SNS를 적극적으로 사용해 자살 청소년의 이야기를 재맥락화한다.

영화가 그들 각자의 노래로 회한을 전하는 동안 코너 개인에 대해 전하는 정보는 거의 없다. 코너로 인해 이어진 선들 사이에서 코너만이 미처 연결되지 못한 점으로만 박제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에반은 사건이 일단락되고서야 코너 머피라는 한 인간에 대해 알아가는데, 마치 <디어 에반 핸슨>의 서사 자체가 철저히 대상화한 캐릭터를 뒤늦게 챙겨보려는 제스처로 보였달까. 어쩌면 <디어 에반 핸슨>은 외롭게 남겨진 이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골라 해주느라 진짜 떠나가버린 사람의 기억은 왜곡하거나 제거해버리는 방향을 택했다.하지만 뮤지컬이라는 형식, 그걸 강한 사운드로 담아낸 극장이라는 공간이 가진 힘은 실로 대단해서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눈물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극을 대표하는 넘버 <You Will Be Found>가 흘러나오며 화면에 수천개의 얼굴이 떠오를 땐 객석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 때면 항복하는 편이 좋다. <디어 에반 핸슨>이 체화해버린 MZ 세대의 추모 방식은 서툴지언정 그 안에 섞인 마음은 진심이라고. 나도 사라져버리지 않게 지켜봐달라는 아이들의 당부일지 모른다고. 영화의 외침은 모른 척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기에, 나도 댓글 없이 ‘좋아요’만 꾹 눌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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