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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클로시 얀초 (Miklos Jancso)

1921-09-27

참여작품 평점평균

씨네21--

/

네티즌6.3

기본정보

  • 원어명Miklós Jancsó
  • 다른 이름미클로슈 얀초; 미클로스 얀크소
  • 직업감독
  • 생년월일1921-09-27
  • 사망2014-01-31
  • 성별

소개

대표작 <검거> <붉은 시편>

‘얀초의 나라’. 사람들은 헝가리 감독 미클로시 얀초의 영화를 그렇게 불렀다. 이제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영화, 어떤 이론으로도 정의하기 힘든 영화, 그러나 매혹적이고 장중한 영화였다. 얀초의 영화는 딱딱하게 굳어 있던 60년대 이후의 사회주의 현실주의 미학 강령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얀초의 영화는 영웅적인 노동자 혁명투사를 보여주지도 않고 알기 쉬운 줄거리로 된 것도 아니다. 얀초의 영화는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는 법이 없다. 개인보다는 집단의 행동과 움직임에 주목하는데, 인물들이 움직일 뿐만 아니라 카메라도 계속 움직이며 인물과 카메라의 이런 ‘움직임’이 얀초 영화의 핵심이었다. 한시도 인물이나 카메라가 정지해 있는 순간없이, 그 움직임은 <적과 백 Csillagosoak, Katon >(1967)에서처럼 이쪽 편과 저쪽 편을 가르고, <대결 F yes Szelek>에서처럼 한 집단 내부의 갈등을 표상하며, <붉은 시편 Meg k a N >(1972)에서처럼 집단의 연대감을 뜻하기도 한다. 지배, 피지배, 억압, 연대감 등을 왔다갔다하면서 얀초 영화의 카메라 움직임과 인물 동선은 역사의 움직임을 시각적으로 추상화시킨다. 영화로 만든 발레와도 같다. 그리고 저 초원 너머 지평선의 배경에는 항상 말들이 달리고 있다. 그러니 ‘얀초의 나라’라 부름직하지 않은가.

21년 헝가리의 바크에서 헝가리인 아버지와 루마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얀초는 자연스럽게 두 나라 문화를 익히며 자라났다. 44년에 루마니아의 콜로즈바르대학을 졸업하고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됐다. 정치보다는 영화로 현실에 참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부다페스트 연극영화 예술학교에서 수학한 후 50년부터 58년까지 얀초는 수많은 기록영화를 연출했다. 그당시 라코시 정권은 헝가리의 공산화를 선전하기 위해 기록영화를 지원했는데 얀초가 만든 기록영화나 뉴스영화도 선전영화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58년에 장편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얀초는 <칸타타 Old es K >(1962)로 해외 일각에서 주목받았는데 공산권영화로는 드물게 지식인의 위기의식을 담은 작품이었다.얀초의 이름은 <검거 Szeg ylegenyek> (1966) <적과 백>(1967) <대결>(1969) 등의 작품으로 서구에 널리 알려졌다. 모두 역사적 사건에 배경을 둔 이 영화들을 통해 얀초는 어떤 역사적 시기든, 어떤 정치체제든, 시간이 멈춰진 것처럼, 폭력과 억압이 반복되는 역사의 무상함을 담았다. 영화적 발레와 같은 얀초의 스타일은 <적과 백>에서 순수한 형태로 나타난다. 소련 혁명 50주년을 맞아 소련과 헝가리가 합작한 이 영화는 내전중이던 1918년 러시아 적군을 도와 싸우던 헝가리 분대를 묘사하지만 제복이 없으면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구분이 안 가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고 또 죽인다. 이 영화에서 얀초는 선명한 윤곽을 잡는 딥포커스와 화려한 카메라 움직임으로 진행중인 역사의 그 역동성을 시각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대결>은 얀초의 이전 작품에 비해서도 훨씬 더 발레 같다. 인물을 따라다니는 카메라 움직임은 얀초의 후기 스타일이 고도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웅변했다.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얀초는 권력에 대한 심도깊은 접근을 보여준다. 47년 젊은 헝가리 공산당원들은 자신들과 신념이 다른 사람들과 ‘대결’하지만 그 대결이 뜻하는 것은 증오와 편협, 권력에의 추구다. 얀초는 혁명의 이름을 걸고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권력욕을 비판하고 있다. 권력은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또는 다른 고상한 명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 그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만 사용된다. 헝가리의 불행한 역사는 바로 이 권력에의 집착 때문이었음을 넌지시 말하고 있는 것이다.

70년대 이후의 얀초의 영화는 좀더 낙관적이었으며 <붉은 시편>(1972)은 혁신적인 영화언어와 혁명에 따르는 여러 복합적인 도덕적 문제를 성찰하는 얀초의 주제의식의 조화가 완벽한 작품이었다. 얀초의 후기작은 고전 신화를 번안한 <일렉트라 Szerelmem, Elektra> (1975) <기법과 제의 La Tecnica e il Rito> (1971)나 비교적 인물의 성격화나 얘기 구조가 친절했던 <사적인 악, 공적인 선 Vizi Privati, Pubbliche Virtu>(1976) 등의 작품에서처럼 소재와 스타일의 변화 조짐을 보여줬다. 79년 얀초는 칸영화제에서 생애 공로상을 받았고 예술가로서의 그의 인생은 정점에 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얀초의 영화는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비판을 들었다. 예술가의 상상력이 한계에 이른 것이다.그러나 얀초가 개척한 영화형식의 의미는 크다. ‘얀초의 나라’에서 역사는 구실일 뿐이다. 얀초는 고도로 양식화된 추상적인 형식을 통해서 역사와 현실을 다르게 보는 법을 일깨웠다. 그의 영화는, 얀초의 나라는, 헝가리 역사와 민속예술에 대한 하나의 축제 의식이었을 것이다. / 영화감독사전,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