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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석 PD가 말했다. “이 프로그램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어.” 이서진도 말했다. “내가 제일 애매하지 않아?” 그렇긴 하다. 지난해 <미나리>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고 올해는 시상자로 참석하게 된 윤여정의 LA 여정을 따라가는 티빙 <뜻밖의 여정>은 <꽃보다 할배>와 <이서진의 뉴욕뉴욕>을 섞은 듯한 예능 프로그램이다. 다만 윤여정은 ‘꽃할배’들과 달리 외국 생활에 익숙하고 바쁜 일정을 도와주는 스탭도 충분하기에 제작진은 적극적 개입 대신 그를 보필하며 천천히 따라다니는 쪽을 택한다.
그래서 때로는 구성이 너무 느슨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지만, 윤여정이라는 사람을 지켜보는 것만은 지루할 수가 없다. “내가 76살인지 75살인지 맨날 까먹는다”라며 투덜대며 ‘최근’이라면 20년 전, ‘옛날’이라고 하면 40, 50년 전 기억을 꺼내오는 그는 신랄한 말투로 예측할 수 없는 위트를 발휘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모든 단어가 한꺼번에 다가
[최지은의 논픽션 다이어리] 뜻밖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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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모닝 쇼 시즌1 / Apple TV+
미국 어딘가에 일 때문에 신경쇠약에 걸린 여자들의 모임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더 모닝 쇼>의 알렉스 레비와 브래들리 잭슨은 <드롭아웃>의 엘리자베스 홈스와 함께 이 모임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을 만한 인물들이다. 평일 새벽 3시30분 기상, 아침 뉴스쇼 공동 진행이라는 일정표를 공유하는 두 여성 앵커는 남들보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고 더 오래 일로 고통받는다. <더 모닝 쇼>는 알렉스와 아침 쇼에서 오래 호흡을 맞춰온 남성 진행자 미치 케슬러가 성범죄 혐의로 하차한 뒤의 방송국 내부를 배경으로 한다. 차기 앵커로 깜짝 발탁된 지역 방송국 기자 브래들리가 주류 방송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다면 알렉스는 미치 케슬러 사건에서 자신 역시 내부자로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돈 룩 업 / 넷플릭스
<돈 룩 업>은 지구가 망해가는 이야기다. 6개월14일 뒤 혜성 충돌로 지구가 박살날 거라는 과
[리뷰 스트리밍] '더 모닝 쇼 시즌1'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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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롭아웃>의 실존 인물 엘리자베스 홈스는 구글에 ‘Holmes’(홈스)를 검색했을 때 셜록 홈스보다도 상단에 표시될 만큼 유명하다. 스탠퍼드대학교를 중퇴하고 만 19살에 혈액 검사 기기 스타트업 테라노스를 차린 그는 미국에서 제일 젊은 자수성가형 여성 억만장자로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언론을 통해 테라노스의 기술이 허위였다는 게 밝혀지면서 사기범으로 전락한다. <드롭아웃>은 스티브 잡스를 동경하던 10대 후반부터 파산을 앞둔 30대 초반까지의 홈스의 인생사를 시간순으로 재현한다. 다만 초반부터 수사받는 장면을 초반부터 삽입해 그가 환자를 위험에 빠뜨린 범죄자임을 분명히 한다. 덕분에 시청자는 주인공의 거짓말에 현혹되지 않고 전 과정을 따라가면서 어떻게 이 대형 사기극이 10년 넘게 발각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스스로 풀게 된다.
그래서 얼마나 비슷하냐는 질문은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나 시리즈에 따라붙는 질문일 것이다. 홈스를 연기한 어맨다 사이프리드는 홈
[리뷰 스트리밍] 스티브 잡스를 동경하던 누군가의 인생사 '드롭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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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명주공>은 청주시 흥덕구 봉명동 주공아파트(이하 봉명주공)에 살던 사람과 동물 그리고 식물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2020년 3월, 철거 및 재개발 예정인 봉명주공. 영화는 2019년 한해 이곳을 떠나야 하는 모든 일원을 화면에 담는다. 감나무 아저씨는 주택으로 이사가자니 이미 ‘복덕방놈’들이 말을 맞춰 가격을 올렸다며 한탄한다. 음주와 노래를 좋아하는 강은순 할머니는 청주 개발의 역사와 함께 생계를 이어온 본인의 역사를 흥얼거린다. 길고양이들은 볕 좋은 단지 공터에 널브러져 오수에 빠진다. 아름드리 버드나무와 겹벚꽃나무를 비롯한 단지 내 나무들은 조경의 기능은 물론 가드닝 모임 회원들에겐 생태의 보고로 자리한다. 떠날 때가 되자 발언권을 가진 모든 구성원들은 입을 모아 한목소리로 말한다. “여기가 살기 좋아.” 83분의 러닝타임 동안 봉명주공의 안팎을 구경하다 보면 관객 스스로가 봉명주공에 거주했던 양 안타까움을 느낀다. 사람들이 떠나고, 집들이 철거되고, 나무들이 베
[리뷰] 세대(世代)를 아울러 한 세대(世帶)를 이룬 사람, 동물, 나무들 '봉명주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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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집사 주디(브리다 울)가 분주히 방을 꾸민다. 의자를 이리저리 옮기고, 간식이나 휴지를 갖다놓는다. 교회에 올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찾아온 이들은 에번의 부모 제이(제이슨 아이작스)와 게일(마사 플림프턴), 헤이든의 부모 리처드(리드 버니)와 린다(앤 도드)다. 에번은 고교 총기 난사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피해자고, 헤이든은 이 사건의 범인이자 사망자다. 시간이 흐른 후, 두쌍의 부부가 서로를 치유하고자 한 탁자에 모였다. 감정을 억누르고 상대를 비난하지 않으려 힘쓰지만,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의 비애와 격정이 쉽게 숨겨질 리 없다.
