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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로 폰테코르보 (Gillo Pontecorvo)

1919-11-19

참여작품 평점평균

씨네218.2

/

네티즌8.2

기본정보

  • 직업감독
  • 생년월일1919-11-19
  • 사망2006-10-12
  • 성별

소개

# 대표작 <카포> <불질러!>

질로 폰테코르보는 언제나 불평등하고 잔인한 권력과 그것을 사용하는 압제자들에 대한 관심으로 일관했다. “나는 항상 자신의 삶의 가장 힘든 기간에 직면한 인간을 보기 원한다”는 그의 말처럼, 그의 필모그래피는 자신의 이상과 목표에 충실했던 한 영화감독의 인생을 대변하고 있다. 피사대학에서 내키지 않는 전공인 화학을 공부한 후, 그는 파리로 옮겨와 음악으로 진로를 바꾼다(그는 자신의 모든 영화에서 음악을 담당했다). 1940년 초 유럽을 휩쓴 인종 차별주의를 목격하면서 그는 저널리즘으로 자신의 인생 방향을 바꾸었다. 2차대전 동안 이탈리아 공산당에 합류한 그는 레지스탕스의 주요멤버로 활약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이탈리아 공산당 간부를 거쳐 이탈리아 신문의 파리 특파원으로 다시 파리에 당도했다. 이때부터 그는 이후 영화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도구임을 확신하게 된다. 1951년 프랑스 감독 이브 알레그레 밑에서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후, 몇편의 단편영화를 거쳐 첫 장편영화 <푸른 대로 La Grande Strada Azzurra>(1957)로 영화감독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한다. 다음 작품 <카포 Kapo>(1959)는 나치의 수용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유대인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사랑과 속죄라는 멜로드라마적 요소로 인해 <카이에 뒤 시네마>의 자크 리베트로부터 공격의 화살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영화 행보를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1966년 발표한 <알제리 전투 La Battaglia di Algeri>(1966)는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작품으로 프랑스에 대한 알제리 투쟁을 시네마 베리테 수법으로 찍은 걸작. 뉴스릴 같은 흑백화면에 비전문 배우들을 쓴 <알제리 전투>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금세 잊게 한다. 프랑스나 알제리 어느 한편에 대한 평가나 시선의 치우침 없이, 개인적인 영웅이나 악한을 그리기보다 온 나라 전체의 투쟁과 고난을 그린 <알제리 전투>는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운 나라는 자신을 지켜낼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알제리 해방전선의 도시 게릴라 전술, 식민지 경찰 기구의 고문 등을 치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정치적 폭력’의 의미를 묻는 이 영화는 60년대 이후 정치영화들의 내용과 형식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그는 할리우드 데뷔의 길이 열리고 말론 브랜도 주연의 <불질러! Queimada!>(1969)를 만들게 된다. 이 영화 역시 자본과 식민지 사이의 관계를 그린 영화로 혼란스럽고 자기파괴적인 식민지 통치자를 인간적인 관점에서 그려내고 있다. 10년 후 만든 <오그로 Ogro>(1979)는 스페인 서부 지방 바스트에서 발생한 테러를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 다소 산만한 이야기 전개로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질로 폰테코르보는 1941년 22살의 나이로 공산주의자의 길을 걸었으나,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목격한 후 공산당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알제리 전투>는 분명한 하나의 정치적 선언으로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의 뒤를 이을 뿐 아니라 코스타 가브라스의 <Z>에도 영향을 미친 하나의 이정표 같은 작품이다. 1992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예술적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모임을 결성하기도 한 질로 폰테코스보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영화에 담은 좌파감독으로, 행동하는 감독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 영화감독사전,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