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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더 글로리’와 ‘사랑의 이해’가 그리는 격차 사회의 상처

최저시급의 복수, 최저금리의 사랑

한국의 복수극과 로맨스에는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서사의 주요 동력이 대개는 불평등한 계급 관계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가장 사랑받는 복수극 유형은 가진 것 없는 약자가 부패한 거대 자본 권력을 응징하는 이야기이고, 제일 흔한 로맨스 서사는 가난한 여성이 부유한 남성과의 연애로 신분 상승을 실현하는 신데렐라 이야기다. 요컨대 두 장르에는 사회적 약자의 계급 질서 흔들기라는 판타지가 반영되어 있다.

계급 격차가 한층 심화된 요즘에는 이같은 판타지도 변하는 추세다. 단순한 환상과 욕망의 차원이 아니라, 주인공이 다시 태어나는 본격 판타지 장치를 통해서만 복수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가 하면(<재벌집 막내아들>),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판타지에서나 신데렐라 스토리가 가능해진다(<금혼령, 조선 혼인 금지령>). 아예 판타지를 제거한 작품들도 등장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와 JTBC 금토 드라마 <사랑의 이해>가 여기에 해당한다. “2022년 대한민국의 계급은 돈이 정한다”는 현실 인식을 공유한 두 작품은 각각 구원과 낭만의 판타지를 삭제한 복수와 사랑을 통해 격차 사회 한국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비춘다. 특히 계급 피라미드 구조의 밑바닥에서 그 충격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상처에 주목한다.

구원 없는 복수, 낭만 없는 사랑

<더 글로리>는 계급 사회 한국의 축소판인 학교를 배경으로 한 복수극이다. “부모의 직업, 재력, 인맥”에 의한 서열 체계가 공고한 그곳에는, 무슨 짓을 해도 처벌받지 않는 최상층과 무슨 일을 당해도 보호받지 못하는 최하층 아이들이 존재한다. 서열 최고 등급에 위치한 박연진(임지연, 신예은) 일당은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학생들만 지목해 그저 재미로 잔혹한 폭력을 휘두른다. 퇴폐 이발소에서 일하는 모친 밑에서 방임되던 문동은(송혜교, 정지소)도 그런 피해자 중 하나다. 온몸에 지독한 화상을 입고 영혼까지 파괴된 동은은 결국 학교를 나와 온 생을 건 복수를 다짐한다.

흥미로운 부분은 여기서부터다. 기존의 한국 복수극은 나락으로 떨어진 약자들이 복수할 힘을 키우는 빌드업 과정에서 계급 판타지를 드러낸다. 복수극의 대명사 <아내의 유혹>(SBS)에서 학대당하던 전업주부 구은재(장서희)가 재력가의 딸로 거듭나는 과정이 대표적이다. <더 글로리>는 그런 판타지와는 거리가 멀다. 일단 고착화된 계급 사회에서 하류층과 상류층의 접점을 찾기조차 어렵다. 동은은 그들 세계의 약점을 잡기 위해 수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쓰레기봉투를 뒤져야 했다. ‘어둠의 공모자’ 강현남(염혜란)과 손을 잡은 뒤에는 최저시급으로 노동을 교환하며 필요한 정보를 얻는다. 진짜 “복수에는 돈이 든다”. 그것도 많이. 가진 것 없는 약자가 다시 태어나는 정도의 판타지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복수가 불가능한 세계에서, 동은의 유일한 선택지는 가해자와 함께 ‘천천히 같이 말라 죽어가는’ 동반 죽음의 길이다. 가해자는 천벌받고 피해자는 구원받을 기적의 가능성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랑의 이해>는 격차 사회의 상처를 연애에 적용한다. 여기서 계급 사회의 축소판은 은행이다. <더 글로리>가 가해자 그룹 안에서도 신분, 재력의 크기에 따른 계급 차를 꼼꼼하게 묘사한 것처럼 <사랑의 이해>도 출신 배경, 스펙 등에 따른 위계가 뚜렷한 세계를 그린다. 인물들의 사회·경제적 격차는 먼저 고용 형태와 직급에 그대로 반영된다. 상류층 박미경(금새록)은 조기 승진한 대리, 중산층 하상수(유연석)는 본점 발령을 꿈꾸는 계장, 서민층 안수영(문가영)은 직군 전환 시험에서 번번이 탈락하는 창구 전담 직원, 하류층 정종현(정가람)은 용역업체에서 월급을 받는 은행 경비원이다. 은행은 이들의 직급에 따라 선을 긋고 차별 대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가령 종현은 자신의 업무 외에도 커피 사오기, 구두 가져오기 등 다른 직원들이 맡긴 잡일을 도맡아서 해야 한다.

