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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의 한복판에서 우크라이나 카테리나 고르노스타이 감독이 써내려간 일기
송경원 2022-03-27

첫 폭발음을 들은 순간부터, 카메라를 켤 수 없었다

2월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세계가 변했다’는 상투적인 표현의 무게를 실감한다. 현재 전세계는 긴장 속에서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주시 중이다. 과거 이라크전이 미디어 중계를 통해 전쟁에 대한 전혀 다른 시각을 제공했다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여기에 구체성과 속도를 더했다. 전황이 실시간으로 중계될 뿐 아니라 치열한 전투 현장부터 화마가 할퀴고 간 상흔, 사람들의 얼굴까지 다양한 관점의 정보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실시간 정보에 대한 피드백도 빠르다. 전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경로로 우크라이나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전쟁의 현실을 목격함으로써, 이것이 비단 낯선 땅에서 벌어지는 남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임을 실감한다. 안방에서 세계가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기묘한 감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정보들의 총합이 우크라이나 전쟁이라고할 순 없다. 우리는 여전히, 어쩌면 영원히 이 전쟁을 형용할 말을 찾지 못할 것이다. 겨우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시간들이 빨리 지나가고 전쟁이 종식되길 바라며, 여기도 당신의 편이 있다고 신호를 보내는 정도. <씨네21>에서는 우크라이나 감독들에게 근황을 묻는 편지를 띄웠다. 그리고 키이우에 거주 중인 카테리나 고르노스타이 감독으로부터 한통의 답장이 돌아왔다.

1989년 우크라이나 루츠크에서 태어난 카테리나 고르노스타이 감독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넘나들며 예리한 통찰과 섬세한 감각을 선보인 젊은 작가다. 마리나 라즈베즈키나와 미하일 우가로프의 다큐멘터리 영화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2021년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2021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 장편 극영화 <스톱-젬리아>를 통해 한국 관객과 만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의 고등학교 졸업반을 배경으로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불안을 그린 이 작품은 섬세하고 디테일한 감성의 포착이 돋보인다. ‘나’를 찾기 위한 자잘한 흔들림조차 놓치지 않던 감독의 예민한 촉수가 전쟁이라는 어마어마한 소음 속에 노출되었을 때 어떤 상태에 내몰릴지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시각 정보는, 그것이 아무리 상세하다 해도 일부에 불과하다. 전쟁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은 것들의 흔적을 훨씬 많이 남길 것이다. 감히 전쟁을 말할 단어를 여전히 찾지 못했지만, 이 글 속에는 차마 지워지지 않을 얼룩들이 묻어 있다고 믿는다. 카테리나 고르노스타이 감독이 보내온 일기를 통해 그 편린이라도 전달되길 간절히 바라며 여러분에게 이 글을 전한다.

PS.카테리나 고르노스타이 감독은 이 글로 원고료를 받을 수 없다며, 대신 우크라이나에 대한 인도적인 지원에 보태주길 소망했다. 그가 원한 건 이 글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우리의 희망도 같다. 이 혼란스럽고 막막하면서도, 단단하고 결연한 마음이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퍼져나가길 바란다.

우크라이나=글 카테리나 고르노스타이 영화감독·사진제공 전주국제영화제

2월26일 키이우-흘레바카(키이우 지역)

2월23일, 늦게까지 뉴스를 보았다. 연이은 침공에 대한 소식에 새벽 3시가 다 되어서야 불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고, 꿈을 꾸었다. 꿈에서 나는 알 수 없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 잠에서 깨어, 수화기 너머로 “폭탄 주의보입니다.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라는 경고를 들었다.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창이 동쪽으로 나 있는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전화를 받고 바라본 바깥은 아직도 어두웠다. 창이 서쪽으로 나 있는 반대편 방으로 이동하는데 동이 트기 시작했다. 그때, 집 위로 로켓이 날아갔다. 하지만 맞지는 않았다. 표적 없는 로켓이 집 위를 지나치는 것을 보며 그렇게 나는 꿈에서 깼다.

아직 어두운 새벽 5시, 우리는 폭격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다시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잤다’고 표현하기는 어렵다. 매트리스와 침낭을 옮겨둔 복도에서 잠시 고개를 꾸벅이며 졸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포격을 당할 경우 창문이 없는 복도가 제일 안전할 것 같아서 그곳에 숨어 있었다.

