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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의 오늘은 SF] 헐렁한 헬리오 특공작전

<헬리오 특공작전>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일까? 1966년작 <헬리오 특공작전>에 따르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눈에 잘 뜨이는 빨간 재킷 같은 화려한 옷을 입고 경치 좋은 프랑스 휴양지에서 어슬렁거리면서 다니다가 심심하면 술을 마시면 된다. 그러고 있으면 갑자기 아리따운 남녀가 접근해오고, 중요한 인물을 만나고, 악당들이 들러붙고, 그러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그 악당을 물리쳐준다. 만약 악당이 총을 빼앗으려고 하면 그냥 총을 주고, 악당이 그 총을 진짜로 쏘려고 하면 그냥 쏘라고 하면 된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그러다 보면 저절로 세상이 위기에서 벗어난다. <헬리오 특공작전>은 정말 그런 내용이다.

도대체 이런 영화가 왜 나왔을까? 1960년대 초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인기를 끌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아류작들이 나왔다. 원래 보통 첩보영화에는 상대방이 간첩일지 아닐지 의심하는 이야기가 나와야 하고, 정체를 숨기고 있는 주인공이 들킬지 말지 하는 아슬아슬한 장면도 나와야 하고, 그러다 보면 의외의 정체가 드러나며 관객을 놀라게 하는 반전도 있어야 한다. 그 와중에 멋진 격투 장면이나 특수 장비를 사용하는 화려한 추격전도 넣어야 한다. 이렇게까지 복잡하고 긴장감 넘치는 각본을 쓰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서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그즈음 전혀 다른 방향을 택했다. 그 방법이란 치밀한 이야기를 만드는 길을 처음부터 포기하는 것이다. 대단히 복잡하고 정교한 수수께끼 같은 것 없이 그냥 멋진 주인공이 멋 부리고 다니면서 멋진 자동차, 멋진 옷차림을 자랑하는 내용을 이어가며 선남선녀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줄줄이 보여준다. 그 와중에 적당히 지루하지 않도록 진귀한 장면만 잘 채워넣으면 즐길 만한 영화가 될 거라고 보았다는 뜻이다. 이런 경향은 1960년대 후반, 그러니까 대략 <007 두번 산다>가 나올 때 즈음 확실히 심해졌다. <007 두번 산다>의 각본을 맡은 인물은 의외로 짜릿한 줄거리의 단편소설을 잘 쓴 것으로 명망 높은 영국의 대작가 로알드 달인데, 이런 것을 보면 로알드 달은 첩보를 소재로 영화 줄거리를 쉽게 꾸며내는 묘수가 무엇인지 진작에 간파했던 것 같다.

이렇게 여유롭고 헐렁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에서도 계속 볼거리를 던져주려면, 보통 사람이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놀랍고 이상한 짓을 악당쪽에서 계속 시도하는 내용을 펼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러다 보니 이 시대의 첩보영화 속 악당들은 SF영화에 나옴직한 신기한 미래의 신무기, 세상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놀라운 미래 기술, 이상한 과학을 이용하는 알 수 없는 테러리즘 수법 등을 자주 사용하곤 했다. 예를 들면 <007 두번 산다>에는 커다란 우주선이 악어처럼 입을 벌려 다른 나라의 우주선을 잡아먹는 납치 장면이 나온다. 이런 영화들을 두고 한때 첨단 기술을 소재로 하는 영화라는 의미에서 ‘테크노스릴러’라고 불렀는데, 사실 그런 이름이 무색하게 <007 두번 산다> 즈음 되면 스릴러도 아니고 그다지 말이 되는 기술을 쓰지도 않는다. 요즘에는 아예 SF물을 뜻하는 SCI-FI와 스파이라는 말을 조합해서 SPY-FI 영화라는 말도 쓰는 것 같다.

그런 영화들 중에서도, 모든 단어를 올리브기름에 버무린 버터 같은 말투로 말하면서도 근사하게 노래도 잘 불러 나이 들어서도 바람둥이 같다는 명성이 높았던 딘 마틴을 주인공으로 기용한 영화가 <헬리오 특공작전>이다. 그가 연기하는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은 맷 헬름인데, 맷 헬름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세편이 더 있어 이들을 함께 묶어 맷 헬름 시리즈라고 한다. 하나같이 1960년대 후반 헐렁한 분위기의 제임스 본드 영화를 한층 더 헐렁하게 만든 영화다.

그러므로 <헬리오 특공작전>의 진짜 중심 내용은 멋진 배우들이 계속 나오는 장면을 보여주고, 그 사이사이에 딘 마틴이 돌아다니며 싱거운 농담을 줄줄 주워 삼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으로 영화를 유지하자니 이야기를 이어갈 만한 SF 소재가 필요한지라 이 영화에도 SF가 꽤나 듬뿍 들어 있다. <헬리오 특공작전>의 악당들은 헬리오빔이라는 무기를 개발해 미국을 위협하는데, 태양의 힘을 모아 미국 도시에 광선을 발사하는 이 무기는 미처 방어할 새도 없이 도시를 펑 터지게 만드는 위력을 발휘한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아무도 설명하지 않고 이 놀라운 무기의 원리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다. 그래도 그 덕에 영화가 이어질 수 있었고 흥행에도 성공했다. 어쩌면 헬리오빔의 원리 같은 것을 너무 심각하게 따지지 않고 애초에 진지한 분위기는 포기한 영화였기에 오히려 성공한 것인지도 모른다.

<헬리오 특공작전>을 두고 이제 와서 누구에게나 추천할 만한 영화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한 시대의 문화를 이끌어가고 그 시절 세상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 시대의 명작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잡다하게 쌓이기 마련인 여러 아류작, 모방작, 이류작 등등이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한국인의 냉면 문화를 이야기하려면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평양냉면집 가게의 맛 이상으로, 전국 수많은 고깃집에 후식으로 먹는 냉면을 납품하는 이름 없는 냉면육수 공장의 맛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그 시대가 어떠했는지, 그 시대의 예술이 다음 시대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 알기 위해서는 고깃집 후식 냉면 같은 영화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끔 그런 아류작과 모방작이 그 위치를 튼튼히 하는 바람에 역으로 다음 세대의 일류 영화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나중에 나오는 정식 제임스 본드 시리즈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는 공교롭게도 <헬리오 특공작전>처럼 태양에너지를 이용해 도시를 파괴하려는 계획을 세운 악당이 나오고 휴양지를 돌아다니는 제임스 본드와 대결한다. 그외에도 신기술을 이용해 세계를 정복할 괴상한 음모를 꾸미는 부유한 기업인이 악당 두목으로 나오는 온갖 액션영화들은 요즘에도 많은데, 그런 영화들의 토양이 된 영화들 중에 <헬리오 특공작전>도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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