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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

Our School

2006 한국 전체 관람가

다큐멘터리 상영시간 : 131분

개봉일 : 2007-03-29 누적관객 : 34,439명

감독 : 김명준

  • 씨네217.00
  • 네티즌8.68

일본땅 조선아이들의 용감한등교가 시작된다!

곱다고 봐주는 사람들도 없는데 어이하여 너는 여기에 피었는가?
분계선 코스모스 같은 아이들... 볼수록 사랑스럽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우리학교 입니다!

해방직후 재일 조선인 1세들은 일본땅에서 살아갈 후손들을 위해 자비로 책상과 의자를 사들여 버려진 공장에 터를 잡아 조선학교 = 우리학교를 세운다. 처음 540여 개가 넘던 학교는 일본 우익세력의 탄압 속에 이제 80여 개의 학교만이 남게 되었다. 김명준 감독은 혹가이도 조선초중고급학교’의 교원, 학생들과 3년 5개월이라는 시간을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일상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카메라에 담아낸다.

“조선사람은 조선학교에 다녀야 한다”
- 일본땅 조선아이들의 용감한 등교가 시작된다!


‘우리학교’의 학생들은 여느 10대들과 다름없이 명랑하고 밝다. 일본이라는 타국땅에서 조선인이라는 이방인으로 살아가지만 우리학교라는 공동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동포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기 위해 공부하고 운동한다. 북에 대한 적대감이 반영된 일본 우익세력의 무작위적 협박과 이로 인한 신변의 위협을 겪으면서도 우리학교’의 학생과 학부모, 선생님들은 조선사람은 조선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그 평범한 진실을 어렵게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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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별점 (2명참여)

  • 7
    남다은‘학교’ 밖의 현실을 반대로 비추는 거울. 서글프고 꿋꿋하다
  • 7
    박평식맑고도 축축한 풍경, 조은령 감독도 감동하겠어요
제작 노트
‘우리학교’를 소개합니다!

해방 직후 일본땅에 세워진 조선인들의 민족학교,
조선학교 = 우리학교


해방 직후 조국으로 건너오지 못하고 일본에 남게 된 조선인 1세들은 조국의 말과 글을 지켜가기 위해, 조선인으로서의 자존감을 잊지 않기 위해 사비를 들여 의자와 책상을 사고 버려진 공장에 터를 잡아 조선인들을 위한 학교, 조선학교를 세웠다. 540여 개이던 조선학교는 일본 우익세력의 탄압 속에 60여 년이 지난 현재 80여 개의 학교만이 남았지만, 일본땅 조선인들의 기상은 여전하다. 조선학교는 우리학교라는 또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며. 우리’라는 단어가 가지는 특별하고 소중한 의미 그대로 후손들에게 우리말, 우리글, 우리 민족성을 가르치기 위한 민족 교육체로서의 자긍심을 이어가고 있다.

조선이 해방되고 일본이 패망했을 때, 그 때까지 일본 국적이었던 재일동포들에게는 식민지 이전 시대의 조선 국적이 부여되었다. 이후 한국국적을 취득한 재일동포들도 많이 있지만, 현재까지도 조선국적을 버리지 않고 있는 동포들 역시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사라진 조선, 혹은 기호로서의 조선의 국민으로, 즉 현실적으로는 무국적자로 남아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학교는 일본 문부과학성으로부터 정식학교가 아닌 각종학교로 분류되고 있다. 각종학교는 학교교육에 비견되는 교육을 행하는 학교로, 공식적으로 학교 졸업자격을 얻지 못한다. 그리고 대입수험자격 또한 얻지 못한다. 따라서 일본에 있는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수험자격을 얻기 위한, 일종의 ‘대입검정’ 시험을 따로 치러야 한다.

조선학교라고 하면 흔히 조총련계의 북조선을 떠올리는 남쪽의 사람들. 그리고 북조선과 비슷한 억양의 말투를 사용하고 북조선을 마음의 조국이라 생각하는 조선학교 아이들이 더 많은 현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은 우리나라 정부의 태도에 기인한다.


