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퀼스
2001-03-20

롤랑 바르트는 “사드는 어떤 방법으로든 형상화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했지만, 틀렸다. 사드의 작품과 생애는 200년 동안 다양한 예술작품 속에서 조명돼왔고, 최근 그 목록에 필립 카우프만의 <퀼스>가 추가됐다. 카우프만은 사드에게서 자기 모습을 봤는지도 모른다. 그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영화화한 <프라하의 봄>에서, MPAA가 NC-17등급 판정으로 응징한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에서, ‘위험수위’를 넘나들며 쾌락을 좇는 남녀들을 탐미적인 영상에 담았다. 성적 일탈 욕구는 반역의 에너지, 자유와 이상의 메타포로, 카우프만의 작품 속에 중요한 테마로 자리잡고 있다. 왕정을 반대하고 절대 자유를 추구하던 반체제 예술가 사드의 생애에, 카우프만의 에로틱한 필모그래피를 겹쳐 떠올리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깃촉’(펜)을 뜻하는 제목 ‘퀼스’(quills)는, 카우프만이 사드의 생애, 사드의 신념 어디에 포커스를 맞출지에 대한 어렴풋한 힌트가 된다. 젊은 시절의 사드가 일삼던 잔인하고 변태적인 기행을 생략하는 대신, 정신병원에 감금돼 집필하던 생애 말기로 이야기를 집중시킨 것. 창 밖으로 단두대가 보이는 병실에 유폐된 사드가 피의 광기에 사로잡히고 욕정의 출구를 찾지 못해 고안한 쾌락의 향연은, 꿈꾸는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일종의 투쟁으로 그려진다. 종이와 펜을 빼앗기자 침대 시트에 포도주로, 옷에 피로, 벽에 대변으로, ‘변태의 복음’을 적어나가는 사드는, 검열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하는 후대 예술가들과 시공을 초월해 공명한다. 사드의 광기를 부추기는 건 ‘고상함과 결벽증으로 무장한 위선자들’이다. 의자 밑에서 대롱거리는 나폴레옹의 짧은 다리를 우스꽝스럽게 잡은 화면에서 보여지듯, 권력자들을 ‘어떻게 비웃어줄까’ 하는 것이 사드의 고민이자, 감독의 고민이다. “심장 박동과 발기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는 사드에 의해, 과학과 신앙이 ‘약’이 된다는 믿음의 허상은 발가벗겨진다. 이는 사드와 갈등을 빚는 두 사람, 의사이자 고문 기술사인 꼴라와 샤렝턴 병원 원장인 쿨미어 신부의 변화로 드러난다. 보수적이고 위선적인 꼴라 박사는 순결하고 어린 아내가 사드의 금서를 읽고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이자 이성을 잃고, 사랑의 감정을 억누르던 쿨미어 신부는 마들렌이 사고로 죽자 그녀와 몸을 섞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꼴라와 쿨미어가 사드를 ‘사디즘’의 희생양으로 삼는 아이러니 역시 이들 또한 불가항력으로 사드의 왕국으로 들어섰음을 뜻한다.

사드가 정의한 쾌락, “수치심과 희열 사이의 그 어떤 느낌”은, 눈과 귀에 먼저 감겨온다. 공포와 희열, 추함과 아름다움의 이미지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관객을 도발한다. 오프닝에서 단두대에 쌓인 잘린 머리의 혈흔은 사드의 붉은 잉크로, 음란한 죄로 처형된 처녀의 피는 정신병원의 붉은 문으로 연결된다. 쿨미어와 사랑을 나누던 마들렌의 싱싱하고 아름다운 육체는 일순 창백한 잿빛의 시체로 뒤바뀌며, 금지된 환상의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보여준다. 선과 악, 이성과 본능이 뒤엉킨 인간 내면의 카오스는 배우들의 호연으로도 빛을 발한다. 사드 역의 제프리 러시는 <샤인>에 이어 악마적 재능과 광기의 캐릭터에 적역이라는 평을 이끌어냈고, 케이트 윈슬럿과 와킨 피닉스는 미완의 사랑, 비련의 연인으로 좋은 호흡을 보여줬으며, 마이클 케인은 <사이더 하우스>의 흔적을 지우고 위선적인 도덕주의자로 변신했다.

