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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의 오늘은 SF] 망한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투쟁하기
이경희(SF 작가) 2022-12-15

<블레이드 러너 2049>

나름 한국에서 사이버펑크 전문(?) 작가로 활동 중이어서인지 가끔 사이버펑크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SF의 정의가 무엇이냐는 질문만큼이나 답하기 어려운 주제인데, 내가 주로 답변하는 방식은 이렇다. 사이버펑크(Cyberpunk)는 ‘사이버펑크적인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활극이다. 혹은 가까운 미래의 암울한 첨단 기술이 잔뜩 등장하는 ‘펑크한 장르’다. 하하, 물은 축축하고 고담시는 고담에 있다.

모호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부디 이해해주시길. 사이버펑크를 접한 적 없는 사람에게 사이버펑크를 설명하는 건 마치 코끼리를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코끼리를 설명하는 일과 같다는 말이다. 사이버펑크에 대해 지금 당장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그냥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로맨서>를 읽으시길. 나는 가끔 이 서브 장르가 그저 <뉴로맨서>라는 왕릉의 부장품을 도굴하는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물론 미학적으로는 <블레이드 러너>와 <공각기동대>의 성취도 빼놓을 수 없긴 하지만.

여하튼 사이버펑크를 논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사이버펑크적 미래’라 할 수 있겠다. 가능한 한 모든 미래가 아닌 오직 사이버펑크적인 미래를 배경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

테이블톱 롤플레잉 게임(TRPG) <사이버펑크>의 제작자 마이크 폰드스미스에 따르면 사이버펑크를 정의하는 것은 ‘분위기’ 그 자체다. 음습하고 어두운 거리, 추적추적 내리는 비, 기모노 홀로그램과 망가진 히라가나 네온사인, 빽빽하다 못해 미어터지는 초고층 빌딩, 첨단 기술과 자본에 지배당하는 하류층 사람들, 기계에 잠식된 인간성, 디지털 카우보이와 사이버 스페이스, 로큰롤과 반항 정신, 전자 마약과 불법 향정신성 의약품, 뉴웨이브 신비주의…. 대충 이런 것들이 등장하는 세상이 사이버펑크적 미래인 셈이다. 사이버펑크 창작자들은 지금도 사이버펑크적인 기술과 장치들, 사이버펑크가 창조해낸 레트로 퓨처리즘 모티브를 반복해 쌓아가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이버펑크는 애초에 1970~80년대 사람들이 상상한 미래다. 유년기와 청년기 내내 히피 정신과 대마와 로큰롤에 찌든 채 성장해온 어른들이 그들의 몰락에 관해 기록한 디스토피아란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미래일 리가 없다. 애초에 윌리엄 깁슨은 타자기로 <뉴로맨서>를 썼다. 핵탄두 비행 궤도 연산이 가능한 컴퓨터로 고양이 합성 사진이나 만들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거다. 그 시절 사람들은 아마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혁명은 어영부영 끝나버렸고, 히피들이 꿈꾸던 평화와 희망의 70년대 따위는 오지 않았다고. 전쟁은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테고, 인간성의 가치는 퇴색될 것이며, 도시는 질병처럼 번식해 숲과 자연을 말살하고, 메가 기업은 점점 영향력을 확대해 국가마저 돈으로 집어삼킬 거라고. 아, 물론 그 세상을 지배하는 건 당연히 일본 전자 기업들이다. 치바시는 세계 제일의 하이테크 도시고.

하지만 그곳에서도 투쟁은 계속될 거라, 그들은 믿었던 것 같다. 적어도 희망했던 모양이다. <뉴로맨서>의 주인공들은 초거대기업 테시어 애시풀에 맞서고, <공각기동대>의 주인공 쿠사나기 소령은 초인적 능력으로 권력을 초월한다.

<블레이드 러너>의 레플리칸트들이 자유를 위해 벌이는 처절한 투쟁은 또 어떤가. <다이디타운>에서는 찌질한 하드보일드 탐정조차 혁명의 주동자가 되고, <토탈 리콜>에선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독재자의 머리를 터뜨려버리기까지 한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혁명 이야기인 <매트릭스>를 거쳐 21세기까지도 이런 전통은 무사히 이어지고 있다.스팀펑크니 디젤펑크니 온갖 펑크들이 난립하는 요즘에야 의미가 많이 퇴색해버리고 말았지만 사이버펑크는 어쨌든 펑크 정신을 부르짖는 장르다. 오죽하면 장르 이름에다 ‘펑크’(Punk)를 넣기까지 했을까. 싸우라. 누구나. 저항하라. 아무렇게나. 아님 다 함께 시원하게 망해버리든지. 사이버펑크 장르는 거창하건 미미하건 자본을 조롱하고 메인스트림을 부정하는 이야기들의 집합일 수밖에 없다. 이 기괴한 미래 세상에서 저항을 빼버리면 사이버 포르노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최근 들어 사이버펑크의 의미가 조금씩 달리 읽히는 것 같다. 윌리엄 깁슨 시절 사람들에게 사이버펑크는 반세기 이상 떨어진 아득한 미래였지만, 2022년의 우리는 기술적으로 사이버펑크의 눈앞까지 도달한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이제 이 서브 장르는 점차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좀더 엉성하게 망해버린 버전으로. 적어도 사이버펑크 세상에선 인공지능을 소유한 메가기업 총수가 고작 소셜 미디어 서비스를 망치느라 60조원을 허비하진 않았단 말이다.

아무튼 우리도, 아직은 싸우고 있다. 그 시절 사람들이 상상했던 모습처럼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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