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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읽는 직업
송길영(Mind Miner) 2022-09-01

글을 읽는 것도 직업이 될 수 있을까? 사람들이 남긴 글을 보고 그들의 생각을 읽어내는 ‘마인드 마이닝’을 직업으로 가진 나는, 강연자로서 ‘말하고’ 작가로서 ‘쓰는’ 것보다 ‘읽는’ 직업을 더 먼저 갖고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워낙 활자 중독인데다 직업상 관점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읽어야 하기에 자연스레 읽을거리가 서재와 노트북에 쌓이게 된다. 공부하다 발견한 좋은 책들을 하나둘씩 주변에 알리다보니 방송이나 유튜브에 출연하면 책 추천을 해달라는 부탁을 종종 받는다. 그렇게 알린 책 중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얻은 것들이 나오자 판이 커지게 되었다. 출간 전 추천사를 써달라고 출판사들이 보내오는 책들부터, 한번 읽어보라며 보내주는 책들까지 차곡차곡 쌓여 벽면을 가득 채운 책꽂이로 어림도 없게 되었다.

그간 밀린 책을 포함해 이번주에만 7권의 추천사를 출판사에 보냈다. 대부분 인간 삶의 이해를 데이터로 풀어낸 책들이었는데, 추천사를 써야 하니 반강제적으로 주제 중심의 독서를 단기간에 하게 된 셈이다. 데이터라는 공통 주제로 다양한 관점, 경험, 주장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각 저자 나름의 색다른 생각의 얼개가 담긴 책들을 몰아서 읽고 나니 왠지 조금 더 똑똑해진 느낌이다. 이 ‘읽는 직업’, 참 맘에 든다는 생각을 했다.

쓰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외로운 과정인지 잘 알기에 읽는 직업이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글을 쓰고 두부를 먹고 다시 쓰고 달리기를 하고 다시 쓰는, 장거리 마라톤을 하듯 글쓰기를 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저질 체력과 박약한 의지의 나로서는 그저 경외감이 들 뿐이다.

혼자 골방에서 상상만으로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지혜와 손을 빌려 조사와 검증을 해야 하는 주제라면 아무리 체력이 좋고 머리가 비상해도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쓰는 직업보다 읽는 직업이 덜 부담스럽고 자유롭게 느껴진다.

하지만 읽는 직업은 경쟁이 치열하다. 하루에도 무수한 양의 글과 뉴스가 생성되고, 또 그에 대한 무수한 댓글이 쏟아진다. 이런 환경에서 누군가의 글을 읽고 옥석을 가려 추천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려면 보통 기예로는 어림없다. 전 국민이 읽고 쓰는 일에 진심인 우리나라에서 감히 읽는 직업을 갖겠다는 건 너무나 호기로운 욕심이다. 읽기는 자유롭고, 깨달음과 충만함을 주는 매력적인 행위이지만 이를 ‘전문직’으로 삼으려면 쓰고 말하는 이상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래도 꿈꿔본다. 이렇게 치열한 환경 속에서 ‘읽기’를 직업으로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영예로울지 말이다. 달콤한 상상을 하며 눈뜨자마자 쌓여가는 글들을 읽어낸다. 가을의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듯 읽을거리가 쏟아지지만 오히려 즐겁다. 가능한 한 오래오래 읽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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