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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우연의 희극, 엇갈린 인연의 비극, <매그놀리아>
박은영 2000-04-11

퀴즈쇼를 중심으로 얽혀 있는 인간 군상을 그린 <매그놀리아>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퀴즈쇼다. 영화 시작과 함께 던져지는 알 듯 모를 듯한 이야기들. 그린 베리 힐의 한 선량한 약사가 강도 셋에 피살됐는데, 범인들 이름이 그린, 베리, 힐이더라. 헬기에서 떨어져 죽은 다이버와 그를 떨어뜨린 조종사가, 사건 며칠 전 카지노 블랙잭에서 다퉜다더라. 옥상에서 몸을 날린 꼬마가 부부싸움중이던 부모의 총기 오발로 추락중에 즉사했는데, 그 총은 부모의 싸움에 넌더리난 꼬마가 아무나 죽어버리라는 심정으로 장전했다더라. <매그놀리아>는 우연치곤 기막히게 우스꽝스럽고 비극적인 상황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걸 우연이라 부를 수 있을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하는 물음과 함께. 아홉이나 되는 주인공들에 휩쓸리다 보면, 그 해답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영화의 큰 축은, 죽어가는 아버지들이다. 그들은 죽음이 다가오자 비로소 그들의 이기심으로 가족들이 상처받았다는 걸 깨닫는다. 거물 프로듀서 얼은 병든 부인과 어린 아들을 팽개쳤고, 퀴즈쇼 호스트 지미는 어린 딸을 강간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그 모두가 흐린 과거일 뿐이다. 얼은 가족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는지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으며 한탄하고, 지미는 딸을 범한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기억이 안 난다”고 하소연한다. 얼의 새 아내도 바람피우고 재물을 탐한 기만과 배신의 과거를 뉘우치지만, 그 죄책감을 씻을 길이 없다. 반면 버림받고 상처입은 이들에게 과거는 그저 ‘과거’라는 이름의 현재일 뿐이다. 얼의 아들 잭은 이름과 성을 뜯어고치고, 가짜 가정환경 기록을 만들어 지난 흔적을 지우려 애쓰고, 지미의 딸 클라우디아는 마약과 섹스로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한다. 또 지미의 퀴즈쇼가 30년 전에 배출한 ‘신동’ 도니는, 패배자로 전락한 오늘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이 마당에, “과거의 지식은 현재의 보배”라는 퀴즈쇼의 캐치프레이즈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기묘한 우연의 일치. 엇갈린 인연의 비극. <매그놀리아>에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가족을 비롯한 온갖 인간관계에 잠복해 있는 비극성을 이야기한다. 70년대 할리우드 변방의 포르노산업을 그린 <부기 나이트>가 20년의 세월을 건너 메이저 방송사의 퀴즈쇼로 자리를 옮겨온 듯도 하지만, <매그놀리아>는 가족에 상처받고 대체(유사)가족에 그 상처를 치유받는 이들의 이야기에 집중한, 좀더 내밀하고 소박한 영화다. 그의 영화에서 상처받은 이들을 보듬는 쪽은 언제나, 과거와 피의 인연을 나누지 않은 타인들이다. 간병인 필은 얼과 그 아들 잭의 재회를 주선하고, 경찰관 짐은 아편굴처럼 어두운 방에 파묻힌 클라우디아를 일으켜 세운다. 이야기의 구성상 자주 비견되는 알트먼의 <숏컷>과 가장 다른 지점은, 용서와 화해를 주선하는 이들의 존재, 그리고 상처입은 모두를 향한 감독의 애정어린 시선이다. 통찰력의 성숙도로 보면, 스물아홉 나이가 의심스럽지만, 스타일은 젊은 감독답게 발랄하다. 같은 시간과 공간으로 얽힌 인연은 인물을 따라 스테디캠으로 숨가쁘게 잡아내고, 의미심장한 프롤로그는 다큐멘터리 효과로 관객을 도발한다. 감독이 영화의 원전이라고 밝히는 에이미 만의 노래는 아름다움과 비애를 보태며,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과 리드미컬한 편집은 환상적인 조화를 이뤄낸다.