조선학교가 생기던 초창기 가장 어려웠을 때, 당시 사회주의국가로 살림이 넉넉했던 북쪽 정부는 재일동포를 위한 교육 원조비를 지원해주었다. 북쪽 정부의 이런 지원은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지만, 이에 비해 전쟁 직후 넉넉치 못한 나라살림으로 재일동포들의 문제까지 관여하기 힘든 상황이었던 남쪽 정부는 이후 경제적 여력이 생긴 다음에도 조선학교에 대해 북쪽의 지원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각종 이데올로기 공세로만 일관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들이 조선학교 아이들과 선생님들에게 고향은 남쪽이지만 자신들을 알아주고 위해주는 조국은 북쪽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직까지 우리학교는 해방기의 조선의 정신을 이어오고 있는 민족학교라는 점이다. ‘우리학교’의 아이들은 조선인으로서의 민족교육을 받을 뿐, 자신의 국적은 자기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가지고 있다. <우리학교>의 정식 개봉을 통해 우리사회가 일본 내 조선학교 = 우리학교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진지한 고민의 계기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아내를 통해 시작된 우리학교와의 운명적 만남!

조선학교와 재일 조선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극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연출자였던 고 조은령 감독과 촬영감독이었던 김명준 감독은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재일 조선인을 다룬 <하나>라는 장편 극영화 시나리오를 썼던 조은령 감독은 당시 촉망 받는 여성감독으로서 우리에게는 한국 최초 칸 영화제 단편 경쟁 부분에 초청되었던 <스케이트>의 감독이기도 했다. 조선학교를 다룬 극영화촬영에 앞서 가제 <프론티어>(가제)라는 극영화 메이킹 다큐를 준비하던 김명준 감독의 아내 조은령 감독은 갑작스런 사고로 거짓말처럼 유명을 달리한다. 결혼 7개월 만의 일이다.

재일조선인의 문제를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 드렸던 조은령 감독. 김명준 감독은 아내를 위해 장편 다큐 <하나를 위하여>를 완성하고 혹가이도로 향한다. 그는 아내를 통해 시작된 우리학교와의 아름다운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장편 다큐 <우리학교>의 제작에 착수한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왜곡하지 않고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신뢰하고 있는 혹가이도 조선초중고급학교의 선생님들과 아이들을 모습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촬영기간 3년, 편집기간 1년 6개월
혹가이도 조선학교 아이들과의 특별한 만남과 기록


2002년부터 시작된 촬영이 2003년 잠깐의 공백기를 딛고 다시 시작된다.

김명준 감독은 장편 다큐멘터리 <우리학교>를 위해 3년 5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혹가이도 조선학교에 머물렀다. 일본말을 할 줄 몰랐던 김명준 감독은 비교적 조선말이 익숙한 ‘우리학교’ 선생님들과는 금새 가까워질 수 있었지만 일본말이 더 익숙한 아이들과 허물없이 지내기까지는 1년 남짓의 시간이 걸렸다. 명절이나 방학 때면 학교에 홀로 남을 김명준 감독을 위해 몰래 식사당번을 서주던 선생님들, 처음에는 카메라 앞에 서기를 두려워하던 아이들도 나중에는 ‘명준형님은 자연태 찍기를 좋아한다’며 일본땅에서 조선학교 학생으로 살아가는 심정을 솔직히 털어놓던 해맑은 조선학교 아이들까지…

모든 촬영을 마치고 2005년 4월 500여 개가 넘는 촬영 테잎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온 김명준 감독의 이 사랑스런 아이들과의 3년 5개월간의 특별한 교감은 영화의 편집에만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리게 했다.


제작비 7000만원, 최소 스탭만으로 완성한 독립다큐멘터리!
멀티 플레이어 스탭들의 활약으로 최고의 디지털영화가 탄생하다!


3년 5개월이라는 장기간을 일본에 체류하며 완성한 장편 다큐멘터리이지만, 제작비용은 현금 5,500만원, 현물지원 1,500만원, 토탈 7,000만원이라는 최소비용으로 완성되었다.

부족한 제작비와 인력예산의 한계 때문에 <우리학교> 스탭들은 한명한명이 모두 멀티 플레이어가 되어야만 했다. 엔딩 크레딧을 찬찬히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김명준 감독과 박소현 조감독이 직접 촬영, 편집, 구성, 대본을 모두 완성했으며, 고영재 프로듀서가 직접 사운드, 믹싱, 예고편 등을 담당하는 등 <우리학교>는 스텝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재능과 열정을 다해 애정으로 만들어낸 영화임을 알 수 있다.

<우리학교>의 모든 편집이 끝나고 최초로 상영된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화면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우리학교>는 근래 제작된 디지털 영화 중 최고의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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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와 스탭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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