다음날, 도심부는 텅텅 비어 있었다. 사이렌 소리를 뒤로하고 개와 아침 산책을 하는 용감한 몇몇만이 눈에 띄었다. 침공이 시작된 날은 내가 고양이를 병원에 데려가기로 했던 날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심장과 신장이 약하고, 호흡에도 문제가 있어 남은 일생 약을 먹어야 하는 내 고양이는 더이상 내가 손을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이미 죽음의 문턱에 있다. 도시를 떠나면서 자신의 차나 피난처에 건강한 반려동물을 데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속으로 질투했고, 바로 후회했다. 이러한 시기에 그런 생각을 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어제 키이우 도심에서 20km 떨어진 흘레바카에 위치한 어머니의 집으로 이동했다. 고양이도 우리가 고향으로 간다는 것을 알았는지 가는 길 내내 얌전히 호기심 어린 눈길로 주변을 관찰했다. 8년 전, 흘레바카의 집 근처에서 발견된 이후 고양이는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해에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침공하여 돈바스 전쟁이 시작되었다(더는 그 나라의 이름을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 (카테리나 고르노스타이 감독은 이후 러시아의 R을 소문자로 표기했는데, 여기서는 느낌을 살리고자 러시아를 ‘그 나라’로 의역하여 표기했다.-편집자)

어머니의 집에 도착한 후 이틀간의 날 선 경계 끝에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드디어 잠을 잘 수 있었다. 잠을 자는 것이 최근의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같았다.

3월1일 흘레바카

나는 요즘 내내 울지 못했다. 오늘은 봄의 첫날이자, 전쟁이 시작된 지 6일째인 월요일, 아니 화요일이다.

토요일에 키이우를 떠날 때만 해도 지금쯤이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수일이 지나고, 오늘은 내 아름다운 실내 정원의 어떤 식물들이 죽어 있을지 상상한다. 어제쯤 공작고사리가 죽었을 것 같다. 오늘은 화분이 작아 물을 얼마 머금고 있지 못하는 바이올렛들이 말라죽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조차 부끄러운 일인 걸 알고 있다. 어제와 오늘 그 나라는 다연장로켓포인 BM-21그래드로 키이우를 포격하고 키이우 인근 아크튀르카에 끔찍한 진공 폭탄을 사용했다. 민간인에게 해당 무기들을 사용하는 것은 비인도적인 행위일진대 그 나라에서는 아닌가보다. 북(Buk) 미사일 시스템과 그래드의 차이, 대전차 미사일(NLAW) 또는 재블린(Javelin)이 무엇인지 등을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제는 그 차이뿐만 아니라 원리까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3월6일 흘레바카

매일 조금씩 항복을 외치듯 내 신경이 쇠약해지고 있다. 감정 기복도 심한 편이다. 마카립, 보로디얀카, 이르핀, 부차가 공격당하거나 바실키프(군 기지가 있는 인근의 가장 큰 도시)가 점령당할까 그 걱정에 오늘도 잠을 잘 자지 못해서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들은 키이우를 포위하고자 하고, 우리는 그 길목에 있다. 이제 눈을 감고도 우크라이나의 지도를 그릴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이처럼 지리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던 것 같다. 병적일 지경이다. 뉴스를 볼 때마다 지도를 찾아보곤 하는데, 점점 새로운 소식이 줄고 있다. 작전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 것이 국군의 전략이라고 한다. 이전에는 폭발음이 들리면 어디서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지 알수 있었지만, 이제는 정체불명의 폭격 소리만이 들려온다.

