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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칼라스 (Maria Callas)

1923-12-02

참여작품 평점평균

씨네216.3

/

네티즌8

기본정보

  • 직업배우
  • 생년월일1923-12-02
  • 사망1977-09-16
  • 성별

소개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 1923 ~ 1977
본명 : 마리아 세실리아 소피아 안나 칼로게로풀로
(Maria Cecilia Sophia Anna Kalogeropoulos)

<b>1923년 12월 2일 뉴욕 출생.</b>
그리스 아테네 약대를 졸업한 조지 칼로게로풀로와 여배우의 꿈을 가졌던 에반젤리아 칼로게로풀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들을 기대했던 부모의 거부와 무관심 속에서 태어난 그녀는 예쁘고 사랑스러운 언니의 외모와는 달리 생김새도 볼품없고 뚱뚱했으며 근시가 심해 두꺼운 안경을 착용해야만 했다. 때문에 친구들에게 항상 놀림을 받아야 했고 그녀의 어머니는 늘 엄하고 권위적이며 아이들을 거칠게 대했다. 마리아는 늘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존재여서 어머니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b>1930년 7세의 나이에 음악을 시작.</b>
그녀 어머니의 꿈을 대신 이루기 위해 천진난만하게 뛰어 놀았어야 할 어린 시절을 음악수업과 성실성, 규칙들로 대신했어야 했다.

<b>1937년 부모의 이혼, 음악교육을 위해 그리스로 떠남.</b>
그녀는 이러한 생활을 전환하기 위해 그리스로 돌아가 친척들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게 되었고 그녀의 노래에 귀 기울였던 에프티미오 외삼촌은 그녀를 아테네 국립음악원의 성악 선생인 마리아 트리벨라(Maria Trivella)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트리벨라는 마리아의 노래를 듣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으며 아직은 다듬어지지 않았으나 엄청난 목소리임을 직감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의 열네살밖에 안되는 나이를 열여섯살로 속여가며 1938년도 학기부터 아테네 국립고등음악원에 등록시키게 된다.

<b>1941년 17세의 나이로 아테네 오페라단 평생단원이 됨.</b>
그녀 최고의 스승인 엘비라 데 히달고(Elvira de Hidalgo)를 만나 아테네의 최고 음악원(Santuzza)에서 학비를 면제받고 히달고의 개인지도를 받는 학생이 된다. 히달고의 도움으로 아테네 오페라단의 평생단원이 된다.

<b>1945년 22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오페라 가수로 데뷔.</b>
그녀는 아버지가 있는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고자 했다. 당시 그녀의 몸무게는 210파운드(약 95kg). 가냘프고 아름다운 여주인공 역할을 맡기엔 지나치게 뚱뚱했다. 그 해 겨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디션에서 탈락하자, 그녀는 이탈리아로 무대를 옮긴다.

<b>1947년 무명가수였던 그녀와 거물 메네기니의 결혼. ‘세기의 소프라노’라는 명성 얻음.</b>
화물선을 타고 이탈리아 나폴리로 건너간 그녀는 거기서 28살 연상의 사업가이자 칼라스의 열렬한 후원자인 메네기니를 만나 결혼했다. <라 지오콘다>로 데뷔한 그녀는 이후 <트리스탄과 이졸테><투란도트><아이다><노르마> 등의 오페라 등으로 세기의 소프라노라 불렸다.

<b>1954년 연출가 비스콘티와의 사랑, 몸무게 30kg 감량.</b>
그러나 성공 이면에서 늘 사랑을 갈구했던 그녀는 영화감독 루치노 비스콘티를 사랑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자신 안의 여성을 재발견하게 된다. 그가 영화<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에 깊은 인상을 받던 중 ‘당신의 몸매가 오드리 헵번 같다면 진정한 트라비아타가 될 것’이라는 비스콘티의 말 한마디에 단기간 30kg의 체중을 감량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스콘티는 동성애자였으므로 그녀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b>1957년 선박왕 오나시스와의 만남. 음악인생의 위기.</b>
칼라스의 ‘세기의 연인’으로 불리는 오나시스를 만난 것은 한 파티장에서의 인연이었다. 남편과 함께 요트항해에 초대받았다가 사랑에 빠진 그녀는 이때부터 음악인생의 위기를 맞기 시작하고 이듬해 1월, 이탈리아 대통령이 참석한 로마 갈라 콘서트에서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1막 후 퇴장해 비난을 받았으며 11월에는 라 스칼라 극장의 예술감독과의 불화로 라 스칼라를 등지게 되고 메트로폴리탄에서마저 해고된다.