숙의 민주주의. 사회 의제에 관해 시민들이 깊게 의논하고 숙고하는 민주제 형식을 일컫는다. 여기서 숙의란 다소 불편할지라도 자신과 의견이 다른 상대를 마주 보고, 대화할 공간을 내주는 용기를 뜻하기도 한다. 숙의는 정치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느 상황이든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상대의 얼굴을 피하지 않고, 애써 내
[리뷰] 얼굴의 공간과 대화의 시간을 담보하는 영화적 숙의 '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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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하고 내성적인 남자 아드리앵(벤자민 라베른헤)은 어느 날 여자 친구 소니아(사라 지로도)에게서 잠시 휴식 시간을 갖자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통보를 받는다. 그날 이후 실의와 분노, 희망과 절망을 거쳐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아드리앵은 38일째 되던 날 오후 5시24분, 소니아에게 안부 문자를 보낸다. 얼마 뒤 6시56분, 소니아가 문자를 읽었다는 알람을 받았지만 답장까지 받진 못한 아드리앵은 가족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결혼을 앞둔 누나(쥘리아 피아통)의 결혼식 축사를 예비 매형(카이안 코잔디)으로부터 부탁받게 된다. 이에 가족과의 소통 문제부터 소니아와의 관계에 대한 회고까지 무궁무진한 상념들이 아드리앵의 머릿속에 뭉게뭉게 떠오른다.
파브리스 카로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완벽한 축사를 준비하는 방법>은 사랑하는 여자 친구로부터 난데없는 ‘관계 거리 두기’를 통보받은 상태에서, 누나의 결혼식 축사까지 부탁받은 남자주인공의 어느 저녁 수다스런 ‘의식의 흐름
[리뷰] 사랑스러운 위트, 예쁜 기적 '완벽한 축사를 준비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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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정태춘이 데뷔 40주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전국 순회공연을 하고 있다. 공연 실황 영상을 통해 데뷔곡 <시인의 마을>이 흘러나오자 영화는 1978년으로 시간을 돌린다. 평택에서 상경한 후 단숨에 인기 가수로 발돋움했던 정태춘의 데뷔 이래 일대기가 아카이브 자료로 재생된다. 가요·영화 사전검열 철폐 운동, 전교조 합법화 투쟁,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투쟁, 2016 광화문 촛불시위 등 굴곡진 한국 현대사 곳곳에서 활동했던 정태춘의 모습은 그가 대중 가수의 영역을 넘어 어떻게 시대의 아이콘이 되어왔는지를 보여준다.
정태춘이란 사람만으로도 인상 깊은 다큐멘터리다. 시적 감수성을 한껏 머금은 노랫말, 대중가요에 국악을 혼합한 전위적 도전, 포크 공연의 신기원을 열었던 전국 순회 소극장 공연 투어 ‘얘기노래마당’까지 가수 정태춘의 힘이 영화 내내 풍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대한민국 정치사회의 아픈 사건들, 그 최전선에서 기타 하나 메고 노래하는 그의 모습일 테다.
