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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경

황홀경 I'll Be Seeing Her

2002 한국

다큐멘터리

감독 : 김소영

모던한 머리 매무새와 양장을 한 부인이 거리를 배회한다. 서울역 지하도를 내려가고 서대문 건널목에 서서 기차를 지나 보낸다. 전차에 오르더니 자리에 앉을 염도 내지 않고 선 채로 손잡이를 의지 삼아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다. 마치 머릿속에 괸 상념을 흘려 보내기라도 하듯이. 갈 곳이나 있는 걸까. 아니, 혹시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일부러 미루고 있는 것일까. 허술한 난간이 세워진 길을 터벅터벅 걷던 그녀가 소스라치듯 뒤를 돌아보는 순간, 화면이 멈춘다.

카메라를 나비채 삼아, 김소영 감독은 한국영화에서 여성들이 경험한 무지갯빛 절정의 모멘트들을 채집하기 위해 나섰다. 그리고 1950년대, 60년대 객석을 메웠던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부터 만났다. 전쟁 직후의 한국영화는 봉건적 정절녀 춘향과 자유부인의 초상을 동시에 그리며 포상과 징벌을 분배했지만 내러티브의 심판이 내려지기 전까지 컴컴한 극장 안 축제의 주인공은 여자들이었다. 스크린을 지배한 가장 화려한 얼굴이자 격동하는 감정의 주체였던 여자들. 극장을 나선 여성 관객은 벅찬 심장을 안고 눈물을 훔치며 그녀들의 이미지를 곱씹었다.

<황홀경>의 제2장 <불어라! 바람>은 구태여 욕망을 가두지 않은, 그래서 더러는 추방되고 살해됐던 한국영화의 여인들을 진혼한다. 사랑의 번민을 다소곳이 피아노 건반에만 털어놓던 어머니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사랑방 손님 중절모의 냄새를 맡고 코를 찡그렸다가는 그제껏 보이지 않았던 환한 표정으로 거울 앞에서 비뚜름하게 모자를 쓰고 귀엽게 미소짓는다. 김소영 감독의 인터뷰 요청에 곱게 차린 위엄 있는 모습으로 응한 최은희는, 그 빛나는 사랑의 장면이 자신의 아이디어였노라 들려준다. 장군의 무용담을 들려달라며 일어서는 체하다 그의 품에 쓰러지는 <천년호>의 요염한 여인, 신성일에게 핀셋을 내밀며 털을 뽑아달라고 요구하는 <맨발의 청춘>의 도도한 여인, 부드럽고 따뜻한 섹스 뒤 잠든 남자를 어깨 뒤로 하고 홀로 일어나 앉은 <정사>의 원숙한 여인. 희귀하지는 않으나 합당한 만큼의 눈길을 받지 못했던 한국영화의 장면들은 한줄로 꿰어져 영롱한 목걸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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