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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페킨파 (Sam Peckinpah)

1925-02-21

참여작품 평점평균

씨네21--

/

네티즌7.6

기본정보

  • 다른 이름Sam Peckinpha;David Peckinpah
  • 직업감독
  • 생년월일1925-02-21
  • 사망1984-12-28
  • 성별

소개

#대표작 <주니어 보너> <게터웨이> <관계의 종말> <가르시아> <킬러> <철십자 훈장> <콘보이> <오스타맨>

샘 페킨파의 본명은 데이비드 새뮤얼 페킨파. 별명은 ‘피흘리는 샘’ ‘폭력의 피카소’. 페킨파는 오우삼, 월터 힐,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스승이며 현대영화에 처음으로 폭력을 주요 화두로 끌어들였다. 그의 대표작이자 수정주의 서부극의 원조격인 <와일드 번치 The Wild Bunch>(1969)는 개봉 당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선과 악의 개념이 없는 무법자 총잡이들이 무지막지한 총싸움을 벌일 때마다 화면에는 선혈이 낭자하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슬로 모션으로 화면이 천천히 움직인다. 이 폭력미학으로 페킨파는 어둡고 아름답고 격렬한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비가를 읊조렸다.

페킨파는 25년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다. 49년 USC대학에서 연극으로 학위를 받고 돈 시겔 감독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그는 50년대에 인기있었던 <건 스모크> <라이플맨> <웨스트너> 등 텔레비전 시리즈의 연출을 맡으면서 조금씩 이름을 알렸다. 대망의 첫 극영화 데뷔작은 61년 작품 <데들리 컴패니언 The Deadly Companions>(1961). 아들의 관을 들고 한 미망인이 길을 떠나는데 세명의 훌륭한 총잡이들이 아파치의 습격으로부터 미망인을 보호하려고 호위하면서 함께 여행한다는 얘기로, 페킨파는 착한 쪽이 이기는 관습적인 서부영화보다는 복잡한 현대에 비해 더 단순했던 서부시대의 정신을 그리워하는 자기식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페킨파의 출발은 그리 좋지 못했다. 두번째 작품 <오후의 총잡이 Ride the High Country>(1962)는 옛날부터 친구였던 두 나이든 총잡이가 사악한 총잡이들에 맞서 한 젊은 여성을 보호한다는 내용이다. 동이 터오는 20세기 말에 용기, 충성, 의무감 같은 서부시대의 전통적 가치들이 점점 사라져가는 순간을 페킨파는 나이든 총잡이들을 등장시켜 묘사했지만 스튜디오는 이 영화가 비대중적이라고 보고 탐탁지 않게 여겼다. 아파치에 맞서는 군대를 소재로 한 <던디 소령 Major Dundee>(1965)은 인종 편견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폭력을 행사하는 군인들의 이야기로 인물의 심리를 깊이있게 묘사했지만 촬영 후 페킨파는 편집권을 빼앗겼다.

그러나 페킨파는 곧 재기했고 페킨파 영화 중 가장 높은 매표수익을 올린 <와일드 번치>는 당시까지 나온 수정주의 서부영화 중 최고 수준이었다. 배경은 1914년 멕시코 혁명기, 파이크 비숍이 이끄는 무법자 집단은 서부지역에서 은행강도로 악명을 떨치다가 반혁명군 일당과 엮이게 된다. 페킨파는 이 영화 한편으로 서부영화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자동차와 기관총이 있는 시대에 총잡이들은 충성심, 명예, 단결, 영웅주의와 같은 낡고 닳아빠진 윤리를 위해 장렬하게 싸운다. ‘변화된 시대에 변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벌이는 최후의 항거처럼 보였다. 베트남전쟁의 우화를 빙 둘러서 표현한 <와일드 번치>로 자기 스타일을 완성했다. 장면마다 여섯대의 카메라를 설치하고 정상 속도, 느린 속도, 빠른 속도로 다양하게 촬영한 이 영화는 총잡이들의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질 때마다 총잡이들이 죽어가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느린 동작으로 화면을 잡아 서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영화의 최종 프린트는 2시간31분이다. 화면수는 3642개였는데 이는 보통 영화의 6배가 넘는다.

그리고 페킨파의 짧은 전성기가 열렸다. <케이블 호그의 발라드 The Ballad of Cable Hogue>(1970)는 초기 서부개척시대에 대한 페킨파의 절절한 엘레지이며 페킨파가 다시 폭력장르로 복귀한 <어둠의 표적 Straw Dog>(1971)은 영국의 한 지방에 온 미국의 과학자가 그곳 건달들의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섬뜩한 영화다. 스티브 매퀸이 주연한 <주니어 보너 Junior Bonner>(1972)는 역시 호쾌한 남성윤리를 그리워하는 페킨파의 개인적 성향을 반영한 작품이고 <게터웨이 The Getaway>(1972)는 비전형적인 액션영화였다. 페킨파가 다시 도전한 서부영화 <관계의 종말 Pat Garret and Billy the Kid>(1973)은 마초시대의 종언에 바치는 서정적 만사였고 <가르시아 Bring Me the Head of Alfredo Garcia> (1974)는 B급영화의 정수라 부를 만한 개성있는 가작이었으나 <킬러 The Killer Elite> (1975) <철십자 훈장 Cross of Iron>(1977)은 좀 처졌다. 말년의 작품들에서 보여준 페킨파 특유의 고속 촬영 기법은 매너리즘의 흔적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어떤 소재를 다루든 페킨파는 남자들 집단의 공포와 미덕을 표현하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페킨파는 남자다움을 과시하는 속물이 아니라 자기식대로 타락한 세상을 난폭하게 통과했던 것이다. 마음 내부의 갈등을 견디는 페킨파 영화의 주인공들은 그 고독을 폭력이라는 과격한 수단으로 풀어내고 페킨파는 도덕이 무너지는 장엄한 광경을 느긋하게 시적으로 관조한다. 페킨파는 평생 그 단순하지 않은 삶의 도덕을 폭력미학으로 살펴보는 데 다 바쳤다. / 영화감독사전,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