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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화속으로

71-Into The Fire 71-Into The Fire

2009 한국 12세이상관람가

전쟁, 블록버스터 상영시간 : 120분

개봉일 : 2010-06-16 누적관객 : 3,385,706명

감독 : 이재한

출연 : 차승원(박무량) 권상우(구갑조) more

  • 씨네2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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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그들을 기억하라!

낙동강 사수를 위한 최후전선
이곳을 지키지 못하면 가족도, 고향도, 조국도 사라진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한국 전쟁이 시작된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무장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쪽으로 진격을 거듭하고, 남한군의 패색은 짙어져만 간다. 전 세계가 제 3차대전의 공포에 휩싸이자 UN은 엄청난 수의 연합군을 대한민국에 파병할 것을 결정한다. 이미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남측은 연합군의 도착을 기다리며 낙동강 사수에 모든 것을 내걸고 남은 전력을 그곳으로 총집결 시킨다.

“지금부터 이곳은 학도병 제군들이 맡는다. 우리 3사단은 낙동강전선에 투입된다.”
“우리보고 여를 지키라는 겁니까? 우리끼리만요?”


포항을 지키던 강석대(김승우)의 부대도 낙동강을 사수하기 위해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하지만 이제 전선의 최전방이 되어버린 포항을 비워둘 수는 없는 상황. 강석대는 어쩔 수 없이 총 한 번 제대로 잡아 본 적 없는 71명의 학도병을 그곳에 남겨두고 떠난다. 유일하게 전투에 따라가 본 적이 있다는 이유로 장범(최승현-T.O.P)이 중대장으로 임명되지만, 소년원에 끌려가는 대신 전쟁터에 자원한 갑조(권상우) 무리는 대놓고 장범을 무시한다. 총알 한 발씩을 쏴보는 것으로 사격 훈련을 마친 71명의 소년들은 군인들이 모두 떠난 포항에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른 채 석대의 부대가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부산은 이 박무랑이가 제일 먼저 접수합네다. 766은 포항으로 진격한다!”

영덕을 초토화 시킨 북한군 진격대장 박무랑(차승원)이 이끄는 인민군 766 유격대는 낙동강으로 향하라는 당의 지시를 무시하고 비밀리에 포항으로 방향을 튼다. 영덕에서 포항을 거쳐 최단 시간 내에 최후의 목적지인 부산을 함락시키겠다는 전략. 박무랑의 부대는 삽시간에 포항에 입성하고, 국군사령부가 있던 포항여중에 남아있던 71명의 소년들은 한밤중 암흑 속을 뚫고 들려오는 소리에 잠을 깬다. 고요함이 감돌던 포항에는 이제 거대한 전운이 덮쳐 오고,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강석대 대위는 학도병들을 걱정할 틈도 없이 시시각각 모여드는 인민군 부대와 맞서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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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별점 (5명참여)

  • 4
    박평식겉멋 속으로
  • 3
    이동진갓 제대한 학도병들이 만든 영화 같다
  • 2
    이용철전쟁 장르의 진화와 시대정신에 모두 역행한다
  • 4
    황진미뉴라이트 역사관에 빛나는 150억원짜리 반공영화
  • 4
    강병진총들고 탱크를 탄 감독의 심정
제작 노트
낙동강 전투와 포항 전투

“더 이상 후퇴할 수도 없고 밀릴 수도 없는 마지막 방어선,
낙동강이 뚫리면 끝이다!”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손에 넣은 북한군은 낙동강 근처까지 파죽지세로 남진을 계속한다. 낙동강이 뚫리면 부산을 지켜낼 수 없는 상황. 남한군은 낙동강 사수를 위해 8월 1일 낙동강 교두보의 구축명령을 내리고, 8월 3일부터 의성, 마산, 영산, 안강, 포항, 왜관 등 경상북도 일대에서 낙동강 지지선을 사수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포화속으로>는 남한의 마지막 대동맥을 끊기 위해 압도적인 화력과 병력으로 무장한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결집하고 있던 그때, 낙동강과 포항 일대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처절한 전투를 그린 전쟁실화다. 비록 전쟁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지만, 1950년 8월, ‘피바다’로 불린 그곳에서 싸웠던 이들에게 그것은 전부를 건 마지막 전투였다.