“캐릭터 과잉, 감정 과잉, 러닝타임 과잉”이라는 불평까지 감싸는 이 영화의 미덕은 ‘너그러움’이다. 분노와 회한, 절망에 싸인 사람들은 빗속에서 “처음엔 믿었지. 그게 사랑이라고. 이젠 아픔이 됐네” 하고 노래를 시작한다. 걷잡을 수 없는 상황 속에 감정이 폭발하려는 다음 순간, 하늘에선 엉뚱하게도 개구리 비가 내린다. 사회면 기사가 동화로 돌변하는 것 같은 이 대목의 상징은, 하늘의 단죄일 수도, 용서일 수도 있다. 이렇듯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일어나는 세상, 심판이나 용서는 인간의 몫이 아닌 것이다.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과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톰 크루즈)을 수상했으며, 아카데미 3개 부문(각본상, 남우조연상, 주제가상)에 올랐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배우들

앤더슨 사단이라 부르리

필립 베이커 홀

필립 세무어 호프먼

한 해외 인터넷영화 사이트에선,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을 “필립 베이커 홀, 필립 세무어 호프만, 존 C.라일리 등의 특정 배우 캐스팅이 트레이드 마크”라고 소개하고 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연출작 세편에 그들이 출연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선댄스재단의 부분 지원으로 완성한 첫 영화부터의 인연인지라 감독에겐 매우 각별한 모양이다. “그들은 내 가족이나 다름없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그들을 염두에 두고 쓴다”는 감독의 특별 배려에, 인디영화계에 뿌리를 둔 이들의 개성과 연기력이 어우러져, 그간 상당한 상승효과를 거뒀다.

무표정한 얼굴의 베테랑 방송인 지미 게이터 역의 필립 베이커 홀은 지적이면서 강한 이미지 때문에 주로 ‘대부’급 캐릭터를 소화한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데뷔작 <리노의 도박사>는 그의 풍모와 연기력이 돋보이는 작품. 실의에 빠진 청년에게 판돈을 대주고, 도박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아름다운 여인과 맺어주는 퇴역 도박사 시드니로 분해, 지난날 청년의 아버지를 죽인 과거를 묻고, 청년과 부자지간처럼 지내려는, 이중적인 욕망을 연기했다. <부기나이트>에선 포르노계의 거물로 파티장면 등에 잠깐 얼굴을 보였다. 최근 <리플리>와 <플로리스> 등에 출연한 필립 세무어 호프만은 폴 토마스 앤더슨의 작품 안에서도 매번 변신해 왔다. <매그놀리아>에서 가장 인간적인 캐릭터인 간병인 필을 연기한 그는, <부기나이트>에선 포르노 스타가 된 에디를 흠모하는 동료로 분했고, <리노의 도박사>에선 시드니와 도박장에서 만나는 건달로 잠깐 나왔다. 마약과 폭력에 찌든 소녀에게 사랑을 느끼는 선한 경찰관 짐 역의 존 C.라일리는 “잘난 외모는 배우의 감옥”이라고 외치는 개성파 배우다. <리노의 도박사>에선 시드니의 호의를 받아들이면서 그를 아버지처럼 대하는 청년 존을 연기했고, <부기나이트>에선 에디의 친구로 나왔다. 클라우디아 역의 멜로라 월터스는 <리노의 도박사> <부기나이트>에서 단역으로 출연한 바 있다. 이 밖에 줄리언 무어와 윌리엄 H. 메이시가 <부기나이트>에 이어 <매그놀리아>에도 합세했다. 반면 버트 레이놀즈는 <부기나이트>에서 “사상 최고의 연기를 보여줬다”고 호평받았지만, 자기 주장을 내세우며 팀워크를 해쳐 감독에게 퇴출당한 케이스. <리노의 도박사>에서 웨이트리스로 열연한 기네스 팰트로는 “어울리는 작품, 좋은 작품에서 다시 만나자”며 감독과의 재회를 기다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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