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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스럽고 도발적인 포르노그라피, <감각의 제국>

60년대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는 칼바람 소리가 났다. 어떤 일본 감독도 기성사회와 그렇게 맹렬하게 싸운 적이 없었다. 재일동포 차별, 사형제도, 전후 일본민주주의 실패, 일본 공산당의 스탈리니즘적 몽매함을 가차없이 내리쳤고, 나중엔 국가의 존재가치까지 부인했다. 일본인 심성의 밑바닥을 헤집으면서 느리고 긴 싸움을 벌였던 이마무라 쇼헤이가 “내가 농부라면 오시마는 사무라이”라고 할 만했다. 그러던 그가 70년대가 되자 변했다. 아무리 “체제가 바뀌어도 밑바닥 인생들은 그대로다.” “일본을 떠나 국제적 감독이 되고 싶다.” 등의 체념적 발언을 하더니, 갈기를 휘날리며 도쿄 거리를 누비던 거친 모습은 사라지고 깔끔한 양복차림으로 TV 여성상담프로에 나왔다. 프랑스의 아르고스필름이 제작비를 댄 <감각의 제국>은 그 와중에 태어난 영화다.

<감각의 제국>의 원제는 ‘사랑의 투우’다. 투우는 투우사와 소 가운데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게임이다. <감각의 제국>의 주인공들은 서로에게 무섭게 집착한다. 하지만 그들에겐 로맨스가 없다. 그리움도 애틋함도 없다. 대신 상대방의 성기에만 광적으로 집착한다. 두 사람은 심지어 애무도 제대로 하는 법 없이 곧바로 성기 섹스에 돌입한다. 아베는 수 차례의 섹스 뒤에도 밤새 이시다의 성기를 잡고 잠든다. 아베의 성기에 계란을 넣었다가 빼서 먹을 때, 이시다에게 그 곳은 계란의 상태처럼 태아가 되어 돌아가고 싶은 곳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성기에 자신을 영원히 파묻고 싶어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표면적 이유는 이시다는 유부남이고, 아베는 기생이기 때문이다. 이시다의 성기는 주로 아내에 속해 있고, 아베의 성기는 그의 고객에게 열려 있다. 상대방의 성기를 영원히 소유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베가 택한 건 그걸 잘라내 몸에 지니는 길이다. 투우에서처럼 그건 상대방의 죽음을 통해 가능한 길이다. 그리고 그건, 투우와는 달리, 사회적 율법에 의해 자신도 죽는 길이다.

일본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1936년의 실화를 영화로 옮기면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이 모든 과정을 어떤 우회도 없이 직접적으로 아주 자세하게 보여준다. 어떤 나라에서도 그대로 개봉하기 힘들 만큼. <감각의 제국>이 일본에서 7년 동안 법정 피고가 됐던 이유고, 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10여분이 잘린 채 상영된 이유다. 이 때문에 오시마 나기사를 전혀 접해보지 못한 외국인들도 그 제목만은 들을 수 있거나, 한국에서처럼 복제된 비디오 테이프로 널리 유통되는 엉뚱한 유명세는 치를 수 있게 되었다. 노컷 버전을 볼 수 없었던 일본인들에게도 ‘파리관광 및 오리지널 <감각의 제국> 관람’은 당시에 가장 인기있는 여행상품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감각의 제국>은 뻔뻔스럽고 도발적인 포르노그라피다. 일본에선 동반자살(일본식 표현으로는 ‘心中’)로 끝맺는 기생과 유부남의 불륜은 전통극 가부키에서 정형화된 이야기다. 수세기 동안 숱하게 반복돼온 비극적 불륜담을, 오시마 나기사는 아주 엽기적인 표현으로 되풀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데이비드 톰슨 같은 저명한 평론가는 오시마의 다음 작품인 <열정의 제국>(1978)과 묶어 ‘국제사회에서의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의도한 얄팍한 기획’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상주의적 열정이 사라지자 오시마는 그 빈자리를 선정성으로 채우려 한 걸까.

