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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엽 편집장] 가해자의 서사
장영엽 2020-03-27

미국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의 네 번째 시즌에는 자신이 사람을 죽이는 걸 멈추게 해달라며 범죄 현장에 도와달라는 문구를 남기는 연쇄살인마가 등장한다. 시리즈의 주인공인 프로파일러들 대신 범죄자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이 에피소드에는 절절한 사연이 한가득이다. 살인자의 잔혹한 범죄 행각이 불행한 유년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비롯되었고, 하필이면 그가 죽인 여성의 시각장애인 아들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을 안 살인마가 소년에게 연민의 감정을 품게 된다는 내용이다. 살인마와 소년의 지속될 수 없는 우정을 다룬 해당 에피소드(2009년에 방영되었다)는 2020년에 돌이켜 생각했을 때 경악스러운 지점이 많다. 살인자에게 과거의 트라우마라는 서사를 부여해 그의 인간적인 측면을 부각하고, 잔혹하게 살해된 피해자들의 죽음을 트라우마의 희생양으로 치부함으로써 피해자의 자리를 지우는 방식의 연출은 요즘이었다면 시청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으리라 짐작한다.

<크리미널 마인드>의 한 에피소드를 지금 이 시점에서 떠올리게 된 이유는 텔레그램 박사방 성 착취 사건의 주범 조주빈이 남긴 말 때문이었다. 그는 3월 25일 종로경찰서 포토라인 앞에 몰려든 기자들에게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춰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악마’로 지칭하며 자신의 범죄를 밝혀낸 수사팀에 감사의 말까지 전하는 조주빈의 화법은 <크리미널 마인드>의 한 대목을 모방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장황하고 과장된 자아도취의 표현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착잡하게 느껴진 건 스스로 범죄드라마의 주인공 역할을 맡을 준비가 되어 있는 성범죄자의 장단에 맞춰 가해자의 서사를 써내려가는 언론의 보도 방식이었다. 조주빈이 포토라인에 선 뒤, 기사의 초점은 그가 맥락 없이 사죄의 뜻을 언급한 유명 인사들과의 관계를 조명하는 쪽으로 방향을 옮겨갔다. 대학 시절 그의 행적과 학점을 구체적으로 보도하며 평범한 청년/흉악한 범죄자로서의 이중성을 부각하는 기사도 적지 않았다. 이에 언론노조 성평등위원회와 민주언론실천위원회가 3월 24일 취재와 보도 과정에서 피해자 보호를 최우선할 것, 가해자의 책임이 가볍게 인식되지 않도록 할 것, 성범죄는 비정상적 특정인에 의한 예외적인 사건이 아님을 분명히 할 것 등의 내용을 담은 긴급 지침을 발표하기도 했다. 짐승, 늑대, 악마와 같은 표현을 가해자에게 적용하는 건 가해 행위를 축소하거나 가해자를 비정상적인 존재로 타자화해 예외적 사건으로 인식하게 한다는 지적, ‘성 노리개’라는 표현 자체가 인간인 피해자를 물건 취급함으로써 피해자가 느꼈을 감정에 대해 공감할 수 없게 한다는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가해자의 잔혹함과 기이한 행각을 강조함으로써 가해자 중심의 서사를 극적으로 서술하고 피해자를 도구화하는 옐로저널리즘적 행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테러범에게 악명조차 불허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폭력적인 개인이 갈구하는 대중적 관심을 원천 차단하겠다고 말한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의 결정이 한국에서는 어려운 일일지 생각해보는 한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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