외국에 있는 동료들에게서 많은 연락을 받았다. 뮌헨, 베를린, 바르샤바 등 여러 국가에서 동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더 안전할 수 있다는 우크라이나 서쪽의 르비브, 테르노필, 또는 체르니우치 등지에도 가고 싶지 않다.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다시 내 집이 있는 키이우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어디에서도 알려주지 않기에, 나도 적어 내리기가 제법 불편한 그런 일을 겪고 있다. 24일 오전에 도시에 폭격이 시작되자마자 뱃속이 울렁거리면서 온몸에 힘이 쭉 빠져 실수하지 않기 위해 화장실로 달려가야 했다. 그리고 이후로도 긴장감이 높아지는 상황들에서 같은 느낌을 여러 번 받았다. 그들의 미사일로 인해 바실키우의 석유 저장고가 폭발했을 때도 그중 하나였다. 석유 저장고가 집에서 5km 떨어진 지점에 있었기에 그 불이 하늘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그 연기는 그다음 날까지 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리고 길 건너 인근 마을의 집들 위로 대공 폭탄이 쏟아지는 것을 창문 너머로 직접 목격했을 때, 죽음의 로또이자 절대적인 우연의 일치로 죽음을 피해간 그날도 그런 느낌이었다. 그들의 “군사 시설만 폭격한다”는 주장은 절대 거짓말이다. 우리가 직접 두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사실이다. 그날 대공 폭탄이 폭격한 자리에는 건물 하나 없이 땅에 구덩이만이 남아 있다. 벽돌, 나무, 콘크리트 등 무생물과 고철로 가득한 우리의 땅이 상상된다. 폭격으로 인해 불구가 된 시체들에 대한 생각은 애써 피한다. 그러면서 역설적이게도 그 나라 군인들의 시체가 나오면 유심히 살피게 된다.

<스톱-젬리아>

3월7일 흘레바카

12일 만에 처음으로 울음을 터트렸다. 나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눈물이었다. 4시간밖에 못 자서 그런가? 꽤 먼 거리에서 선명하게 나는 폭발 소리에 새벽 6시에 잠에서 깼다. 그리고 점점 커지는 끝이 없는 우르릉거리는 소리, 어쩌면 다연장로켓 발사 시스템일 수 있는 그런 소리도 들려왔다. 내 사랑하는 남편 니콘은 소음에도 불구하고 잠에서 깨지 않았는데,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폭음이 들려올 때마다 심장이 경주하듯 빠르게 뛰기 시작했지만, 내 호흡은 변함없이 차분했다.

뉴스를 통해 접하는 도시들의 파괴 소식이 점점 견디기 어려워지고 있다. 정신적 자원이 고갈되고 있나보다. 그런데도 거의 24시간 내내 뉴스를 붙들고 있다. 항상 켜두는 TV에서 아침에는 방공호로 사용되고 있는 하르키우의 지하철역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주인공은 두 어린아이를 보살피는 창백한 어린 소녀로, 자신의 방 물건의 반절을 방공호로 이미 끌고 온 모습이었다. 매트리스들과 침낭, 그리고 아이 포대기용 탁자 등이 보였다. 그 순간 12일 내내 그랬던 것처럼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숨 가쁜 흐느낌과 함께 히스테리 상태가 찾아왔다. 진정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아픈 고양이를 껴안고 맑은 공기와 봄눈이 쌓인 정원의 끝자락으로 향했다.