<b>1965년 잠정적인 은퇴 선언.</b>
그녀는 무대를 포기하고 오나시스와 함께 화려한 상류생활을 즐기는 데만 몰두했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영원하지 않았고 명성은 여전했으나 ‘목소리는 한물갔다’라는 평이 나돌기 시작했다. 1964년 프랑코 제피렐리의 설득으로 <토스카>를 시작, 다시 무대에 서기 시작하나 스스로 한계를 느낀 그녀는 코벤트 가든에서 열린 로열 갈라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잠정 은퇴했다.

<b>1968년 오나시스의 배신. 그녀의 종말.</b>
그녀는 1966년 미국시민권을 포기하고 그리스 국적을 획득하면서까지 오나시스와의 결혼을 갈망했지만 오나시스는 결국 그녀를 배신하고 1968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과 결혼했다. 이후 그녀는 영화 <메디아>에 출연하나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한다.

<b>1974년 10월 5일 서울 이화여대 강당에서 2회 공연. 일본을 끝으로 생애 마지막 투어.</b>
그녀는 비밀리에 줄리어드 마스터클래스를 열어 후배들을 가르쳤으며 같은 해 이탈리아의 새로운 법에 따라 메네기니와 이혼한다. 이후 미국, 유럽을 거쳐 마지막 세계투어를 진행한다. 1974년 10월 서울 이화여대 강당에서 <카르멘><라 죠콘다><메피스토펠레><쟈니 스키키><라 보엠><토스카> 등의 곡으로 2회 공연을 진행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일본 삿뽀로에서의 공연이 마지막 대중공연이었다.

<b>1975년 오나시스의 죽음. 그녀의 은둔생활.</b>
오나시스는 재클린과의 결혼 이후 칼라스를 그리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재클린과 이혼소송을 준비 중이었고 그가 사망할 당시 칼라스가 선물한 붉은 색 캐시미어 담요를 손에 쥐고 있었다고 한다. 오나시스의 죽음은 그녀에겐 생애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가 죽은 뒤 칼라스는 삶의 의욕을 잃은 채 프랑스 파리의 아파트에 홀로 칩거한다.

<b>1977년 9월 16일 55세의 마라아 칼라스. 그녀의 외로운 죽음.</b>
칼라스는 심장마비로 그녀의 아파트에서 홀로 죽음을 맞는다. 그녀의 마지막 순간 유일한 목격자는 그녀의 간호원과 집사. 그의 유해는 그리스로 돌아와 화장되었으며 유골분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에게해에 뿌려졌다.

<b>Music _ 그녀의 음악</b>
1950년대 큰 인기를 누린 프리마 돈나(Prima Donna), 오페라의 전설로 불린 그녀. 이탈리아 사람들은 마리아 칼라스를 라 디비나(La Divina 오페라의 聖女)라 부른다. 그녀의 음색은 우리가 흔히 조수미와 같은 유명 성악가들을 통해 들을 수 있는 고운 음색과 깨끗한 미성(美聲)은 아니다. 어쩌면 거칠고 금속성 나는 사나운 음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칼라스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온몸으로 오페라의 배역을 소화하는 그의 폭발적이고 카리스마있는 연기력에 있다. 무대 위의 그녀는 늘 힘이 넘쳤고 분노, 복수의 감정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연기자’ 마리아 칼라스가 되어 당시 관객들이 가졌던 노래 따로 연기 따로였던 오페라에 대한 의식을 전혀 새롭게 바꾸어 놓았다. 음악의 감성을 정확히 표현하는 힘과 매력적인 음색으로 사랑을 받았던 그녀는 특별한 발성 능력을 요구하는 배역들을 맡았을 뿐 아니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페라에 모두 출연하였으며 벨칸토 오페라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마땅한 가수를 찾지 못해 볼 수 없었던 <노르마><멕베스>같은 오페라를 세상에 새롭게 선보였다. 무대에서 그녀가 죽음을 맞으면 극과 현실을 혼동시킬 만큼 몰입한 노래와 연기로 객석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우아한 용모, 대스타로서의 기품과 카리스마를 겸비한, 제2차 세계대전 후 최고의 오페라가수로 인정받았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녀의 목소리와 연기를 능가할 만한 오페라 가수를 아직까지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