계급 격차는 연애에도 영향을 미친다. 계급 피라미드 구조의 아래로 내려갈수록 연애 시장에서도 약자들이다. 극중에서 사각관계에 놓인 주인공 가운데 연애 관계를 주도하는 인물은 상류층 미경뿐이다. 상수는 수영과의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결정적 기회 앞에서 망설이다가 그녀를 놓치고, 그의 머뭇거림을 목격한 수영은 더 큰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모래성을 무너뜨리는’ 길을 택한다. 수영에게 경제적 도움까지 받는 종현은 사랑을 압도하는 부채감 때문에 자꾸만 도망친다. ‘복수에 돈이 들 듯’ 로맨스에도 돈이 든다. 미경의 친구들을 소개받던 날, 120만원에 달하는 청구서 앞에서 주저하다 3개월 할부로 비용을 치르는 상수의 상황처럼 드라마는 자꾸만 마음을 위축시키는 계급의 현실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사랑으로 모든 장벽을 초월하는 낭만적 판타지는 거기에 발을 붙이기 어렵다.

또 하나의 상처, 젠더 격차

<더 글로리>와 <사랑의 이해>, 두 작품의 공통점은 계급 불평등 인식에만 그치지 않는다. 거기에는 계급과 더불어 지금 한국 사회의 가장 첨예한 갈등 요인인 젠더 격차의 상처도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문동은은 학교 폭력 피해자이자 젠더 폭력 피해자이기도 했다. 교사가 된 뒤에도 동은은 재단 이사장과의 불륜을 의심받는 등 계속해서 검열의 대상이 된다. 단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이유로. 젠더 격차를 더 잘 드러내는 인물은 조력자 강현남이다. 동은보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더 낮은 현남은 심각한 가정 폭력에 시달려도 복수의 꿈조차 꾸지 못한다. 그러다 딸마저 위협적 상황에 놓이자, 현남은 자신의 노동을 제공해 동은에게 대리 복수를 부탁한다. 동은과 현남이 암호처럼 사용하는 사모님과 이모님이라는 비하적 호칭에는 계급을 초월한 여성들의 차별적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두 사람이 함께 연대할 수 있는 이유는 계급적 동질감이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공감대다.

<사랑의 이해>도 마찬가지다. 젠더의 관점을 적용하면 이 작품의 위계 질서는 다시 뒤집힌다. 경제적 최약자는 종현이었지만, 계급과 젠더의 중층 차별을 겪는 수영이 그의 아래에 놓이게 된다. ‘영포점 여신’이라 불리는 수영은 모든 남자 직원들의 관심을 끌지만 ‘고졸’에 텔러 출신이라는 초라한 스펙 때문에 진지한 연애의 대상으로는 고려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남자들은 끊임없이 그녀를 추문의 대상으로 삼고, 심지어 지점장은 성추행까지 일삼는다. 집단 괴롭힘에 지친 수영이 모든 관계를 끝장내기 위해 가십을 이용했을 때, 종현이 취한 행동은 그의 젠더 권력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지금, <더 글로리>와 <사랑의 이해>는 우리 사회의 첨예한 갈등 요인인 계급과 젠더 격차의 상처를 가장 뜨겁게 그려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복수극과 로맨스에서마저 판타지가 힘을 못 쓰는, 그 지독한 상처의 풍경은 격차가 이미 심화될 대로 심화된 한국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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