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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폰 스트로하임 (Erich von Stroheim)

1885-09-22

참여작품 평점평균

씨네21--

/

네티즌8.4

기본정보

  • 직업감독
  • 생년월일1885-09-22
  • 사망1957-05-12
  • 성별

소개

# 대표작 <탐욕> <켈리여왕>

감독이기 전에 배우, 시나리오 작가로도 활동했던 폰 스트로하임의 이미지는 ‘독일병정’ 바로 그것이었다. 단단하고 빈틈없이 생긴 용모에 전형적인 프로시언의 차가운 인상은 나치장교 역할에 더할 나위 없이 그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군대 복무경력은 극히 미미한 것이었고 젊은 시절에는 밀짚모자 공장을 운영하는 부모 덕에 공장 관리인을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밀짚모자 사업이 신통치 않았던지 스트로하임의 부모는 1차대전이 발발하기 몇년 전 재산을 정리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스트로하임도 때문에 ‘독일병정’의 이미지와 달리 죽을 때까지 미국시민으로 살면서 1차대전중 미국의 입장을 옹호하는 정치선전영화를 만들기도 한다.

스트로하임이 영화계에 입문한 것은 1914년경이었다. 처음에는 의상담당자로서 군복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고 나중에 작가, 조감독, 배우로서도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 조감독 시절 그가 영화를 배웠던 스승은 D.W. 그리피스였다. 덕택에 스트로하임은 <국가의 탄생> <편협> 같은 기념비적인 영화에서 기술자문 및 배우로 활동하면서 영화연출의 기본을 배울 수 있었고, 이때의 능력을 인정받아 1차대전이 발발하자 그리피스와 함께 <비밀첩보원 실비아 Sylvia of Secret Service>(1917) 같은 정치선전 영화를 만들게 됐다.

1차대전이 끝나자 스트로하임은 유니버설과 계약을 맺고 첫 영화인 <눈먼 남편들 Blind Husbands>(1919)로 감독에 데뷔한다. 이후 그는 스튜디오의 요구에 따라 몇편의 상업적 멜로드라마를 만들지만 주제나 소재면에서 별로 맞는 작품들은 아니었다. 대신 스트로하임은 캐릭터의 성격을 풍성하게 만들고 의상, 분장, 소품, 세트 등을 정밀 설계하는 등 나중에 자기 영화의 특징이 되는 몇가지 요소들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완벽을 추구하는 스트로하임의 고집은 종종 제작예산을 초과했고 때문에 그는 스튜디오쪽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의 완벽주의는 엑스트라로 출연하는 군인들의 속옷까지 진짜 군대용을 입어야 한다고 고집할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유니버설 사장으로 있던 어빙 탈버그 또한 그 못지 않은 ‘독재자’여서 스트로하임은 <회전목마 Merry-Go-Round>(1923)를 채 끝마치지 못하고 해고되고 말았다.

다음에 그를 받아준 스튜디오는 MGM이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와 데스벨리에서 촬영하고, 역시 예산 또한 초과한 상태로 회심의 역작 <탐욕 Greed>(1925)을 완성한다. 인간심성의 연악함을 파헤친 <탐욕>은 뛰어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배급에 문제가 있었다. 상영시간이 일곱시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결국 스트로하임은 작품을 4시간으로 줄였지만 이것도 안 돼 MGM은 다시 약 100분으로 축약해 개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술적 정열과 자질을 높이 산 스튜디오는 계속 작품을 의뢰했고 스트로하임은 부자와 사랑에 빠지는 공주 이야기인 <결혼행진곡 The Wedding March>(1928)을 완성한다. 이 영화 또한 러닝타임이 길어서 배급사인 파라마운트는 제1부만 개봉했고 2부인 <신혼여행>은 나중에 유럽에서 따로 개봉해야만 했다. 다음에 만든 영화는 글로리아 스완슨이 제작자로 나선 <켈리여왕 Queen Kelly>(1928)이었지만 제작비 초과를 감당하지 못한 스완슨이 그를 해임하고 그때까지 필름을 대충 편집해서 개봉할 수밖엔 없었다. 하지만 그때 이미 스완슨은 60만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제작비를 쓴 다음이었다.

무성영화 시절이 지나가고, 스트로하임은 폭스와 계약을 맺고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작기간 초과, 제작비 초과라는 그의 버릇은 여전해서 이번에도 폭스는 그를 해고하고 대신 그때까지 찍은 필름을 이어붙여 <안녕, 자매들 Hello Sister>(1933)이란 이름으로 개봉했다. 이것이 스트로하임의 마지막 영화였다. 아무도 더이상 그를 감독으로 고용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는 배우로서 일생을 마치게 됐고 <선셋 대로>의 글로리아 스완슨의 남편으로 대중들에게 각인됐다. <탐욕>은 감독으로서 스트로하임의 일생 중 단 하나의 걸작이 되고 만 것이다. 그의 몇편 안 되는 영화들은 독창적이고 특별하며, 힘이 있고 당시의 감독들과는 다른 면이 있다. 그의 카메라 편집 양식은 빠른 커트와 클로즈업이 강조됐던 몽타주의 유행에 따르지 않고 롱테이크와 롱쇼트에 의존하여 공간적 시간적 일치와 리얼리즘을 얻고자 했다.게다가 그의 영화는 모두가 성적인 물질적인 탐욕성과 욕망에 관한 멜로드라마이기도 했다. 성은 전적으로 불유쾌한 관점에서 언제나 돈과 지위와 권력과 뒤섞여 있었다. 자신의 영화가 하나의 강렬한 예술이라는 자각에서 나온 그의 주제의 대담함과 성격적인 오만함과 경제적 무관심은 아이러니하게도 스트로하임의 영화감독 노릇을 봉쇄하고 만다. 그리피스와 마찬가지로 폰 스트로하임은 생애의 마지막 10년을 영화계 밖에서 거의 은퇴 상태로 지내면서 말년을 맞이했다. / 영화감독사전,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