[리뷰] 영화라기보단 정태춘 콘서트 블루레이 '아치의 노래, 정태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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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대학 화장실에서 교수 나오토(이타오 이쓰지)가 죽은 채 발견된다. 용의자는 식칼을 손에 든 채 피 묻은 셔츠를 입고 강가를 걷고 있던 나오토의 딸 칸나(요시네 교코). 칸나는 순순히 범행을 자백하지만 살인 동기에 관해서는 “직접 찾으라”며 진술을 거부한다. 이 사건에 관심을 두게 된 상담 심리사 유키(기타가와 게이코)는 사건의 국선 변호사이자 남편 가몬(구보즈카 요스케)의 동생인 카쇼(나카무라 도모야)와 함께 칸나의 살인 동기를 밝히려 한다. 유키는 면회를 통해 칸나의 가족과 주변인들을 취재하고, 이들의 진술은 칸나의 고백과 하나도 들어맞지 않는다. 유키는 사건의 내막을 파헤치다 문득 묻어두었던 자신의 과거와 직면하게 된다.
<퍼스트 러브>는 제159회 나오키상 수상작인 시마모토 리오의 동명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영화는 원작의 시점을 유지한 채 사건을 취재하는 유키의 서사를 외부 액자로, 갓 성인이 된 날과 대학교 3학년 무렵의 유키의 서사를 내부 이야기로 담
[리뷰] 찝찝한 액자 밖 스릴, 느닷없는 액자 안 로맨스 '퍼스트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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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외딴 농가, 수현(샌드라 오)과 그녀의 딸 크리스(피벨 스튜어트)는 외부와의 접촉이 드문 집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크리스는 홈스쿨링을 하고, 수현은 양봉을 하며 생계를 잇는다. 그러던 어느 날, 이곳에 수현의 외삼촌이 불쑥 나타나 그녀의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한다. 엄마의 유골과 유품도 함께 건네며. 무슨 사연인지 수현의 반응은 냉담하고, 유골과 유품도 그저 지하실에 둘 뿐이다. 하지만 외삼촌의 방문 이후 자꾸만 기이한 일들이 벌어진다. 수현은 엄마의 환영을 보고, 크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외할머니의 유품에 눈길이 간다. 수현은 그녀의 엄마가 생전에 자신에게 집착했던 것을 기억하며 엄마의 원혼이 이 집에 찾아왔음을 느낀다. 달아나려 해도 엄마의 기운은 점점 더 강하게 느껴지고 이제 수현도 변하기 시작한다.
<엄마>는 모녀 관계에 숨은 집착과 소유욕, 그에 대한 공포를 호러 장르의 문법으로 풀어낸다. 미국 이민 1, 2세대가 제각기 느낀 소외와
[리뷰] 한국적 소재를 외국 호러 장르에 강제 이주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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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도시>(2017)의 후속작 <범죄도시2>는 활동 범위를 베트남으로 확장하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가리봉동 소탕작전으로부터 4년이 지난 2008년, 금천경찰서 강력반은 베트남으로 도주한 용의자를 인도받아 오라는 미션을 받는다. 그렇게 현지를 물색하던 마석도(마동석)와 전일만(최귀화)은 용의자에게 미심쩍음을 느껴 추궁한 끝에, 악랄한 강해상(손석구)의 존재를 알게 된다. 두 형사는 수사권이 없는 상황에도 그를 잡겠다는 일념 하나로 호찌민 이곳저곳을 거침없이 누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악을 처치함으로써 정의를 실현하려는, 관객에게 익숙한 공식만을 따르는 듯해 보이지만 영화는 계속 예상할 수 없는 대립구도를 만들어내면서 악과 악의 대결을 빠르게 추적해간다. 무엇보다 전편에서 장첸의 악행이 가리봉동이라는 지역으로 비교적 한정돼 있었다면 <범죄도시2>의 강해상은 국내외 경계를 뛰어넘어 종횡무진하고 길거리, 도로 등 사람들의 일상적 공간을 쉽게 침범하
[리뷰] 명료하고 경쾌한 히어로 마동석 '범죄도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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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는 매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취향과 영감의 원천 5가지를 물어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이름하여 그들이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눈치 없는 돌쇠>
매직망나니XXL, 위즈덤하우스
눈치는 드럽게도 없는 돌쇠와 그런 돌쇠를 사무치게 욕망하는 도련님의 명랑 액션(?) BL 만화. 연재분 다 읽고 단행본 바로 사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까지 하다가, 결국 작가님과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드라마에도 제목만 살짝 바꿔서 출연시켰다. 이 자리를 빌려 나의 팬심이지 PPL이 아니었음을 밝힌다(협찬이냐고 묻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
<미스테리아>
격월간, 엘릭시르
창간 이후부터 꾸준히 읽고 있는 미스터리 전문 잡지. 책 정리를 할 때마다 버릴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에는 남길 거 정한다고 다시 읽고 있
는 나 자신이 너무 싫다. 매호 수록된 국내외 단편들은 당장 읽지 않아도 묵혔다 나중에 읽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그래서 아직도 잔뜩 쌓여 있고 못 버렸다는
[LIST] 정지인 드라마 PD. MBC '옷소매 붉은 끝동'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