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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원의 노래가 끝났지만] 정성스럽게 내린 커피의 맛
윤덕원(가수) 2022-07-21

원래 커피를 좋아했지만 올 상반기는 특히 커피를 즐겼던 것 같다. 집에서 사용하던 소형 에스프레소 머신을 조금 업그레이드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커피 메이커를 작업실에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집에 하나 더 구입하기도 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가입해 다양한 원두를 구매해서 마셔보기도 했다. 많을 때는 서너 종류의 커피 원두가 항상 책상 위에 있었다.

장비와 용품을 구입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같이 즐길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더 즐겁다. 마침 브로콜리너마저에서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동혁씨가 커피에 관심을 가지면서 더욱 즐거운 커피 생활을 누리고 있다. 새롭게 구입한 원두를 가지고 와서 합주 전에 마셔보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새로운 공동구매 정보를 공유하기도 하며, 서로가 연습해본 추출 방법을 시연해보기도 한다. 올봄에는 따로 시간을 내서 커피 박람회도 다녀왔다.

커피를 내리는 방법은 정말 다양하지만, 내 경우에는 여러 가지로 시험해본 뒤에 주로 무게와 양을 맞추고 나서 조금 섬세하지 않게 물을 부어서 추출하고 있다(푸어오버라고 불리는 방식이다). 혼자 마실 때는 그냥 물과 커피 양만 맞추면 커피가 만들어지는 1인용 커피 머신을 사용한다. 간편해서 좋은데 맛도 나쁘지 않아서 애용하고 있다. 에스프레소 머신은 빠르고 커피가 진해서 좋다. 출근 전에 마시고 나갈 때 애용한다.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지다 보니 편한 방식으로 커피를 만든다. 늘 내려오던 간편함과 익숙함이 주는 장점이 있다면 아쉬운 점도 있다. 익숙한 방식으로만 커피를 마시다 보면 어느 순간 새로운 종류와 방식의 커피를 맛보았을 때 느꼈던 기쁨을 잠시 잊을 때가 있다. 그래서 새로운 카페를 방문하거나 다른 사람이 내려주는 커피를 마셔보는 시간이 중요하다. 새로운 경험을 통한 자극으로 흥미를 유지시켜주는 것인데, 이것은 본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음악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장비나 악기를 구입해서 사용해보는 것이 일에서 재미를 얻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더 좋은 결과물을 얻고 싶다는 순수한 욕심에서 사기 시작하지만, 어느 시점 이후엔 더 좋고 비싼 것 이상으로 나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가가 중요해지는 것 같다. 언제나처럼 반복되는 작업과 연습 속에서 새로운 뭔가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쳐갈 때, 새롭게 만나는 매력적인 기기들과 친해지는 과정은 큰 도움이 된다. 꼭 필요하지 않은 악기를 살 때도 많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기타는 어떤 것을 구매해야 하나요, 하는 질문에 모양이 마음에 드는 것을 사세요, 라는 답을 하는 것은 나름 근거가 있다.

어쨌든 그런 비슷한 생각으로 얼마 전에는 멀지 않은 곳에 평소에 보기 힘든 스타일의 커피집이 있다고 해서 다녀왔다. 지도를 보니 마침 예전에 살던 집 근처에 있어 길을 찾기도 편했다. 인근에서 흔치 않은 일본식 드립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이었다. 최근에 유행하는 미니멀한 인테리어와는 조금 다른, 그렇지만 정갈한 내부가 좋았다. 커피를 내리는 마스터의 익숙하면서 수없이 반복한 동작이 아름다웠고, 금박을 띄운(여기서 우리의 눈이 엄청 커졌다) 커피는 맛이 좋았다. 평소와 다르게 정말 이야기도 별로 나누지 않고(왠지 맛에 집중하게 되어 이야기를 많이 못했다) 커피를 음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오는 길에는 커피를 만들던 마스터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벽 한쪽을 가득 채운 상장(수상 경력과 맛이 항상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과 수없이 반복했을 것으로 보이는 커피 추출 과정들. 커피를 내리고 도구를 다루는 절도 있는 동작은 마치 무대 공연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누군가에게 음악을 선보이면서 이렇게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니 부끄러웠다. 원두 그라인더를 청소할까 하다가 크게 보이지도 않는 거 뭐 상관있겠어 하고 넘겼던 것도 떠올랐다. 작업하면서 하나하나 좀더 살폈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익숙함에 젖어 그냥 이 정도면 되지 뭐 하고 쉽게 넘긴 것은 없나 생각하게 되는 날이었다.

<뭐라 하기 어려운 커피맛> - 플라스틱 피플

하품 길게 늘어진

초저녁 산책을 나선

뭐라 하기 어려운 커피 맛

하루 동안의 기억

숫자로 채워진 수첩

뭐라 하기 어려운 커피 맛

그늘 의자 위 그림자 손을 내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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