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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자신의 진심을 직시하는 순간, 히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
임수연 2021-12-22

“진실로 타인이 보고 싶으면 자기 자신을 깊이 똑바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섹스를 하며 이야기를 만드는 예술가 부부가 있다. 각본가 오토(기리시마 레이카)가 오르가슴을 향해 갈 때 떠오르는 직관으로 스토리를 이어가면, 배우 겸 연출가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아내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이야기를 받아준다. 그러나 가후쿠가 아내의 외도 현장을 우연히 목격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가후쿠가 전처럼 오토의 창작을 받아주지도, 그렇다고 불륜의 이유를 직접 묻지도 못하는 어색한 날이 이어진다. 그리고 집을 나서는 남편에게 오늘 저녁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다고 당부했던 오토는, 자신의 말을 전하기 전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2년 뒤 영화의 무대는 히로시마로 옮겨간다. 지역의 예술문화극장에서 기획한 연극제의 연출직을 제안받은 가후쿠는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다양한 언어로 표현하는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언제나처럼 운전하는 자동차 안에서 생전 아내가 직접 녹음한 대본을 들으며 희곡 전체를 확인하려던 가후쿠는 상주 예술가는 반드시 드라이버를 고용해야 한다는 룰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당황한다. 하지만 연극제측이 추천한 운전사 미사키(미우라 도코)가 가후쿠의 행동을 의식하지 않고 주행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 그를 드라이버로 수락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중심 공간은 크게 두 가지다. 붉은 SAAB 900 자동차 내부 그리고 <바냐 아저씨> 공연을 준비하는 연극인들의 장소다. 먼저 내부 공간은 한정적이지만 외부적으로는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동차의 속성은 ‘소통’을 다루는 정교한 미학적 도구로 승화된다. 인물이 대화를 나누지 않는 장면에서도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창밖의 풍경, 자동차의 엔진음과 리듬 그리고 찰나의 눈길이 절제된 촬영을 통해 관계와 감정의 미묘한 파고를 담아낸다. 동일본 대지진에 관한 다큐멘터리 <파도의 소리>를 만들기 위해 일본을 가로지르며 자동차 안에서 아주 많은 시간을 보냈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이 공간에서 정말 다양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자동차를 담는 방식에 영감을 받아 <드라이브 마이 카>를 구체화했다고 전한다.

<친밀함> <해피 아워>, 최근의 <우연과 상상>에 이르기까지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에는 연극이나 소설 낭독의 형태로 장문의 텍스트를 읽는 신이 매우 길게 등장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그의 작품이 문학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고 이해하는 이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서 말은 발화 주체 및 객체와의 관계 속에서 감정이 우연적으로 새어나오는 매개의 역할을 하며 그 자체로 어떤 텍스트를 전달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극중 대사처럼 “너무 세세하기 때문에 전해지지 않는 것”이 있고, 한국 수어를 사용하는 캐릭터의 말대로 “소리를 듣고 상대를 보는 것이 말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후쿠가 감정을 싣지 않고 대사를 다양하게 반복해서 읽도록 지시하는 것은 실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배우들에게 요구하는 대본 리딩 방식이기도 하다. 배우가 텍스트와 최대한 친밀해지고 상대의 소리에 집중하며 미리 상황에 대비한 연기를 하지 않았을 때 촉발되는 우연적 순간은 <열정> 이후 하마구치 류스케의 세계를 설명하는 중핵이다.

어떤 도로를 만나도 안정적이라 자동차를 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드는 미사키의 온화한 운전처럼,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인물들이 자신의 진심을 직시하는 순간을 향해 가만하게 달려간다. 가후쿠가 시신경 장애로 시야가 점점 좁아지는 녹내장을 앓고 있는 것은 그가 현실에서도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있음을 암시한다. 심연에 감추었던 죄의식과 상실감을 비로소 마주하게 이끄는 동력은 결국 타인와의 관계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보기 위해 자신의 내면을 봐야 하는 것처럼, 스스로의 감정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소통해야 한다.

CHECK POINT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소설

<드라이브 마이 카>는 2014년 국내에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동명의 단편소설을 각색한 영화다. <드라이브 마이 카> 외에도 정사 후 전생에 ‘칠성장어’였던 여고생 이야기를 <아라비안나이트>처럼 전해주는 <셰에라자드>, 아내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기노> 등의 일부 설정이 영화에 녹아 있다.

다국적 언어

극중 가후쿠는 여러 언어를 함께 쓰는 독특한 연출법을 구사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일본어, 한국어, 영어, 만다린어, 타갈로그어, 인도네시아어, 독일어, 말레이시아어, 광둥어 그리고 한국 수어가 등장한다. 이 설정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상대의 말을 충분히 듣고 신체 언어를 관찰함으로써 전달받을 수 있는 감정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국적 언어에 관한 아이디어는 어렸을 때 미국에서 살았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다양한 모국어를 가진 사람과 소통했던 경험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가후쿠와 배우들이 <바냐 아저씨> 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은 필름 메이킹의 메타포로서도 기능한다. 감독과 배우, 배우와 연기, 예술가와 텍스트의 관계가 연극을 준비하는 모습에 반영된다. 가후쿠와 미사키의 관계는 <바냐 아저씨> 속 바냐와 소냐의 그것과 겹치고, 절망을 극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라카미 하루키뿐만 아니라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도 함께 원작으로 삼은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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