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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현 편집장] 편집장은 처음이라
이주현 2022-01-21

본래의 인격과 직업적 인격 사이 좁혀지지 않는 거리를 전지적 시점으로 인식할 때가 있다. <씨네21>에 입사할 운명이라 핸드폰 뒷번호도 ‘21’로 끝난다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했던 적도 있지만, 가끔은 영화기자로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영화기자를 연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박식한 척, 유능한 척, 영화와 연애하는 척 가면을 꺼내 쓰는 느낌. 확실히 메소드 배우과는 아닌가보다. 어쨌든 13년간 이 역할을 놓지 않았던 건 영화기자이기에 누릴 수 있었던 아름다운 순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연말엔 이것이 영화기자로서의 마지막 화양연화인가 싶은 순간들을 경험했는데, 그중 하나는 꼭 한번 만나고 싶었던 배우 조승우를 전화로 인터뷰하며 그의 느긋하고 나긋한 목소리에 취했던 것이고 또 하나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개봉을 앞두고 국내에선 유일하게 스티븐 스필버그와 일대일 전화 인터뷰를 하는 영광을 누린 것이다.

최근 편집장이라는 새로운 배역을 맡았다. 편집장은 처음이라, 이 역할은 또 어떻게 내 것으로 소화해야 하나 걱정이 태산이다.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버전의 에디토리얼을 썼다 지우는 동안 나날의 근심은 어깨 통증과 입안 염증으로 번졌다. 역할의 무게가 심상치 않다.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모방이란 생각에 전임 편집장들의 글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지금은 울타리가 무너진, 안팎의 경계가 없는, 게다가 매체 산업의 지형과 성질 자체가 끊임없이 바뀌면서 어디까지가 영화잡지 시장이고 누가 경쟁 상대인지 종잡을 수 없는 시장이다.”(조선희 전 편집장) “영화의 존재가치에 대한 질문이 오늘의 많은 독자와 관객에게도 여전히 중요한가. 그것이 <씨네21>을 만드는 사람들을 지금도 앞으로도 괴롭힐 것이다.”(허문영 전 편집장) 영화계의 심상치 않은 지형 변화 속 영화잡지의 미래를 근심하는 내용이 마치 지금의 상황을 거울에 비춘 듯하지만, 이 글들은 2013년 4월 <씨네21> 창간호 특집 기사에서 발췌한 것이다.

<씨네21>의 발행인이 된 장영엽 전 편집장이 며칠 전 내게 말했다. “만들고 싶은 잡지를 원없이 만들어보라”고. 고맙고도 무서운 얘기였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건 나도 알고 스파이더맨도 아는 얘기니까. 원하는 건 많다. 사람들이 매주 <씨네21>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으면 좋겠고, 영화광들이 열광하는 영화잡지가 되었으면 좋겠고, 영화인들이 편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매체였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도록 변화의 시동을 걸 셈이다. 당장의 변화는 디지털콘텐츠본부의 신설이다. 김성훈 취재팀장이 디지털콘텐츠본부장을 맡아 배동미, 남선우 기자와 함께 재밌는 시도들을 할 계획이다.

어쩌다 설 합본 특대호로 편집장 데뷔를 하게 됐는데, 우선은 두툼한 설 합본호가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다. 모두 맛있는 떡국 드시고, 다시 한번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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