1950년 8월 10일 포항여중 전투

“포항을 버리자는 겁니까?”
“그럴 순 없다. 포항이 뚫리면 낙동강 전선은 앞뒤로 포위된다.”
“그럼 어느 부대가 포항을 맡습니까?”


1950년 8월 10일

기록에 따르면 당시 포항에는 수 백 명의 남한군 정규 병력과 함께 비무장 병력인 학도병 71명이 대기 중이었다. 당시 학도병들은 전쟁에 참여할 의무가 없었음에도 자신들이 따르던 정규군 장교를 따라 포항으로 향한 것이었다. 전력 면에서 열세였을 뿐 아니라 북한군의 진격 정보를 알지 못한 포항은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였다.

1950년 8월 11일

최후의 전선을 지키기 위해 모든 전력을 낙동강으로 집중시켜야 했던 남한군은 포항을 학도병 71명에게 맡기고 떠난다. 8월의 11일 새벽 4시. 학도병 71명만이 남은 그곳에 6발의 신호탄이 터짐과 동시에 총성이 들려왔다. 날이 새면서 시야가 분명해질 무렵 포항여중 정문 앞으로 북한군 766 부대의 행군종대가 다가오는 것이 눈에 띄었고, 이들의 행렬이 50m 전방에 이르렀을 때 대기하고 있었던 학도병들은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다. 이 사격으로 북한군의 대열은 순식간에 무너졌지만 잠시 후 전열을 가다듬은 이들은 장갑차 부대를 앞세워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북한군은 학도병들에게 항복을 종용하였지만 71명의 학도병은 이를 거부한 채 얼마 되지 않는 실탄이 소진될 때까지 응전하였고, 실탄이 떨어지자 적이 던진 수류탄을 되받아 던지는 혈전을 펼쳤다.

11시간 동안 벌어진 포항 여중에서의 전투로 북한군 60여명이 사망하였으며 학도병 47명이 꽃다운 젊은 목숨을 잃었다. 포항에서 낙동강까지는 2시간 거리. 71명의 학도병이 북한군의 남침을 11시간 동안 지연시킨 포항전투는 낙동강을 사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어진 국군과 연합군의 반격에 크게 기여했다.

한국전쟁 속 학도병

“만약에요, 빨갱이들이 쳐들어 오면 우얍니까?”
“도망치면 안되지예? 끝까지 싸워야지예?”
“비겁하게 나만 집에 있을 수 있나? 친구들이 다 싸우다 죽었는데.”


전쟁과는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낯선 ‘학도병’은 전쟁에 참여한 학생 군인, ‘학도의용군’을 칭하는 말이다. 불과 60년 전인 1950년대 대한민국의 교육 환경은 상상 이상으로 열악했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이상의 학력만 가져도 선생님이나 공무원이 될 수 있었던 시절. 그렇기에 교육을 받은 인재들은 나라를 이끌어갈 재목으로 여겨졌었고 이는 전쟁 발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정부는 나라의 미래를 위해 어린 학생들의 참전을 극구 만류했지만 이들은 교복을 입은 채 학교를 떠나 전쟁터의 한 복판에 섰다. 한국전쟁 당시 학도병은 어린 소년부터 대학생은 물론 귀국한 유학생, 여학생들까지 다양했다. 낙동강 전투가 있었던 경상북도에서 희생된 55개교 286명을 비롯, 한국전쟁 중에 희생된 학도병의 수는 근 3천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군번도 없고 소속도 없었기에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포화속으로 사라져간 학도병의 수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60년간 잊혀졌던 학도병들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싶었던 제작진은 학도병 전원을 오디션을 통해 선발했다. 이들은 영화의 주인공이자 전쟁 실화의 주인공으로 60년간 잊혀졌던,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새롭게 써 나갈 것이다.

* 참고 문헌 : 한국 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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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

  • [제8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신인남우상 후보
  • [제8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시각효과상 후보
  • [제8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시각효과상 후보
  • [제8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음향상 후보
  • [제8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음향상 후보
  • [제31회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 수상
  • [제31회 청룡영화상] 기술상 후보
  • [제31회 청룡영화상] 촬영상 후보
  • [제31회 청룡영화상] 조명상 후보
  • [제47회 대종상 영화제] 신인남우상 후보
  • [제47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남자신인연기상 수상
  • [제47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인기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