최근 3일간 스트레스 장애 중 가장 심각한 단계라고도 하는 우울증에 사로잡혀버렸다. 키이우 외곽에 위치하고 있는 만큼, 전략적으로도 뉴스를 계속 보는 것이 중요했고, 할 수 있는 것도 그것뿐이었기에 뉴스만 계속 봤다. 키이우의 서쪽과 북쪽에는 이미 인도주의적 재앙이 닥쳤다. 평화롭던교외 마을들이 그 나라의 점령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중 부차는 내가 부모님과 키이우로 이사하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도시다. 우리는 빨간 별을 달고 있는 오래된 녹색 기관차가 있는 작은 기차역 근처에 살았었는데, 그곳은 이제 내가 너무나도 싫어했던 유치원조차 흔적이나 남아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키이우를 떠날 때 우리의 가장 소중한 귀중품인 영상 파일이 보관된 하드 드라이브들을 별도의 배낭에 모아 보관했다. 그 하드 드라이브에는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 당시의 기록을 포함한 수많은 사진과 영상이 담겨 있다. 당시 니콘과 나는 그 혁명 사건들을 기록하여 각자 영화를 만들었다. 나는 광장에 서서 역사의 한 장면이 될 사건을 기록하며 당시 나의 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굉장히 힘들었고, 일종의 직업 적성 검사도 된 경험이었는데, 그 검사를 잘 통과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광장에서 펼쳐지는 투쟁과 죽음에 나는 겁에 질렸었고, 사건의 참가자를 찍기보다는 후방에서 목격자와 지지자들을 영상에 담으며 촬영을 진행했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당시에 나는 훌륭한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 되기에 내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2월24일 첫 폭발음을 들은 순간부터 그 어떤 촬영도 할 생각을 못했다. 니콘이 자동적으로 귀중품, 돈, 그리고 우리의 영상 장비를 피난 가방에 챙겨왔지만, 나는 카메라를 켜지 못했다. 사진 촬영에 대한 근거 없는 두려움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현실을 영상에 담는 순간, 그것이 현실과 작별을 고하는 인사이자 마지막 영상이 될 수 있다는 공포에 카메라를 일부러 피하게 됐다. 그래서 각 사건을 머릿속에만 담았다. 니콘이 침착하게 짐을 싸는 동안 해가 얼마나 느리게 떴는지, 여러 친구가 새벽 6시부터 다양한 채팅 채널로 뭐라고 연락을 보냈는지, 침공 5시간 후 억지로 아침을 입에 욱여넣던 기분이 어땠는지 등이 기억난다. 아침으로 시르니키를 만들었지만, 입에 무언가를 넣는 것 자체가 힘들어서 말 그대로 억지로 입에 밥을 밀어넣었다(그 이후로도 며칠 동안 계속 밥을 억지로 먹었던 기억이 있다). 또 까마귀가 베란다로 날아와 고양이의 밥을 노렸지만, 고양이는 아파서 식사를 이미 거부했던 것도 기억한다. 그 상황에 누가 그 까마귀의 밥을 신경 쓸까.

얼마 전에 니콘과 함께 중형 판형 필름 촬영을 위해 70년대에 출시된일본 야시카사의 중고 카메라를 구입했다. 집을 떠나기 전날 카메라에 컬러 필름을 새로 갈아넣고 고양이 살아생전에 가족사진을 찍을 계획을 세웠다. 우리 아파트에서, 내가 기른 열대식물이 가득한 실내 정원을 배경으로 고양이와 사진을 찍을 생각이었고, 맑은 날 사진을 찍고 싶었기에 그날 찍지 않기로 결정했다. 평화가 지속된 마지막 날이었던 그날 외의 모든 날이 맑을 예정이었기에 그날 사진을 찍지 않았을 뿐이었다. 새로운 필름까지 갈아 끼운 그 카메라가 지금 내 옆에 있지만, 이제 더는 뭘 찍어야 할지 모르겠다. 남편은 전쟁을 피해 우리 집에 숨어 있는 모든 사람- 니콘과 내 고양이, 니콘의 어머니, 내 어머니, 어머니의 친구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그녀의 대학 동기 타냐와 최근 뇌졸중을 겪은 타냐의 남편과 함께 사진을 찍는 것은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참고로 타냐는 흘레바카로부터 10km 떨어져 있는 도시이자 군인들이 자국 부대와 군사 비행장을 방어하고 있는 바실키프에서 왔다. 이런 군사 시설은 수도로 향하는 적군의 첫 번째 목표가 되는데, 어쨌든 그곳에서 군사 기지뿐만 아니라 타냐의 집도 함께 폭격을 당했다.

니콘은 우리가 머물고 있는 집 앞에서 가족사진을 찍으면 어떨까 제안했는데, 우리 부부 모두 그건 너무 무섭다고 결정했다. 파괴된 집 속의 잔해에서 누군가가 그 카메라에 담긴 필름을, 그러니까 7명의 사람들과 한 마리의 고양이의 마지막 일생이 담긴 증거를 발견하는 상상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쟁이 끝난 후에나 사진을 찍자고 서로 농담 섞인 말을 건넸다.

3월8일 흘레바카–키이우

길이 막히지 않는 아침 일찍 길을 나서기로 했다. 귀가하는 날 아침, 바닥에는 눈과 서리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봄에 키이우를 떠나 겨울에 귀향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돌아가는 길, 거의 모든 검문소에서 군인들이 튤립을 건넸다. 오늘이 국제 여성의 날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잠시 키이우에 머무르다 다시 더 서쪽으로 이동해야 할 수도 있지만, 고향에 들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사이렌 소리가 주기적으로 울리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은 평온해졌다. 키이우는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는 요새와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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