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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불온해서 정확한 어떤 연결에 대하여 '사랑 후의 두 여자'
김소미 2022-03-30

공유될 수 없는 슬픔의 형상은 놀랍도록 얌전하고 고요하다. 그러나 바다 위에 얼어붙은 빙하가 일순 부서져내리는 것처럼, 슬픔 역시 종종 마음 깊은 곳에서 굉음을 내며 우리를 집어삼킨다. <사랑 후의 두 여자>에서 남편을 잃고 그의 외도 사실까지 알게 된 메리(요안나 스찬란)는 그렇게 난폭한 침묵의 시간에 잠겨 있다. 영국계 백인 이슬람교도인 메리는 급사한 남편 아흐메드의 장례를 마친 다음날, 휴대전화 기록을 통해 아흐메드에게 아주 오래된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도버에서는 영국인 메리와 다정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칼레에서는 프랑스인 주느비에브(나탈리 리샤르)와 동거한 것이다. 파키스탄인인 아흐메드의 신앙을 따라 종교를 개종하고 어느덧 “히잡을 쓰지 않은 날보다 쓴 날이 더 많은” 메리의 삶은 이토록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 뒤에도 짐짓 어제와 같이 흘러간다. 메리는 분노하고 기절하는 대신 단정히 몸을 씻고 기도를 올린 다음 여행 가방을 들고 칼레로 떠난다. 14살에 처음 사랑에 빠져, 서로 만날 수 없을 땐 밤하늘에 뜬 달을 함께 바라보고 있다는 순진무구한 믿음으로 견뎠던 평생의 사랑. 그 사랑이 반쪽짜리였대도 주저앉지 않을 만큼 강한 여자가 자기 두눈으로 기어코 확인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주느비에브는 집 앞에 나타난 히잡 쓴 여인을 대뜸 청소 도우미로 착각해 집에 들인다. 메리 역시 이를 받아들이고 한동안 자기 정체를 숨긴 채 주니비에브와 아들 솔로몬의 삶을 훔쳐보기로 한다.

피 흘리는 진실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것과 아예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것. 둘 중 무엇이 더 고통스러울지 따지는 것은 무용한 일일 테다. <사랑 후의 두 여자>의 메리는 진실을 샅샅이 음미하는 길을, 주느비에브는 아무것도 묻거나 알지 않는 길을 택했고 둘은 결국 같은 종착지에서 만난다. 메리는 남편을 따라 개종했지만 정작 아흐메드보다도 종교적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남편에 대한 절대적 사랑과 신에게 올리는 기도로 채워졌던 매일이 열정과 절제를 모두 필요로 했음을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런 적극적 금욕의 태도는 메리로 하여금 우선 자기 바깥에 존재하는 현상의 실체에 몰두하도록 만든다. 메리는 남편이 사랑한 여자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알고자 하는데, 영화는 이 선택에서 단순한 관음적 충동이나 호기심 이상의 동기를 읽어내게 만든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만한 순간에도 감정을 억누른 채 주느비에브의 집을 청소하는 메리의 모습은 그가 매일 복장을 갖추고 신에게 무릎 꿇는 의식과 겹친다.

인물들이 처한 전제와 아이러니를 강력하게 설정하고 이를 전개하는 시공간을 미니멀하게 집약한 덕분에 영화는 놀랍게도 매우 적은 사건과 인물, 최소의 기능을 수행하는 대사만을 가지고도 요동치는 감정의 파노라마를 펼쳐낸다. 어떤 내면은 타인의 얄팍한 위로가 침범할 틈도 없이 빽빽하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걸 영화가 관객에게 설득시키려면 고도의 표현법이 필요하다. 아직 우리에게 낯선 배우인 요안나 스찬란은 특유의 소심하고 고집스러운 입매를 자주 움찔거리면서 메리라는 인물을 때로는 영웅처럼, 때로는 나약한 인간처럼 묘사한다. 티끌을 조각해 태산의 마음을 펼치는 연기다.

붕괴 직전의 정신을 시적인 이미지로 승화해 보여주는 장면들도 인상적이다. 백악 절벽이 눈앞에서 부서지거나, 메리가 남몰래 잠입한 주느비에브의 침실 천장이 무너져내리는 환상적 순간을 예로 들 만하다. 자전적 경험에서 시나리오를 출발한 파키스탄계 영국인 알림 칸 감독은 감정의 온도를 섣불리 높이거나 서정적인 풍경을 남발하는 대신, 내면적 긴장과 조응하는 시각적 장치를 적절하게 풀어젖힌다. 콘트라스트와 공간의 깊이를 적절히 활용한 촬영 또한 대사 없이 인물의 사소한 반향을 따라가는 영화에 몰입감을 부여했다. 복구되기 힘들 정도로 깊이 균열난 것 같았던 삶의 지대가 실은 아직도 얼마나 웅장하고 견고한지 되새기는 엔딩은 무척 아름답다.

CHECK POINT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BAFTA) 여우주연상 수상작

테살로니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에 이어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요안나 스찬란은 30대 중반까지 긴 무명 시절을 겪은 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천일의 스캔들> <튤립 피버> 등으로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사랑 후의 두 여자> 이전에는 독립영화 <핀 쿠션>(2017)에서 딸을 독점하길 원하는 왜곡된 모성애를 연기하며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신예감독, 알림 칸

파키스탄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알림 칸 감독은 남편을 위해 이슬람교로 개종해 새로운 삶에 적응해야 했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영화를 만들었다. “이슬람 여성들은 영화에서 일차원적이고 지엽적으로 묘사되곤 한다. 이 영화를 통해 내 어머니가 가진 아름다움과 복잡다양한 면을 형상화한 캐릭터를 그려보고 싶었다.”

단정하고 유려한 만듦새

<캐롤>에 참여했던 프로듀서 에바 예이츠가 제작을 진두지휘했다. <파워 오브 도그> <케빈에 대하여> <빌리 엘리어트> 등을 제작한 BBC필름의 지원을 받아 신예감독의 독립영화라기엔 안정적인 만듦새를 자랑하는데, 특히 영국 도버의 백악 절벽과 프랑스 해안도시 칼레의 한적한 분위기가 장면마다 담담히 스며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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