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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릭 저먼 (Derek Jarman)

1942-01-31

참여작품 평점평균

씨네21--

/

네티즌6.4

기본정보

  • 직업감독
  • 생년월일1942-01-31
  • 사망1994-02-19
  • 성별

소개

대표작 <카라바지오> <영국의 종말>

데릭 저먼이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영국영화계의 무서운 아이’라고 불렀다. 나이가 든 뒤에도 ‘무서운 아이’로 남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저먼은 일생 동안 주류문화의 변방에 있으면서 완강한 비타협주의를 고수했다. 가수 데이비드 보위는 저먼을 ‘검은 마술사’라 불렀고 어떤 이들은 ‘영국의 앤디 워홀’이라 칭했지만 저먼은 상업적으로 영리하게 처신한 예술가가 아니었다. 저먼은 평생 무정부주의와 동성애주의와 미학적 실험주의를 일관되게 추구했다. 영국영화연구소의 제작국 소장이었던 피터 세인즈베리는 “데릭 저먼은 주목할 만한 작가다. 그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질병을 징후적으로 포착한 몇 안 되는 감독이다”라고 평했다.

저먼은 아버지가 군인이었던 중산층 가정에서 전형적인 영국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좋은 성장환경에서 자연스럽게 예술에 관심을 가졌으며 화가가 될 뜻을 품고 슬레이드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대학 시절 저먼은 동성애자인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으면서 중산층의 생활양식과 작별하고 대학졸업 후 오페라단과 발레단의 무대 디자이너로 경력을 쌓는다. 그뒤 켄 러셀 감독의 영화 <악마들>(1971)의 세트 디자이너로 참여한 후 큰 감화를 받고 슈퍼 8mm로 만든 첫 단편영화 <무너진 영국 Broken English>(1972)으로 연출작업에 뛰어든다. 저먼은 슈퍼 8mm 카메라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개척자였다. 78년 <축제 Jubliee>가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청받은 후로 그의 지명도는 높아졌지만 그뒤에도 줄곧 슈퍼 8mm와 16mm로 영화를 찍었고 심지어 80년대 후반에는 가정용 비디오 카메라로 영화를 찍었다.

저먼은 ‘반항심이 퇴색될까봐 두려워서’ 35mm 극영화 제작을 꺼렸지만 실존했던 화가 카라바지오의 일생을 담은 <카라바지오 Caravasio>(1986)는 35mm 극영화로 만들었다. <카라바지오>는 저먼의 영화 중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후원자의 요구와 자신의 예술적, 성적 충동 사이에서 갈등하는 카라바지오의 삶을 조명하면서 저먼은 결국 화가의 미학적 욕망과 성적 욕망은 동일선상에 있는 게 아니겠느냐는 흥미로운 암시를 던진다. 화면은 카라바지오의 화풍을 영화적으로 완벽하게 옮긴 아름답고 신비로운 분위기로 가득하다. 이 35mm 장편영화에는 저먼이 단편영화로 연마했던 모든 실험정신이 녹아들어가 있다. 저먼은 초당 3프레임에서 6프레임의 속도로 영화를 촬영했다. 보통 영화는 초당 프레임 속도가 24프레임이다. 24장의 프레임은 돼야 사람의 동작을 육안으로 보는 것처럼 잡아낼 수 있다. 6프레임의 촬영 속도로는 육안으로 화면을 식별할 수가 없다. 저먼은 이렇게 촬영된 필름을 스크린에 영사한 다음, 초당 24프레임의 표준속도로 다시 그것을 촬영했다. 그러자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미지가 만들어졌는데, 화면이 마치 꿈꾸는 듯한 몽롱한 분위기의 리듬과 색감으로 스크린에 펼쳐진다. 색감과 질감면에서 저먼의 영화는 회화 수준에 육박하는 듯이 보였다. 첨단 기술이 아니라 수공업적인 방식으로 저먼은 그걸 해낸 것이다.

저먼은 자신의 영화를 기록영화로 여겼다. 문화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입장을 개인적으로 분석한 기록영화라는 것이다. “기존 정치나 매체는 결코 진실을 말해본 적이 없다.” 1987년 <카라바지오>에 이어 발표한 <영국의 종말 The Last of England>은 이런 기만감, 상업주의에 물들어 정체성을 상실한 당대의 영국문화에 대한 저먼 자신의 분노와 탄식으로 화면이 터져 나갈 듯하다. 저먼이 89년에 발표한 또 한편의 35mm 극영화 <전쟁 레퀴엠 War Requiem>도 무척 비관적인 영화였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미지를 나열하는 이 묵시록적인 영화는 에이즈 시대의 재앙 이미지를 시각화한 영상 에세이로 손꼽힌다.

저먼 영화의 반골적인 성향은 그의 동성애 지향과도 관계가 있다. 저먼은 동성애자로 주류 사회의 구석에서 살아갈 운명을 스스로 택했던 것이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저먼은 게이의 권위와 권리를 옹호하는 역할을 자임했고 ‘PWAS’(Persons With AIDS)란 단체의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예술은 여전히 그의 삶의 목표였다. 그는 상업주의에 감염된 주류영화의 반대편에서 실험적이고 비판적인 영화를 계속 찍었다. 이 비타협적인 정신은 끝까지 지켜졌다. 저먼의 후기작 <블루 Blue> (1993)는 저먼의 영화 중에서 가장 파격적이다. 아니 영화라고 볼 수도 없다. 푸른색으로 칠해진 화면을 보면서 우리는 목소리와 음향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94년 저먼은 에이즈 증세가 심해지면서 시각을 잃어버렸고 그것으로 시각적인 마술사라는 칭호를 듣던 그의 재능도 끝나버렸다. 52살의 나이에 그는 결국 에이즈로 사망했다.
[씨네21 영화감독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