<퀼스>는 본래 희곡으로 쓰여져, 오비상을 수상한 작품. 작가 더그 라이트는 시나리오로 고쳐 쓰면서 자료와 사실을 재구성하고, 작품 캐릭터를 변조해 새로운 인물을 창조했다. 사드의 전기영화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까운 영화 <퀼스>에 카우프만의 이런 변명 아닌 변명을 보탠다. “짐승 같은 살인마로 묘사된 사드의 모습을 기대했거나, 고상한 종교적 교훈을 원했던 사람이라면 실망할 것이다. 성도착 환자나 사디스트, 마조히스트들도 내가 사드의 이름에 먹칠했다고 느낄지 모른다. 나의 불경을 용서하시라. 나의 목적은 죽은 작가를 찬양하는 게 아니고, 다만 영화를 만드는 것 뿐이었으므로….”

박은영 기자 cinepark@hani.co.kr

외설, 혹은 자유...사드의 생애

‘사디즘’(음란성 가학증)의 어원을 제공한 마르키스 드 사드(본명: 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는 1740년 프랑스 파리 귀족 가문에서 출생했다. 계몽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그는 7년전쟁에 참전하고 돌아와 사법관의 딸과 결혼했지만 자유주의자, 반체제주의자로 돌변,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다. 창녀와 신성모독의 대화를 나눈 것을 시작으로, 거지 여인을 구타하고, 창녀에게 독을 먹이는 등의 고문 행위와 성범죄로 투옥되고 풀려나기를 반복했고, 한때 사형선고를 받는 등 생의 1/3 이상(27년)을 감옥과 정신병원에서 보냈다. 그는 옥중에서도 정력적으로 집필 활동을 벌였는데, 그의 작품은 외설스럽고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묵살돼오다가, 20세기 들어서 평가받기 시작했다. 바스티유 감옥에서 집필한 <살로 소돔의 120일>은 혁명 이전 체제의 권력 특권층들이 추종자들과 함께 외딴 섬에서 쾌락의 향연을 벌이다, 고문과 살육을 자행한다는 내용. <저스틴>에선 신앙이 깊고 정숙하지만 불행해지는 저스틴, 악덕의 화신이지만 부귀영화를 누리는 줄리에트 자매의 운명을 통해 기성의 도덕을 조롱했고, 이어 줄리에트가 음탕한 수도원장과 매음굴 여주인의 도움으로 악녀가 돼가는 과정을 그린 <줄리에트>를 발간했다. 1801년, 사드는 <줄리에트>를 발간한 것이 발각된 뒤, 풍속괴란죄로 체포되고 샤렝턴 정신병원에 감금됐다. <퀼스>의 시작은 이 시절부터. 실제로 샤렝턴 병원은 심리 치료를 도입한 진보적이고 모범적인 정신병원이었으며, 사드는 여기서도 가족의 경제적인 지원으로 호사스럽게 지냈다. 쿨미어 신부는 키가 4피트밖에 안 되는 곱추였고, 사드에게 극장 운영권을 맡기는 등 호의적이었던 반면, 꼴라 박사는 사드의 집필활동을 막기 위해 경찰을 불러들였다. 마들렌의 모델도 있다. 사드는 그의 방을 방문해 글을 배운 막달렌 레클렌이라는 17살 세탁부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그러나 사드가 샤렝턴에서 집필한 근거는 남아 있지 않다. 사드는 1814년 샤렝턴에서 호흡곤란으로 사망해 샤렝턴 묘지에 묻혔다. 그의 생애와 작품을 다룬 영화로는 파졸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 브누아 자코의 <사드>, 피터 브룩의 <마라와 사드>, 앙리 조네의 <마르키스>, 지저스 프랑코의 <마르키스 드 사드:저스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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