서구의 많은 평론가들은, 그러나, <감각의 제국>을 기꺼이 오시마 나기사의 대표작의 하나로 꼽는다. 그들에 따르면 <감각의 제국>은 ‘사회적 컨텍스트로부터 자신을 이탈시키려는 관계의 운명적 파멸’(다나 폴란)을 다룬 정치 영화다. 오시마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두 남녀의 섹스는 사회적 속박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필연적인 충동”이다. 이시다가 거리를 걸어갈 때 보이는 군인들의 행진은 역사의 엄연한 존재를 상징하지만, 그는 외부 세계를 외면한 채 여관방의 쾌락에 자신을 감금한다. 두 남녀의 성은 반역적이지만, 섹스 외의 소통을 거부함으로써, 그들 사이에 적대와 억압을 재생산하고, 결국 자기 파괴를 피하지 못한다. 그들의 섹스는 죽음에 이르는 제의인 것이다.

<감각의 제국>은 정치적 이슈에서 더이상 활력을 찾지 못한 오시마 나기사가 개인의 비이성을 탐색하기 시작한 첫 시도다. 아베 사다의 모습에서 전복적 성정치학을 읽는 평론가도 있지만, 그 속엔 역사적 전망이 사라진 70년대 일본사회에 절망한 한 열혈 이상주의자의 비감한 시선이 느껴진다. 시각적 화려함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던 60년대와는 반대로, 오시마는 극단적인 인공미로 화면을 장식한다. 여관방 너머로 보이는 저녁놀은 너무 선명해서 세트처럼 보일 정도다. 수시로 등장하는 의상과 피와 저녁놀의 붉은색은 타오르듯 강렬해서 영화 전체가 한 탐미주의자의 불꽃놀이 같은 느낌마저 준다. 오시마는 정말로 자신의 예술적 정치적 에너지를 다 태워버린 듯, 60년대에 비견할 만한 미학적 성취에 다신 이르지 못했다. 한국 개봉판은 국제 개봉판에서도 5분 정도 잘렸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

일본의 고다르, 오즈와 미조구치는 가라!

흔히 ‘일본의 고다르’로 불리는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1932∼)는 보수적 일본영화인들에게 탕자의 모습으로 처음 등장했다. 그는 데뷔 시절부터 일본영화의 양친인 오스 야스지로와 미조구치 겐지가 대표하는 일본적 영화미학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며, 전통적 미학과 전면전을 벌인 전후 일본영화계 최대의 문제아였다. 또한 그는 전후 일본사회의 반민주성과 악덕과 위선을 가차없이 공격한 열정적 영화 투사였다. 60년대 일본영화의 뉴웨이브는 오시마에게서 비롯됐고 오시마에게서 끝났다. 물론 오시마의 이름을 세계영화계에 새긴 것은 물론 그의 정치적 전투성이 아니라, 기성 형식에 대한 쉼없는 도발을 통해 정치영화의 한 전범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교토대 법학부 출신이며 교토학생연맹 의장 출신의 신좌파 인텔리였던 오시마는 쇼치쿠영화사에서 1959년 27세의 어린 나이에 <사랑과 희망의 거리>로 데뷔한다. 이듬해 만든 <청춘잔혹이야기>는 절망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청춘 남녀의 파멸기를 파격적인 형식에 담아낸 수작. 이 영화는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대대적 성공을 거두면서, 새로운 물결의 도래를 알린다. 곧이은 <일본의 밤과 안개>는 일본 공산당의 스탈리니즘적 몽매성을 맹공한 노골적인 정치적 논평과 전위적 형식이 결합한 문제작. 그러나 영화사가 3일만에 간판에 내리자 이에 항의하며 독립프로덕션 쇼조사를 차린다. 이후 그가 내놓은 <교사형> <백주의 살인마> <신주쿠 도둑일기> <도쿄전후비사> 등은 60년대 일본 뉴웨이브의 탁월한 미학적 성취를 보여주는 오시마의 대표작들. 연극적 기법의 거리낌 없는 활용, 픽션과 다큐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실험성, 예민한 정치적 통찰이 그의 60년대 영화를 특징짓는다.

그러나 70년대 들어서부터 그의 활동력은 급격히 저하한다. 국제적 명성은 한껏 높아졌으나 왕성했던 작품활동은 뜸해졌다. 간혹 내놓은 영화들에서도 정치는 암시의 그늘로 숨었고, 거침없던 형식 실험의 순례도 거의 멈추었다. 이상주의의 만가같은 <감각의 제국> 이후에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 <막스 내 사랑>(1986)을 찍었지만, 60년대의 활달함은 회복하지 못했다. 지난해 고령의 나이로 뇌졸증의 시련을 딛고 13년만에 시대극 <고하토>를 만들어 매스컴의 화려한 조명을 받았지만, 일본 관객의 반응이 썰렁해 낙담하고 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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